그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노동하는 예술가. 그의 낮과 밤은 쉴 틈이 없는데요. 음악작업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동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그는 일과 예술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무엇에 전념해야 할지 마음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줄타기를 좀 더 더 낭만적으로 하기로 결심했고, 지난겨울 런던으로 떠났죠. 돈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기엔 생업과 예술 그 어느 것 하나 타협하지 않고 단단하게 삶과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밴드 ‘오핑(offing)’의 본체, 정채리를 만났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됐어요?
채리_ 어렸을 때부터 음악 듣는 걸 좋아했어요. 정말 안 들어본 음악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를 다 들었는데, 하도 음악을 많이듣다 보니깐, 기존의 음악들이 다 시시하고 뻔한 거에요. 음악을 들을 때마다 신선함이 없었달까. 그래서 적당히 뻔하고 재미없는 음악들 사이에서 내가 직접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좋은 음악을 듣고 싶다면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는 게 대부분인데, 직접 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신선해요.
채리_ 전 음악을 만드는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곡을 만들게 된 기원으로 돌아가 보면 사실 친구 놀리려고 아이패드로 테마송 만들면서 놀다가, 한 친구가 곡이 되게 좋다며 호응해줬고,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려보라는 주변지인들의 권유로 곡을 선보이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업로드 하고서 전혀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사람들이 제 노래가 좋다며 반응을 해주더라고요. 그 때 엄청난 희열을 느꼈어요. 저에 대한 배경도 모르고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오롯이 저의음악으로써 저를 좋아해 주는 거잖아요.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사람들의 반응을 점점 더 얻으면서 자신감이 생겼고요. 그리고 그 반응을 계속 더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관종인가봐요. (웃음)
음악을 시작했을 당시에도 일을 하고 있었다고요.
채리_ 곡을 만들어 사운드 클라우드에 막 올리던 무렵에 무역회사 해외영업부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일단, 일이 정말 많았고 야근도 잦았고. 그런데도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음악을 만들었어요. 곡을 만드는 작업 자체가 너무 재밌기도 했고 저의 음악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몸이 힘든 것도 잊은 채 곡 작업에 몰두했던 것 같아요. 물론 풀타임잡으로 일하고 밤에 또 창작활동을 하다 보면 정말 피곤한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반응이나 댓글, 응원을 받으면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졌달까. 결국 음악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꾸준히 느꼈던 것 같아요. 아티스트로서 내 음악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형성된 시절이기도 하고요. 그러던 와중에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에서 연락이 왔고, 인디신에 엉겁결에 진입하게 됐네요.
이토록 고유한 밴드 오핑의 음악
밴드 오핑은 어떤 스토리를 갖고 있나요?
채리_ 원래는 1인 밴드였어요. 요즘 공연할 때는 3인조 밴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 오핑의 모습은 어떤 것으로도 규정되지 않았으면 해요. 이를테면 인디밴드다, 3인조다 등. 최대한 음악을 통해 여러가지를 해내는 밴드가 되고 싶은 욕심이 크고요. 직접 커버 아트를 만드는 것도 단순히 음악만 하는 밴드로 남고 싶지 않아서예요. 이름에 대해서도 물어보셨지만 별 의미 없어요. 구글에 가장 아름다운 단어 100선을 검색해 가장 부르기 좋은 걸로 이름을 붙였죠. 사실 이름이 뭐 중요한가 싶어요. 좋은 음악을 만들어 이름을 멋있게 들리게 하자는 취지에서 대충, 아무 이름이나 갖다 썼어요.
오핑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서 조금 더 알려주세요.
채리_ 미디어 인터뷰를 하면 보통 얼터너티브 록 밴드로 분류되긴 하는데,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음악이면서도 중독적인 사운드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음악을 하는 밴드라고 생각해요. ‘메시지’라는 곡이 오핑의 음악 세계를 잘 보여주는데요. 일단 곡 길이가 무려 6분이 넘어요. 그리고 로우파이 사운드가 스며들어 길더라도 듣다 보면 중독되어서 계속 듣고 싶게 만드는 그런 노래랄까? 기존의 음악들이 가지는 문법을 깬 곡이라 제가 오핑을 소개할 때 꼭 언급하는 곡이기도 해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 ‘기존의 틀을 깨고 싶어 하는 욕구’가 보여요. 예술로써 저항하고 싶은 게 있나요?
