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우리는 모두 코로나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문화예술계도 마찬가지다. 각종 사회, 경제적 피해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역시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시스템은 붕괴하고, 정부의 지원만이 간신히 효력을 발휘하는 아찔한 상황에서 기관, 단체, 개인은 모두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특히 전시, 공연 등의 연이은 행사 취소로 인해 수많은 예술인들은 생계유지에 위협을 느꼈고 더는 창작을 이어가지 못했다.
팬데믹과 함께 공존한 1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아직 갈 길이 멀다’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정부 대책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질문들이 그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긴급 예술인 생활·운영 자금은 전체 전업 예술인의 약 76%를 차지하는 프리랜서 예술가들을 제외한 것과 다름없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관람료 지원 등의 소비 촉진 정책 역시 미술관과 공연장이 문을 닫는 ‘셧다운’ 체제 아래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보는 부정적 견해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거버넌스란?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가 제시하는 정책들은 결코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전무후무한 사회적 위기 속에서는 그 유효성에 더욱 의문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이를 보완할 여러 대안이 등장하고 있는 요즘,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개념은 바로 오늘 살펴볼 ‘거버넌스(Governance)’ 다.
‘거버넌스(Governance)’란, ‘거버먼트(Government)’의 변화된 의미로 정부 중심의 공적 조직과 사적 조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타나는 상호 협력적인 조정 양식을 뜻한다. 쉽게 말해 기존의 정부가 해오던 일방적인 통치에서 벗어나 시장(예술인, 예술단체, 기업), 정부(국가), 시민 등 주체들 간의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공동의 참여와 협력을 추구하는 행정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이 예술과 디자인 등 문화적 측면으로 확대된 것을 ‘문화 거버넌스’라 하며 이도 마찬가지로 주체들 간 수평적이고 호혜적인 상호의존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거버넌스가 필요한 이유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문화 거버넌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바로 ‘공공과 민간의 협력’이다. 이를 줄여 ‘민관협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민관협력이란 행정 주체가 전부 담당했던 공적 업무를 행정 주체와 민간이 역할을 분담하여 수행하는 일을 말한다. ‘힘을 합쳐 잘 다스려 나간다’는 뜻의 ‘협치’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처럼 문화 거버넌스는 위기 앞에서 공공기관과 민간이 협력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생태계 조성에 있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거버넌스 체제는 공공기관이 현장의 단체들 혹은 예술가들의 견해를 보다 상세히 파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민간 주체인 기업의 예술후원은 예술인들의 생계와 창작활동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해당 기업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효과를 지니기도 한다.
거버넌스는 위기상황에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수립하기 위해 거버넌스가 해야 할 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와 관련한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추려 아래에 정리해 보았다.
Ⅰ. 명확한 매뉴얼을 수립하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재난 대응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만일 재난이 또 발생한다면 그때는 흔들림 없이 견고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매뉴얼을 구축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요소는 바로 신속성과 유연성이다. 송시경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본부장은 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으로 진행된 좌담회에서 복잡다단한 예비비 집행 절차를 지적한 바 있다. 긴급추경이나 기금운용계획 변경의 경우 빠른 승인이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와 기획재정부, 때에 따라서는 국회의 논의를 모두 거쳐야만 하는 번거로운 상황에 놓여있다. 이러한 문제는 집행과정 간소화와 최종 결정권의 임시 이행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중앙으로 갈수록 의사결정 기간이 길어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긴급상황에서는 특별히 정부가 아닌 다른 거버넌스 주체에게 예산 집행의 최종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더불어, 매뉴얼에는 예술인 생활·창작 지원금의 지급을 위한 명확한 기준과 근거가 포함되어야 한다. ‘명확한 기준’이란 국민 누구나 납득 가능할 정도의 객관적인 기준을 뜻한다. 예술인 지원금은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공적 기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을 수립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여태까지 시행된 많은 정책이 그러했듯 코로나 19를 기점으로 남발된 대부분의 지원 사업들 역시 대체로 명확한 기준 없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공모’ 형식의 지원 사업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 심하게 나타나곤 한다. 