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구조,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
“글을 쓰려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엄청나게 진지한 자세이며, 다른 하나는 안타깝지만 재능이다.”_어니스트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등의 대작을 쓴 문학의 거장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입니다. 헤밍웨이는 의지만 가지고선 글을 쓰려는 사람,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재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죠. 엄청난 노력파로 알려진 헤밍웨이지만, 그 역시 오랜 시간 젊은 작가들의 성패를 지켜보며 내린 결론일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말은 오늘날 한국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유효한 말입니다. 하지만 반만 맞는 말이죠. 등단을 통해 문학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작가는, 재능이 충분해도 향후 거취가 불투명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문단의 힘은 막강합니다. 등단 과정뿐 아니라 작가의 생애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작가들 중 문단과 관련이 없는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또한 한국 문단은 폐쇄적입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죠. 폐쇄된 문단구조는 여러 병폐를 낳았고, 이는 문단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로 이어졌습니다. 우후죽순 나타나는 독립 문예지가 그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에도 아직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폐쇄적인 문단구조와 비대한 권력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우선 출판업계가 검증된 작가들이 다수 포진한 기성 문단을 선호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를 출간해 수익을 내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게 인지도가 높은 작가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출판업계가 문학성보다는 상업성을 중시하며 신인 작가들이 설 땅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약육강식의 생태계를 견디지 못한 작가들은 절필하고 문단을 떠나버렸습니다. 신인 작가들은 성장 발판을 잃고, 오히려 기성 작가들이 더 많은 집필 기회를 얻는 ‘기회의 양극화’로 인해 문단구조와 권력이 점점 공고해지게 된 겁니다.
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줄며 곁가지로 뻗어 나가는 시도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뭉쳐야 산다’는 수요가 줄어들 때 대처하는 전략 중 하나죠. 시장의 규모가 작으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강력한 중앙문단이 형성되고 신인 작가들에겐 오직 하나의 선택지가 남겨지게 됩니다. 등단을 통해 문학 제도권에 진입해 묵묵히 버티며 인지도를 쌓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부조리와 착취는 성공을 위해 응당 견뎌야 할 몫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등단장사와 갑질 등 문단 내 적폐로 꼽히는 일들은 모두 중앙·획일화된 문단구조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문단구조는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알 수 없는,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 같습니다. 헤밍웨이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등단제도, 존폐의 갈림길에서
한국에서 등단하는 방법은 크게 두 트랙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문사에서 매년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문예지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 당선되는 방법입니다. 반세기 전에는 추천제 형식의 등단도 존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추천권을 가진 문인들의 권력이 여러가지 폐단은 낳으며 요즘엔 거의 사라졌다고 합니다.
등단 작가라는 타이틀은 똑같이 부여되지만 두 트랙 사이엔 뚜렷한 선호도 차이가 존재합니다. 요즘 작가들은 대부분 문예지 등단을 희망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닙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신춘문예가 두터운 독자층과 막대한 상금을 앞세워 주요 등단 매체로서의 권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기반의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출판사들이 잇따라 문학상을 제정하며 신춘문예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죠. 더 큰 문제는 신춘문예가 등단의 통로로만 기능할 뿐, 등단 후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작가들이 돈도 많이 주고 꾸준히 글을 쓸 공간을 제공하는 문예지로 몰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죠. 이런 과정 끝에 신춘문예는 타이틀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등단제도는 한국과 일본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시스템입니다. 우리나라에선 1900년대 초 일본으로부터 신춘문예 제도가 들어오며 틀이 잡히기 시작했죠. 즉 등단제도는 100년이 넘게 유지돼온 제도라는 뜻입니다. 아시다시피 등단제도는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존속될 수 있었던 건 단점을 상쇄하는 장점이 존재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등단제도의 장단점은 무엇일까요?
