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허스트는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박고 동물의 사체를 클로포름에 넣고 종으로 횡으로 잘라 전시한다. 조엘 피터 위트킨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의 일부를 마치 정물처럼 배치한다. 분명 우리는 이런 작품을 보면 거부감을 느낀다. 작품의 재료를 듣게 되면 불쾌함과 같은 부정적인 반응이 튀어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거부감과 동시에 작품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어떤 사유의 매력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또한 분명히 이런 작품들은 우리를 압도하는 어떠한 힘이 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작품들을 관람할까? 추하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대상이지 않을까? 미는 절대적인 존재이고 숭고하며 찬양해야 하는 것이고, 추는 불쾌함을 불러일으킨다는 맥락에서 지양해야 하는 것일까?
추와 미?
일반적으로 추는 미에 대립하는 개념 또는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선과 악처럼 따로따로 분리된 개념으로 말이다. 하지만 추와 미는 ‘서로’ 또는 ‘다른 개념들’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또한 추는 미의 개념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상대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추와 미’는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람의 ‘인지적 반응’ 혹은 ‘어떤 대상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간단하게 우리가 ‘미’와 ‘추’를 어떻게 여기는지 알고 싶다면, 동의어를 살펴보면 된다. ‘아름다운’과 비슷하게 쓰이는 말은 예쁜, 귀여운, 기분 좋은, 매력적인, 상냥한, 사랑스러운, 황홀한, 조화로운, 섬세한, 우아한, 훌륭한, 웅장한, 멋진, 경이로운, 화려한, 최고의 등이 있다. 반면에 ‘추한’과 비슷한 느낌의 말은 불쾌한, 끔찍한, 소름 끼치는, 역겨운, 비위에 거슬리는, 그로테스크한, 혐오스러운, 징그러운, 기분 나쁜, 볼품없는, 싫은, 일그러진 등이다. 평범한 필자의 감수성으로 판단한다면, ‘아름다운’의 모든 동의어들은 비교적 평온한 평가의 반응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추한’의 동의어들 거의 모두는 격렬한 거부감이나, 공포, 두려움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떤 혐오감의 반응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미와 추는 절대적이지 않다. 문화권과 역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같은 대상을 볼지라도 계속해서 변화한다.
추는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최근에 있던 한 과학 연구에서 실험 대상들에게 그림들을 보여 주고 각 그림에 대해 ‘아름답다’,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추하다’는 평가를 요구했다. 그리고 실험 대상 머리에는 자기공명영상 장치를 부착하였다. 이 자기공명영상 결과에 따르면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예술품은 두뇌의 사랑과 관련이 있는 감정적 부분을 활성화했고, ‘추한’ 그림은 도주와 관련 있는 운동 피질을 활성화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대칭적인 것들을 선호해 왔고, 그 결과 비대칭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감염, 질병, 잘못된 배우자 선택 등의 결과라고 간주해왔다.
‘추’라는 의미의 ugly라는 낱말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이라는 의미를 가졌던 고대 북구어 uggligr에서 유래되었고, 중세 영어에서도 ‘무시무시한’ 혹은 ‘혐오스러운’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고대 서양에서 이상하게 생긴 개체들은 그 종의 생존을 위협할 뿐 아니라, 그 종 전체에 대한 신의 저주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개체들이 보이게 되면 ‘사회 질서의 타락’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그 결과에 대해 두려워했다. 고대 사람들은 과거 문명의 무시무시한 야수들은 인간뿐 아니라 신도 잡아먹었고, 이들이 기형적인 육체 안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도덕과 관습을 무시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화 속의 인물이나 동물 따위를 가리켰던 트릭스터 모티프(Trickster motif)에서도 나타난다.
아주 오래전 ‘기형’과 ‘추함’은 흔히 동의어로 사용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형아들을 키우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안한 적이 있고, 심지어 스파르타 부모들은 법에 따라 기형아들을 버리도록 강제되었다. 일반적인 미적 혹은 법적 기록들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못생긴 인간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추방하였으며, 로마인들의 경우 그 정도가 덜하기는 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일 신이 분노한 결과 어떤 불행이, 그 불행이 기근이건, 질병이건, 혹은 다른 어떤 재난이건 간에, 어떤 도시에 닥친다면, 사람들은 가장 추한 사람을 끄집어내어 (이들을 때리거나 불에 태우거나 하여) 희생시켜, 고통을 겪고 있는 도시의 속죄양으로 삼았다.
