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바타2>가 국내에서는 1,000만 명을 넘어서는 흥행을 이어가고 있으며,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6억 2,350만 달러를 벌어들여 ‘어벤져스’(6억 2,340만 달러)를 제치고 역대 북미 흥행 랭킹 10위(2023년 2월 1일 기준)에 올랐다고 한다. 무려 13년 만에 찾아온 시리즈의 후속편이지만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파란색 스펙타클은 전 세계 관객을 사로잡았다.
영화를 향한 관심에 비하여 아바타 시리즈에 대한 논의들은 대부분 천문학적인 제작비와 이를 보답하듯 갱신되는 전 세계적인 흥행성적, 그래픽 구현과 촬영기법 등의 기술력에서 머문다. 혹은 영화 중간중간 묘사되는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의 환기 차원에서 맴돌며 영화를 둘러싼 보다 복잡한 함의를 놓치고 있다. 이 아티클을 통해 기술력과 단편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머무는 것을 확장 시켜 시각적 황홀경 너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낯선 외계행성에서 느껴지는 기시감
<아바타>는 에너지 고갈 문제로 살기 어려워진 지구를 떠나 외계행성인 판도라에서 대체 자원을 채굴하려는 인류를 그린다. 판도라를 개척하는데 앞장서는 RDA 회사가 연구진과 용병들을 행성에서 근무하게 하고 행성 내 매장되어 있는 ‘언옵타늄’이라는 자원을 채굴하려 나선다. 그러나 독성을 지닌 대기로 자원 채굴에 난항을 겪게 되고, 토착민인 나비족과의 외교적 해결을 위해 인간의 의식으로 원격조종이 가능한 나비족 ‘아바타’를 만든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외계인이 지구를 점령하기 위해 인간과 유사한 ‘인간-아바타’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인류는 과거 수차례의 전쟁과 학살로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하고 이 역사의 과오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왔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등장인물들은 선조의 수순을 밟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자비하게 바로 침공하기 보단 학교를 만들어 나비족에게 영어를 가르치거나 판도라 행성의 연구를 위해 연구자를 파견하여 교류하는 등 자신의 선조들과는 다른 길을 개척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 기저에 있는 서구 제국주의적 세계관으로 결국 나비족을 학살하고 그들의 생태계를 파괴하게 된다.
<아바타2>는 판도라 행성에서 인간들이 철수한 이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의 세계관에서 지구는 자원의 고갈과 극심한 환경오염으로 더욱 인간이 살기 어려워진다. 인류는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지구를 벗어나기 위해 대규모 이주 작전을 펼치고자 판도라 행성을 재침공한다. 그리고 지구의 고래와 비슷한 ‘툴쿤’ 뇌 속에서 인간의 노화를 늦추는 ‘암리타’를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는 모습도 보인다. 은하계를 가로질러 야욕을 펼치는 인류의 욕망은 근대적 식민주의자,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우리는 과거로부터 오는 기시감에만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우리는 아바타 시리즈를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식민주의의 새로운 표본을 보여주는 영화로 주목해야 한다.
본격적인 논의 전 미래에서 온 화자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무시한 인류의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가상의 역사를 기반으로 이야기하는 나오미 오레스케스와 에릭 M.콘웨이의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처럼 이들이 그리는 지구 역시 자원 고갈, 기온 폭등, 해수면 상승, 가뭄 등 위기에 처한 모습을 보여준다. 책에서 주요하게 이야기하는 논점은 시스템을 움직이는 주요 동인은 사회적 요소인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되지 않았던 현시대의 모순을 다룬다. 예를 들면 대기에 온실가스가 축적되면서 기후변화가 일어난다는 주장에서 과학자들은 삼림 파괴와 화석연료 연소 등 인간의 활동 때문에 온실가스가 축적된다는 사실을 인지했지만, 원인이 사람에 있다든가 우리의 대량 소비 패턴이 문제라든가 하는 근본적인 동인이 논의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한다.
영화에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주변 행성을 약탈하는 것에서 해결책을 도모하는 인류가 그려진다. 이전에 기고한 “기술은 우리를 구원하는가”에서도 다루었듯 자본주의의 세계화 아래 주변부의 약탈이 중심부의 환경 보호를 위해 자행되고 있다. 중심부에만 유리한 방식으로 주변부 국가들을 약탈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모두 전가하고 있는 생태제국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저자가 직시했듯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지구 구석구석까지 미치며 새로운 수탈의 대상인 ‘미개척지’가 소멸해버렸다. 인류는 지금껏 작동해온 이윤 획득의 시스템이 한계에 도달했고 영화에서처럼 언젠가는 우주로 나아갈 것이다. <아바타>는 과거가 아닌 현재와 도래할 미래에 대한 영화이다.
