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우상이 될 수 있는가

피할 수 없는 우상화 속
작가와 작품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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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화는 전체주의 국가의 오랜 생존 전략이었다. 만인이 우러러 삶의 귀감으로 삼는 완전한 존재, 마치 신처럼 고결하고 흠결 없어 마땅한 존재. 개인을 전체를 위한 소품으로 간주하는 국가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우상이 필요했다. 우상화는 프로파간다, 신화 만들기, 명령과 규칙, 상벌제도 등 아주 전방위적이고 교묘한 심리적 전술로 완성된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토록 폭압적인 의미에서의 우상은 찾아볼 수 없는 듯 보였지만 실은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우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국어사전에서 명시하고 있는 ‘우상(偶像)’의 의미는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을 뜻한다. 국어 표기보다 영어 표기가 더 익숙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우상의 영어 표기인 ‘Idol’이 쇼 비즈니스 업계의 걸/보이 그룹을 통칭하는 낱말이 되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과 유명인에 지워진 우상의 숙명을 얼핏 알만하다. 말의 뿌리에는 ‘숭배’의 의미가 깃들어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숭고한 완전체로 대하고자 하는 욕망을 일상에서 그다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작가와 작품의 거리에 대하여

2002년 마이클 잭슨 공연 현장
2002년 마이클 잭슨 공연 현장, 이미지 출처: 마이클 콜필드

대중 문화와 고급 예술을 막론하고 우상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우상의 존재를 피부로 깨닫게 되는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상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들에서다. 우리는 작가(예술의 창작 행위를 하는 사람의 일반을 통칭)를 먼저 만나기 보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본다. 탁월한 문학과, 음악과, 영화와, 미술을 마주하며 그것들에게서 ‘작가성’이라고 부를만한 아주 복잡 미묘한 텍스쳐를 감지한다. 작가성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명쾌하게 풀어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대개 우리가 찬탄하는 대상은 이 애매모호한 무엇을 향해 있다. 작가성에 나름의 해석과 탐구의 열망을 쏟게 되는 이유 역시 ‘애매모호하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무엇’의 성질로부터 근거한다.

그런데 이 식별하기 힘든 작가성을 좀 더 명쾌하게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행위로서 혹자는 작가의 배경을 탐식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그 방편이 해석에 이르는 가장 쉬운 접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과 작가는 헤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에 작가의 배경은 일정부분 작품과 작가성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작품은 작가가 보고 듣거나 경험한 자전적 소재에서 피어나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와 작품을 1대 1의 등치 관계로 상정하려는 욕망은 다소 위험해 보인다. 문제는 작품과 작가를 연관짓는 상상력에 이렇다할 성역이 없고, 이 행위는 오히려 작품을 지워내 작가를 전면에 부상시키며, 나아가 작품을 향유하는 수용자의 능동적 여지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과 성격, 신체적/정신적 병명, 인간 관계와 애티튜드, 정치적 편향, 성적 기호와 취향, 불법 행위, 혹은 불법은 아니지만 불순하게 느껴지는 행위 등 작가에 관한 모든 사적 정보가 작품의 해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해석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무엇보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이후 (상징적 차원에서) 더 이상 작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까닭이다.

밥 딜런이 기자 회견에서 흡연을 하는 장면
밥 딜런이 기자 회견에서 흡연을 하는 장면, 이미지 출처: 피에르 고도

예술(가)을 지지할 것인가 vs 거부할 것인가

이러한 주제를 꺼내게 된 것은, 이 문제가 종종 문화예술을 대하는 우리를 매우 난감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음 깊은 곳에 작가의 성전을 품고 예술을 탐구하는 동력으로 삼아 왔지만 여러 번의 고비를 맞이했다. 가령 이런 부차적 고민이 따라오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해당 작가의 모든 작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할까, 이미 훌륭하다고 느꼈던 작품들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소급해 삭제해야 마땅한 것일까, 와 같은 질문들. 여전히 주변에서 각자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던 어느 예술가에게 배반 아닌 배반을 당한 경험으로 상처입고 곤혹스러워 하는 이들을 본다. 특히 작가의 도덕성이나 가치관(각종 의미에서의 정치적 견해)의 문제가 가장 곤란한 화두가 된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정보가 작가의 작품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열광적 지지’ 혹은 ‘보이콧’으로 완벽하게 갈라친 두 영역을 제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 앞에서 ‘0’ 아니면 ‘1’을 선택해야만 하는 듯 보인다.