예를 들어 현재 공모가 진행 중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청년예술가지원 사업의 심의 기준은 ‘예술 창작 역량(30%)’, ‘사업 계획의 적정성(30%)’, 그리고 ‘발전 가능성(40%)’이다. 서류 한 장만으로 지원자의 역량과 사업의 적정성, 그리고 발전 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지 여부를 떠나 기준 자체가 무척 모호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각 항목 안에 세부적인 평가요소들이 있지만, 이 역시도 심사위원들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커 보인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지금의 정성(定性)적 심의 기준을 정량(定量) 위주로 바꾸거나 피해 규모에 비례해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Ⅱ. 공론장을 마련하여 현장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역별 공론장의 활성화다. 국가 단위 기관과 광역·기초 문화재단 종사자들은 아직도 현장 예술가를 ‘지원사업의 대상’이나 ‘부수적 파트너’ 그 어디 중간쯤에 있는 수동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 또한, 이들은 지역 예총이나 장르·시군별 지회 등 소위 ‘대표성’을 가진 중대형 단체들과의 소통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개인 단위 주체나 기타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통일된 의견수렴을 어렵게 하고 이는 다시 거버넌스 사업 운영에 차질을 초래하기에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협력사업 추진에 앞서 더욱 다양한 층위의 이해관계자들이 포함된 논의의 장, 즉 공론장을 정기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바람직한 공론장은 개인과 단체를 아우르는 것은 물론 창작 예술인뿐만 아니라 지역활동가, 문화예술교육자 등 지역 예술생태계와 관련된 모든 인사들의 목소리를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소통 창구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는 바로 ‘전문가’다. 전문가는 사안에 대한 충분한 제반 지식과 경험을 지닌 인물로 공론장에서의 논의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취합된 의견들을 해독하는 임무를 맡는다. 단순히 많은 의견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유의미한 결과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문가적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는 결정력과 논리성은 물론 지역 예술계의 현황이나 예술인들의 삶을 더욱 가까이서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노력까지 뒷받침되어야 한다.
Ⅲ. 종합조사, 수요파악, 그리고 맞춤 지원까지
마지막은 관점의 전환을 통한 지원의 확대다. 앞선 두 대안을 통해 관계의 시스템적 구축이 가능해졌다면 그 이후는 수혜자 중심의 세분된 접근을 기반으로 현장의 요구에 부응할 차례다. 지금은 보편적이고 일괄적인 지원 대신 주체별 상황에 맞는 ‘맞춤형’ 지원이 필요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여러 공공기관과 민간 차원에서 더욱 광범위한 수요조사를 시행하여 현장의 니즈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피해 규모 및 대처방안 관련 인터뷰나 설문조사에 사용되는 표본의 규모는 매우 한정적이며, 이로 인해 조사 결과의 유효성을 두고 현장의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거버넌스에 있어 민간 주체들이 공공기관을 신뢰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위협은 없다. 따라서 지금보다는 더욱 다양한 조사대상을 포함하는 종합적 차원의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겠다.
조사가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그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거나 기존의 정책을 보완해야 한다. 이 단계의 핵심은 특정 안건에 대해 존재하는 여러 주체의 시각을 통해 해당 사안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창작준비금’을 둘러싸고 기관은 전시나 공연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삼지만 예술가는 창작의 과정까지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 코로나 상황임을 살펴 전자 위주였던 기존 보조금 지원 방식에서 후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여기에 시민들에게 지원금 활용의 모든 프로세스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해준다면 상호호혜 극대화를 통한 지원의 확대를 이룰 수 있고 나아가서는 예술 가치에 대한 인식 역시 더욱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
함께 만드는 거버넌스의 미래
지금까지 코로나가 초래한 문화예술계의 위기를 시작으로 거버넌스와 문화 거버넌스의 개념, 그리고 지속가능한 예술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거버넌스의 역할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위의 내용과는 별개로 거버넌스라는 이름 아래 잠재해 있는 가능성은 무수히 많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실현을 위해서는 거버넌스 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더불어 민간과 기관 간의 꾸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위드 코로나’, 즉 코로나19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예측이 현실이 된 지금, 문화예술의 회복과 발전을 위해서는 기관의 공정성과 민간의 자율성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거버넌스에 개입되어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