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음원이 쏟아집니다. 음악을 선보일 수 있는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레코딩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모두가 쉽게 음악을 쓰고 만들고 유통하죠. 그야말로 곳곳에 음악이 산재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메시지와 완성도를 고루 갖춘 뮤지션의 등장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2018년 [Mother and Lover]라는 첫 번째 정규음반을 낸 음악가 천미지는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놓쳐서는 안 됩니다. 3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를 톺아보세요.
D.I.Y 인디의 방법으로
2014년 홍대 인근을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한 천미지. 그는 그야말로 독립, 자생에 싹을 둔 인디 뮤지션입니다. 누구나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오픈 마이크’를 통해 데뷔 초부터 음악 실력을 쌓았습니다. 2004년 즈음 산울림 소극장 주변으로 위치를 옮겨 오랜 시간 홍대 인디씬을 지키고 있는 클럽 ‘빵’, 카페 겸 공연장 ‘언플러그드’ 등은 그의 주 활동무대. 그를 포함한 많은 인디 뮤지션들이 여전히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음악을 꺼내놓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곡을 직접 쓰고 홍보합니다. [Mother and Lover] 역시 그렇게 탄생했지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곡을 스스로 꾸린 그는 이후 음반 제작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활용했습니다. 미발매 곡과 그의 색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커버 곡들은 자유롭게 음원을 공유할 수 있는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인디와 메이저의 경계가 모호해진 요즘 천미지는 인디(indie, independent의 준말) 그러니까 독립적인 방법으로 꿋꿋이 자신의 것을 알리고 만듭니다.
여성이기에 말할 수 있는 것들,
여성임에도 말하고 싶은 것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주체적 목소리, 더욱 좁게 여성의 성적 욕망과 같은 것은 편하게 발화될 수 없습니다. 곡의 생명력이 이어지려면 듣는 수요층이 있어야 하는데 문화와 정서가 이를 억누르죠. 많은 여성 창작가들이 꾸준히 여‘성’의 것을 쓰지만 그에 따른 관심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천미지는 [Mother and Lover]에서 당차게 여성의 정체성을 전면에 세웁니다. 음반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엄마 그리고 사랑’에 대한 것들을 거칠고 섬세하게 품습니다.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엄마와 딸의 뒤엉키는 양가적 감정, 여성임에도 말하고 싶은 성적 욕망이 음악의 자양분이 됐습니다. ‘I want to be your mother’, ‘My satisfiable baby’ 등은 엄마가 준 사랑과 상처를 토해내지요. ‘너를 잡아먹겠다’ 아니, ‘너를 사로잡겠다’는 외침이 번뜩이는 ‘Don’t be scared’에 쌓인 성적이며 중의적인 표현 역시 눈여겨볼 요소. 성에 관한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보단 분노에 차 우회함으로써 여성에게 강요된 가부장적 굴레를 은유적이고 공격적으로 전유했습니다.
록과 포크, 장르의 이분법을 깨다
여성 음악가, 특히 여성 인디 뮤지션의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인 포크 음악을 기대했다면 일찌감치 숨을 고르어야 합니다. 그는 부딪히고 깨드리고 파헤치며 록적인 터치로 사운드를 채웁니다. ‘긴 머리에 어쿠스틱 기타 하나 들고 일상의 소소함을 노래하는 여성 뮤지션’ 2018년 한 기사에서 뮤지션 오지은이 여성 음악가를 둘러싼 정형성을 비판하며 예로든 고정관념을 천미지는 완벽하게 벗어납니다.
그가 손에 쥔 음악적 질료는 포크의 건조함, 개러지 록의 거침, 펑크의 솟아남을 오갑니다. 흔히 포크를 여성적이고 록을 남성적인 장르로 인식하지만 그 선입견은 사실 깨진 지 오래 돼었습니다. 특히 여성의 이야기를 목청 높여 부르는 그의 모습은 1990년대 미국 음악계에 분 여성주의 문화 운동 ‘라이엇 걸(Riot grrl)’ 무브먼트를 떠올리게 합니다. 록밴드 홀의 코트니 러브와 비키니 킬 등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이 흐름은 광폭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여성 연대와 여성 해방의 메시지를 설파했습니다.
천미지의 음악은 우리가 체화한 ‘여성 인디 뮤지션’에 관한 모든 것을 조각냅니다. 금기시되어 왔던 여성의 주체적인 욕망, 성적인 발화 나아가 엄마를 향한 사랑과 미움, 상처와 아픔 따위를 너무나도 선명하고 오롯하게 적어냈죠. 세상에 음악은 많고 그 음악들은 또 너무나 쉬이 떠오르고 가라앉습니다. 여기, 주목해야 할 서사와 움직임으로 무장한 뮤지션 천미지가 있습니다. 도래할 새해 더욱 또렷이 그의 행보를 주목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