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기억의 아름다움
향수를 그리는 피터 도이그

사진이 포착할 수 없는
기억의 편린을 담은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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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될 때처럼 현재를 또렷이 감각하는 순간들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다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기억은 쉽게 파편화되고, 왜곡되기 마련이죠. 완전한 형태를 보전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당시 용솟음치던 감정과 표현될 수 없는 느낌을 담아낼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기억의 편린을 그림으로 구현해내는 현대 미술의 거장, 피터 도이그(Peter Doig)의 작품을 통해 살펴봅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의 탄생

피터 도이그, “그란데 리비에르”, 2001-2002
이미지 출처: 피터 도이그, “그란데 리비에르”, 2001-2002

구상회화의 대표격인 피터 도이그는 문학 기법에서 차용한 마술적 사실주의와 구상적 표현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카리브해에 위치한 트리니다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도시와 계곡을 탐험하고 영화에 몰입하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을 마주합니다. 바로 이때의 추억, 경험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될 그림들로 탄생합니다.

피터 도이그, "화이트 크립", 1995-1996
이미지 출처: 피터 도이그, “화이트 크립”, 1995-1996
피터 도이그, "카누 레이크", 1997
이미지 출처: 피터 도이그, “카누 레이크”, 1997

대표적으로 작가가 캐나다에 거주하던 시절 산 봉우리 위로 올라가 스키를 타던 때를 회상하며 작업한 “White Creep(1995-6)”은 눈 덮인 험준한 산과 검은색 바위가 어우러져 현장감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또, 숀 S. 커닝햄의 영화 <13일의 금요일>(1980) 한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카누 위 여성을 그린 작품 “Canoe-Lake(1997)”은 어딘가 불안한 늦여름 공기를 담고 있지요. 이처럼 도이그의 작품은 경험을 기반하고 있는데, 또 다른 대표작인 “Pelican(2003)”은 트리니다드 북부 해안의 바다에서 수영하던 중 마주한 한 남자가 펠리컨의 목을 비틀고 있는 장면에서 충격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캔버스 위 뒤섞인 물감은 다른 차원의 일상이 현실에 침투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부여하죠.

피터 도이그, “펠리컨”, 2003
이미지 출처: 피터 도이그, “펠리컨”, 2003

도이그는 오직 회화라는 수단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장면을 작품에 담아, 자신은 물론 보는 이로 하여금 순간을 떠올리게 하고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입니다. 미술사가 베른하르드 쉬벤크(Bernhard Schwenk)가 말한 “관객은 (도이그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이 된다”는 이야기처럼 물리적 경험과 감정적 회상을 결합한 도이그만의 왜곡은 생동하는 순간을 구현해냅니다.


규범을 전복시킨 천재 작가

피터 도이그, "콘크리트 캐빈", 1994
이미지 출처: 피터 도이그, “콘크리트 캐빈”, 1994

위대한 화가들이 으레 그렇듯, 도이그 역시 작업을 시작한 초반에는 누구에게도 격려받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도이그의 졸업 전시회에 걸린 작품이 개당 1,340달러(최근 도이그의 작품은 3,500만 달러에 낙찰됨)로 책정되지만 아무도 눈독 들이지 않았죠. 주류 매체와 평론가들은 앞다퉈 도이그의 작업이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업계의 오랜 회의에도 불구하고 도이그는 부모님 집의 헛간에서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리며 작업을 이어갔고, 오랜 기다림 끝에 1992년 또 다른 예술가 가레스 존스(Gareth Jones)의 리뷰를 통해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피터 도이그, "밀키 웨이", 1989-1990
이미지 출처: 피터 도이그, “밀키 웨이”, 1989-1990

1994년 Turner Prize의 최종 후보에 오르지만 기득권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2000년 아트포럼은 ‘그가 그린 소란스러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고 평가했고, 같은 시기 벨기에의 수집가는 ‘당신의 그림을 사야하는 이유를 알려주세요’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비록 기득권에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도이그는 자신의 독특한 기법과 화풍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온 도이그의 고집은 몇 년 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현재 그의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작품 중 하나로 등극합니다.


한계를 규정짓지 않는 습관

피터 도이그, "핑퐁", 2006-2008
이미지 출처: 피터 도이그, “핑퐁”, 2006-2008
피터 도이그, "라페이루즈 월", 2004
이미지 출처: 피터 도이그, “라페이루즈 월”, 2004

2000년대 중반부쯤 도이그의 스타일의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의 대표작 “Ski Jacket(1994)”에서 탈피하기 위해 택한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주력으로 작업해왔던 풍경화만을 그리지 않겠다는 담대한 선언이기도 하지요. 자신의 스타일을 한 카테고리로 규정짓지 않고, 스타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는 도이그. 현실에 대한 추상적 왜곡을 보여주는 “Ping Pong(2006-8)”과 추상화와 구상적 표현 사이의 균형이 돋보이는 “Lapeyrouse wall(2004)” 등 꾸준히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입니다.

디올의 20021 F/W컬렉션 티셔츠
이미지 출처: 디올
디올의 20021 F/W컬렉션 티셔츠
이미지 출처: 디올

최근에는 디올(Dior)의 2021 F/W 컬렉션에 참여하며 작업의 스펙트럼을 넓혔습니다. 도이그는 촘촘한 자수, 자카드 직물, 폭신한 니트 등 다양한 소재에 페인트를 입힐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과 3차원 그림이 의복이라는 현실에 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콜라보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상업성 및 대중과의 접점에 대해서는 ‘돈이 있어도 미술품을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샵에서 재킷은 살 수 있다’고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재킷이 디올이라는 점이겠지만요.


눈을 감고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와 공기, 기분이 뒤섞는 것처럼 어떤 사진으로도 구현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죠. 도이그는 ‘그림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이게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 속에만 부유하던 영상들을 하나씩 그림으로 꺼내 볼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요. 도이그의 그림을 통해 기억의 씁쓸한 쇠퇴과 황홀한 잔상까지 바로 보았다면 언젠가 떠나 보낸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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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예진

비틀리고 왜곡된 것들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글로써 온기를 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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