채리_ 네, 있어요. 기존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음악을 한다는 것, 생태계를 파괴할 정도로 실험적이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모험심이 반영되어 있는, 그래서 음악을 들었을 때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어서 귀에 맴도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음악은 길어야 4, 5분 남짓의 결과물로 탄생되는 예술이잖아요? 이 짧은 형태의 예술을 사람들이 좀 더 길게 향유하도록 하고 싶달까. 그리고 음악에도 기승전결이 오롯이 담긴 서사성을 꼭 지켜내고 싶어요. 요즘은 음악들에는 실종된 내러티브와 철학들이 제 음악에는 잘 담기기를 바라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울프 앨리스’의 ’Don’t delete the kisses’가 제가 만들고 싶은 음악의 원형 같은 건데요. 이 곡을 듣다 보면 음의 고조가 스토리와 일치하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마치 귀로 이야기의 장면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줘요. 우리 음악에서 사람들이 이런 걸 느꼈으면 해요.
일하는 예술가의 일상
낮에는 회사로 출근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가 창작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생업과 예술, 병행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채리_ 맞아요. 제가 더 야망이 있었다면 예술에만 전념했을 거에요. 예술도 시간과 노력, 어느 정도의 노동이 따라줘야 질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데 딱히 음악 작업을 하기 위해 지원받을 수 있는 환경은 아니였어요.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건데, 해보니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창작활동을 같이 한다는 게 정말 욕심이더라고요. 너무 힘들었어요. 하지만 어쨌거나 둘 다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어떻게든 긍정적인 생각을 단 한 방울이라도 짜내보려 했지만 정말 좋은 점이 없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지금 다시 질문을 받고 돌이켜보니 아예 없던 건 아닌 거 같아요.
궁금하네요. 어떤 점이 좋았나요?
채리_ 주변에서 음악에만 전념한다면서 생업을 내려놓고 예술 활동에만 치중하던 분들을 많이 봤어요. 처음엔 좋아 보였지만 어느샌가 루틴이 깨지고 삶이 나태해지는 걸 목격했죠. 조금 더 과장하자면 삶을 구성하는 당연하고 소중한 사이클들이 무너지는 것 같았달까. 근데 저는 어쩔 수 없이 돈을 벌어야 하니 출근하려면 아침에는 일어 나야하고 8시간 꼬박 일하고 퇴근하면 피곤해서 밤에는 자게 돼요. 불면증 완전 퇴치. 일을 하면서 소위 말하는 예술병이 치료됐죠. 사실 영감이라는게 언제 올지 모르니 시간 개념 없이 낮이고 밤이고 자신만의 동굴을 만들어놓고 작업에 몰두하는 예술가들이 많아요. 저도 그랬던 적이 있고요. 물론 이렇게 몰입해서 멋진 결과물들로 보상 받으면 좋긴한데, 창작물만 남고 나는 사라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생업은 어떤 루틴과 습관을 길러주고 이로 하여금 예술과 나의 삶 사이에 균형을 맞춰주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세상에 적당하게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기도 했고. 사실 예술을 한답시고 세상과 동떨어져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돈에 얽매이지 않고 음악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채리_ 실제로 공연하거나 앨범을 제작할 때 일을 하면서 버는 고정 수입이 없었다면, 자금 걱정을 하느라 제가 하고싶은 대로 온전히 진행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또 수입이 있다 보니깐 세션 멤버들에게 소정의 사례도 할 수 있고, 그럴 여력이 생겨서 좋았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채리_ 도피처인 것 같아요. 반복되는 일상에 예술이 개입함으로써 그 순간이 좀 더 특별해지고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일상 자체를 아예 바꿔버릴 순 없어도 음악 뒤에 숨을 수는 있으니까. 그래서 도피처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좋은 영화를 보거나, 좋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때만큼은 현실을 잊고서 나만의 감상에 빠질 수 있잖아요. 거창해 보이는 거 딱 싫지만 그래도 한 번은 거창해지자면, 저희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숨을 공간을 만들어줬음 해요. 최대한 신선하고 멋진 음악으로.
채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장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다”_앤디 워홀
오늘도 낮과 밤으로 예술하기 위해 노동의 현장에서 땀 흘리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삶의 모든 순간이 예술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고 싶은, 그런 응원이 인터뷰를 하는 내내 마음에 가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