어느 작가에게서 받은 배반의 경험으로 인해 보이콧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해 보자. 0과 1 중 하나를 선택했지만 불행히도 사유는 거기에서 일단락되지 않는다. 질문은 질문에 꼬리를 문다. 전면적인 거부를 하기로 결심한 경우, 나는 과거에 작품 X를 통해 느꼈던 압도적 감흥을 모조리 부정하거나 반성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작가를 우상화하는 동안 몇 가지 짚어 두어야할 기준에 대해 지나치게 소홀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우상들을 차례로 검열해 보아야 하지는 않을까? 지금까지 작품 X뿐 아니라 나의 모든 감상의 행위 역시도 검열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검열의 기준은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해야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어떤 예술을 취사 선택하고 지지해야 하는 것인가?

마지막 질문에 이르면 우리는 너무나 무력해지고 만다. 작가를 정말로 신의 자리에 놓으려 하는 것은, 대중 매체의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인 것은 아닐까. 작품을 감상하는 나의 모든 행위 전반에 작가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다면, 더 이상 나는 작품 앞에 선 독립적 개인이 아니며 언제라도 작가에 의해 변형될 수 있는 생각을 가진 하위의 존재에 불과하다. 스스로 작품을 해석할 권리를 가졌다고 착각하지만 작품 외적 요소에 끌려 다니는 꼭두각시일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우리 내부에 지어진 우상의 성전을 무너뜨릴 것을 제안한다. 예술은 절대적으로 작가의 그림자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장면
이미지 출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러므로 우상에 반대한다

이 글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작가에 대한 비호가 아님을 일러둔다. 깔때기에 걸러져 나온 일면의 정보를 주워 법관 노릇을 대리할 생각이 없는 나는, 그보다도 작품을 읽는 수용자로서 향후 어떠한 해석틀을 마련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더 시급한 책임을 느낀다. 게다가 나는 현재 관객의 역할에 더욱 몰두할수록 작가의 사사로운 사정에 대해 점차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 정확히는 작가를 잃어버리려 애쓰고 있다. 결국 작가를 완벽히 지워낼 수는 없겠지만 이 일은 의식적으로 지속해야할 일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다름아닌 나를 비롯한 관객과 수용자에 대한 비호에 해당한다. 우상의 그림자 속에서 작품을 한정적으로 마주보고, 극단적 선택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야하는 숙명에서 우리를 구해내기 위한 비호이다. 작가에 열광하고 다시 등을 돌려야 하는,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변화 앞에서 나날이 무력해지지 않기 위한 제안이다. 불운한 사건을 마주한 열광론자들의 당혹감, 내지는 상처에 대해서도 이제는 생각해야할 때이지 않을까. 작가 개인은 우리의 이러저러한 사정을 일일이 비호할 작정으로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 우리 개인이 타인을 매순간 의식하고 살아가지 않는 것처럼.

단호하게 말해 보았지만, 예술에게서 예술가를 분리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그럴듯한 원칙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법과 질서가 언제나 반듯한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법과 질서로 대두된 문명의 조각 또한 불완전한 인간의 산물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옳고 그름, 지지와 거부, 유죄와 무죄라는 편의적 이분법에서 나는 언제나 정보 부족의 문제에 당면한 제3자에 불과하다. 단지 불완전한 인간과 불완전한 규율에 필연적으로 자리한 한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만이 분명한 사실로 다가올 뿐이다.


현상을 이해하는 일은 나날이 정교해질 수 있지만, 결국 완성될 수는 없다. 세상을 0과 1로 깔끔하게 유리된 세상으로 이해하기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무한소수의 영역을 감지하는 시야는 다름아닌 작품과 예술 그 자체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우리 내부의 우상을 하루하루 지워내 작품과 개인이 희미해지지 않은 채 보다 마주할 수 있다면, 더욱 풍부한 담론과 의제는 샘솟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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