_ 2세기 비잔틴 학자 요하네스 체체스가 쓴 고대 속죄양 파르마코스에 대한 글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대상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눈에 보이는 경계가 있었는데, 때로는 기형적인 인간들을 두려움의 대상에 포함시켜 악한 존재로 만든 다음, 액막이 웃음을 통해 악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1802년 백신을 맞은 아이들이 소의 모습으로 변한 것을 보여 주는 만화가 있다. 이렇게 추한 개인들은 인간의 집단 상상력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아 왔다. 침팬지 인간이나 소가 된 아이들의 경우는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뻔해 보이지만, 몇몇 인간-동물이 혼합된 모습의 종은 역사의 여러 순간에서 변화하고 있는 문화적 두려움을 보여주면서 ‘추하다’는 평판을 얻어 왔다. 이는 아주 옛날부터 인간과 동물 사이 경계의 불분명함에 대한 대중들의 불안이 다양하게 표출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중세·르네상스 시대에 석관 위에 조각했던 사체상 트랑시(transi)는 썩어가는 시신을 보여주며, 이 땅에 사는 허영심 가득한 존재들의 종국적 결과를 상기 시켜 주고 있다. 죽음을 소재로 한 예술 바니타스(Vanitas) 중 하나를 보자면 인간의 머리를 둘로 갈라놓고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상기 시켜 주고 있다. 추한 형태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두려움을 보여준다.
추에 대한 우리의 흔한 반응은 시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두려움에 뒷걸음치기’도 하고, ‘역겨워 외면하기’도 하며, 눈을 손으로 덮고, 심지어 눈을 ‘파내는’ 경우도 있다. 아담과 이브가 원죄로 인해 벗은 서로의 몸을 보고 이것을 가렸던 것처럼, 추한 광경을 회피하는 것은 비유와 상징이 됐다. 이런 회피는 문화적으로 추한 광경에 대해 낙인을 찍고, 금지하고, 낯섦을 강화했다. 몇몇 추한 특징들은 감추어지거나 겉모습이 다시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응시하게 만들고 반응을 요구하기도 한다.
추와 미는 문화적 상대성에 따라 변화한다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 대한 반응은 유동적이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이라는 에세이에서 한 문화에서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이 다른 문화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지적했다.
단적인 예로 관습적 미의 영역인 유행을 살펴볼 수 있다. 유행은 미적 이념의 시각에서 판단해보면 단지 추하다고 명명할 수 있는 현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유행은 시대에 따라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된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이제 막 쇠퇴한 유행을 보면 우리는 추하다(촌스럽다는 것과 같은 부정적 반응)는 낙인을 찍는다. 이는 유행하는 대상이 절대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 정신 아래에서 자신의 독특함이 적절하게 표현됐고 그 형태에 익숙해졌다고 믿기때문이다. 시대정신이 유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는 것은 자신의 분위기가 적절하게 표현되었냐는 점이다.