단점은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먼저 등단제도는 여러 불공정 관행들을 낳았습니다. 가령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해야 한다는 조항과 문예지들의 등단장사는 ‘심사 권력’이 신인 작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쓰인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등단 이전엔 사제 간의 위계질서가, 등단 이후엔 불투명한 청탁 시스템이 부조리를 확대·재생산하는 배양지가 됩니다. 해마다 등장하는 문단 내 미투와 수상 거부는 문학적 사명은 커녕 문학이 가진 일말의 자정 기능마저 의심케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문학이 트랜드에 갇혀버린다는 점입니다. 등단에 관여하는 심사위원들은 웬만하면 잘 안 바뀐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뽑히는 작품도 ‘어디어디 스타일’로 굳어져 있다고 하죠. 요즘엔 페미니즘과 퀴어, SF가 트렌드인 듯합니다. 이게 문제는 아니지만 이 분야의 작가들도 언젠간 기성 문인이 되어 등단제도에 자신의 취향을 투영할 것입니다. 주체만 변했을뿐 다른 목소리를 말살하는 문단구조는 그대로 세습되는 것이죠. 현재의 등단제도는 다양성을 지향하는 문학의 정신에 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점들을 보면 등단제도는 분명 사라져야 할 제도 같습니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등단 시스템에도 장점이 존재합니다. 우선 등단제도는 문학이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하도록 하는 파수꾼으로 기능합니다. 자비 출판이 늘어나고 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기본적인 문법부터 엉망인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죠. 등단 작가라는 타이틀은 독자의 신뢰를 얻는 강력한 보증입니다. 출판 시장에 보증된 작가들이 꾸준히 유입될 때 소비자들의 입장에선 졸작을 만나 돈과 시간을 낭비할 리스크가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등단제도는 작가지망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분명 신인을 착취하는 제도라 전술했는데, 아이러니한 일이죠. J.K롤링의 해리포터 원고가 열두 군데 출판사에서 퇴짜 맞았다는 이야기는 잘 아실 겁니다. 엄청난 대작이었지만, 롤링이 무명이었다는 점이 아마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처럼 출판사는 상업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업성은 소수의 출판사 수장들이 감정하죠. 투고와 퇴짜가 반복되다 보면 습작생들은 자본 논리에 순응하고 맙니다. ‘잘 팔리는 것들’을 억지로 짜내기 시작합니다. 물론 상업성과 문학성이 완전히 분리된 특성은 아닙니다만 둘 간의 교집합이 좁다는 사실은 이미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된 바 있습니다. 등단제도는 이 완충지대를 넓히는 역할을 맡습니다. 문학성을 보호하면서, 상업성도 중시합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문예지는 등단(예선)을 통해 최소한의 수준을 검증하고 출판(본선)을 통해 대중 앞에 설 무대를 제공합니다.
등단제도는 이처럼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안고 있습니다. 존폐에 대한 논의 역시 양가적 특성을 고려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등단제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독립 문예지, 더 나은 질서를 위해
본론으로 돌아와서, 폐쇄적인 문단구조과 중앙문단의 권력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나가면서 언급하긴 했지만, 독립 문예지 시장의 확대가 적절한 대안이 될 것 같습니다. 독립 문예지는 엘리트 중심의 구시대적인 문단구조를 거스르는 움직임입니다. 젊어서 착취당하고 나이 들어서 보상받는 수직적 메커니즘을 내려놓고, 넓고 다양하게 흩어지자는 움직임이죠. 한마디로 취향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 소소하게 문학을 즐기자는 겁니다. 한편, 문단구조의 해체는 곧 등단제도의 폐지를 의미합니다. 등단제도의 장점이 무색해지게 되는 겁니다. 다만 이것이 정말 문제인지는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문학의 수준이 낮아질 순 있어도, 요즘엔 인터넷이 발달해 알아서 좋은 작품을 찾아볼 테니 독자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마어마한 수의 독립 문예지들이 기성 문예지를 대체해 중간지대 역을 맡는다면, 기회의 장은 보다 넓어질 겁니다.
이상적인 대체제 같습니다. 하지만 독립 문예지는 아직 ‘출판 자본’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출판사는 돈이 안 되면 보통 출판을 하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출판사를 옮겨다니다 공중분해된 독립 문예지의 사례는 이제 흔하죠. 수요가 없으면 도태되는 자본 논리가 문학의 영역마저 갉아먹는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건 독자입니다. 문학이 가치없는 분야로 여겨지고, 문학과 관련된 담론이 줄어들수록 신인 작가들은 딛고 설 땅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말할 때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도 풀어질 거라 믿습니다. 어느 문예지에서 따온 토막글로 마칩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주변의 상황들은 독립 문예지를 창간하고 운영하는 데에 좋은 조건이 아니다. 문학적 진정성이라는 수사학은 난무하지만 자신의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하고 행동하는 독립 문예지의 돈키호테들이 별로 없다. 비판적 독립 문예지의 부재는 역으로 현존 문예지의 위기를 해결 불가능한 난제로 만든다. 메이저 문예지는 대마불사라는 관성의 법칙에 의존해 계속 발간될 것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문학 독자들은 멸종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대안을 제시하는 독립 문예지를 애타게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다.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독립 문예지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려야 한다.”
- 육선민. 신인작가의 생존투쟁. (2020). 리터러시연구, 11(4), 469-494.
- 조재영. 신춘문예 제도의 명칭과 기원에 관한 연구. (2016). 한국시학연구(47), 345-370
- 이청. 등단 시스템의 변화와 복수 등단의 의미. (2018). 로컬리티 인문학(19), 261-286
- 정연수. 문단 권력의 해체와 지역문단의 지평 확장. (2007). 문예운동, 49-55
- 최강민. 독립 문예지의 의미와 가능성. (2010). 오늘의 문예비평, 4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