종교화에서도 문화적 차이에서의 추와 미를 살펴볼 수 있다. 아프리카 문화권이 아닌 사람의 눈에 아프리카의 제의용 가면은 섬뜩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지역 주민들에게는 그 가면이 자비로운 신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거꾸로,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채찍을 맞고 피를 흘리며 모욕당하는 이미지는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반면에 명백한 신체적 추로 보이는 이것이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공감과 감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추와 미의 속성은 종종 미학적 기준이 아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기준에서 기인한다
오를랑은 프랑스의 ‘육체 예술가(carnal artist)’로서 퍼포먼스와 신체 예술 작업을 한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추해지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아무리 성형을 해봐야 그리스의 완전한 아름다움의 이상에 절대 도달하지 못할 추한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를랑은 몇십 년에 걸쳐 여러 작업을 해왔지만, 추와 관련해서 <성 오를랑의 환생 The Reincarnation of Saint Orlan>를 주목하고 싶다. 1990년대 초반 오를랑은 이 프로젝트에서, 여러 번 성형수술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뜯어 고치는데, 그 모델은 유명한 서양 미술 작품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성들의 얼굴이었다. 예를 들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비너스의 턱, 퐁텐블로파의 <사냥꾼 다이아나>에서 다이아나의 코, 제라르의 <에로스와 프시케>에서 프시케의 눈, 부셰의 <에우로페의 납치>에서 에우로페의 입, <모나리자>의 이마 등이다. 물론 오를랑은 이들과 닮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이들의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의 육체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 했다. 각 문화권과 시대에서 아름답다고 칭해지던 육체적 형상을 조합해 그녀는 미의 기준에 의문을 던진다. “처음부터 내 작품은 신체에 가해지는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압력들에 대한 질문이다.” “신체를 작업하기, 그리고 내 몸 위에서 작업하기, 그것은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함께 나열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육체와 아름다움은 사회적으로 구축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절대 불멸의 정의와 같은 아름다움은 없다는 메시지를 뜻한다.
1996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 전시된 나이지리아 태생의 영국 화가 크리스 오필리의 <성모 마리아 The Holy Virgin Mary>는 코끼리 배설물과 포르노 잡지에서 오려낸 여성 성기 사진들을 재료로 이용했다는 이유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 뉴욕 시장이었던 루디 줄리아니는 이 작품에 대해 ‘역겹다’고 했고, 미술관 기금을 삭제하겠다고 위협했다. 미술 평론가들은 소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코끼리와 같은 후피 동물과 그들의 배설물은 아프리카에서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고, 전통 종교화에서도 푸토와 같이 벌거벗은 상도 있었다는 등의 설명을 늘어놓았다. 정작 예술가 자신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작품을 변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 그림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해석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나의 해석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오필리의 작품은 지금 여기의 ‘추함’이란 결국 그것을 해석하는 문화권의 산물임을 다시 한번 상기 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성모 마리아>는 다양한 범주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백인/흑인, 서구/아프리카, 문명/원시, 숭배/모욕, 아름다움/추함 등의 범주를 말이다.
이처럼 ‘추’는 한 문화에서조차 다양한 특징을 가리키며, 사회적 가치 그리고 미적 가치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추한 것’이라는 꼬리표는 그들의 문화가 ‘추하다’는 의미를 규정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며, 동시에 추함의 꼬리표를 붙이는 순간, 어떤 의미가 배제되는지도 보여준다. 관객들이 추함을 시각적 해석 너머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추의 역사적 의미는 해체되게 된다.
추는 왜 필요할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추라는 개념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문화를 매혹시키는 주제이며, 변화해왔다. 이러한 추는 미학과 교양에 도전해 왔고 논의의 시작이 되기도 하며, 우리의 두려움과 추와 미에 대한 판단 기준에 대해 복잡한 질문들을 던져 왔다.
추는 그저 불쾌하고 두려운 것을 넘어 우리에게 다양한 사유거리를 준다. 중립적인 편안함이 갖는 진부함에 도전하게 만들고, 다양성을 지지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또한 추가 갖는 관계성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주체와 대상 사이를 끊임없이 재설정하고, 우리의 변화하는 지각에 대해 재평가하도록 한다. 주체를 둘러싼 문화적 사회적 울타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 역시 어울리지 않는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며, 우리 자신의 위치와 문화적 사회적 잣대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만든다.
예술은 단순한 미의 추구가 아니라, 생각할 것을 던져주는 사유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기존의 가치들에 도전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논의할 점들을 이끈다는 것에서 추는 예술에서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시각을 통해 느끼는 실재는 사실처럼 보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문화적 지각으로 구성된 것임을 생각하며, 추와 미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되짚어본다면 좋을 것 같다.
- 그리첸 E. 헨더슨, 『더 어글리 : 추(醜)의 문화사』, 도서출판 새터, 2017.
-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 열린책들, 2008.
- 카를 로젠크란츠, 『추의 미학』, 나남,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