안온한 문화적 도용인가
영화적 은유인가
아바타 시리즈에서는 앞서 논의했듯 낯선 외계행성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실제로 인터뷰에서 아메리칸 원주민 라코타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했던 만큼 영화는 유럽의 아메리카 이주 및 식민화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도 미국 정부가 지정한 척박한 보호구역에 강제 이주당한 비극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현재까지도 빈곤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교육과 취업의 어려움을 느끼는 식민주의의 상흔을 가진 이들에게 <아바타>를 감상하는 일반 관객과는 다른 입장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메리칸 원주민 후예들의 불매운동은 영화의 안과 밖에서 세심히 논의될 필요가 있다. 원주민 후예들은 19세기 자행된 원주민 학살, 원주민들의 사상과 문화를 많이 차용했음에도 원주민 배우 캐스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리고 나바호족 출신 활동가 유에 버게이는 그의 트위터에서 “<아바타2>는 ‘백인 구원자 콤플렉스’를 만족시키는 영화”라고 주장하며 불매운동을 촉구했다. 백인 주인공이 원주민 사회 속에 녹아들어 그들을 구원하고 위기를 해결해주는 전형적인 백인우월주의 영화라는 비판이다. 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의 선례가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작품성과 별개로 실존 인물인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간 존재하지 않았던 로맨스를 통해 고통의 역사를 낭만적으로 소비하며 백인들의 만행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사실 나비족은 외계행성의 종족이라기에는 원주민들의 주거, 복식, 장신구 등의 문화가 다수 차용되었고 그들의 행동양식이나 사상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띤다. 반면 외형의 모습은 인류의 피부색에서는 나올 수 없는 파란 피부와 인간 평균 신장의 2-3배를 뛰어넘는 큰 신체이다. 이렇듯 더욱 타자화시킨 나비족과 그들의 삶의 터전인 판도라 행성을 신비로운 판타지로 소비하게 하는데, 이는 마치 항해사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여 마주했던 광경을 관객에게 느끼게 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1) 외계행성의 종족이라기엔 다소 상상력의 부재가 느껴지고 기시감이 버무러진 판타지는 어딘가 불편함이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논의하였듯 영화 아바타가 식민 지배를 위시한 인류 역사의 어두운 부분 고찰하며 논의를 확장시킨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제이크 설리는 단순히 ‘백인 구원자 코스프레’를 하는 ‘하늘 사람들’과 다르다.
1) <아바타>에 나타나는 ‘타자’로서의 자연과 동물들을 서구 제국주의의 ‘타자(the Other)’와는 구분되는 탈식민주의적 ‘타자’라는 연구가 있다. 「영화 <아바타>에 나타난 혼성성 연구」 이 연구에서는 나비족은 상대와의 완전한 교감의 표시로 “나는 당신을 봅니다(I see you)”라고 말하는 부분을 타자를 시각적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내적 본질을 알게 되었음을 뜻하며 제국주의적 열등한 개념의 ‘타자’와는 다른 소통하는 변증법적 긴장관계의 타자라 주장한다. 필자 역시 영화에서 새로운 타자성을 부여하는 것을 동의하나 3,4,5의 시리즈를 통해 세계관을 더 들여다 본 후 판단하고자 한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
<아바타2>는 전형적인 미국 가족영화의 코드를 그대로 답습하며 영화를 전개해 가는데, 전작에 비해 다소 단조로운 플롯으로 서사적인 측면에서 빈약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제이크의 리더쉽에 대한 비판 역시 존재하는데, 인간들이 재침공해 올 것을 감안하여 전략적으로 준비해놓지 않았음에 그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제이크의 이러한 면모가 나비족 제이크 설리로서 자연스러운 행동이며 이 영화의 개연성이라 생각한다.
<아바타> 초반 제이크에게 회사의 직원이 임무를 전하며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출발하자”고 말한다. 하반신 불구가 된 제이크에게 ‘아바타’를 통해 신체적 자유를 제공한다는 의미와 판도라에서의 임무를 통해 지구에서 두 다리로 다시 걸을 수 있는 삶을 선사해주겠다는 모종의 거래가 내포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제이크는 판도라 행성에 발을 내딛은 어느 누구보다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고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그는 단순히 나비족 사회에 녹아들어 그들을 구원하는 영웅자 코스프레하는 백인에 그치지 않고 나비족으로서 새롭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이제 지구에서 온 ‘하늘 사람들’과 다르다.
우선 제이크는 여전히 판도라의 자원에 희소성을 부여하여 독점하지 않았다. 나비족을 위해서든 사적 이익을 위해서든 그들 자연을 독점하여 자신의 이익에 맞게 변형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더 주목해볼 만한 지점은 <아바타>에서 인간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기술력과 이 기술력을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이 남겨두었음에도 일부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선에서만 활용했다는 점이다. 제이크의 이러한 행동은 <아바타2>에서도 그려진다. 판도라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운 토루크 막토를 평화가 찾아왔을 때 떠나보낸다. 부의 축적, 기술의 발전, 군사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하늘 사람들’이라면 불가능했을 선택이다.
제이크는 사랑하는 네이트리와 자식을 낳고 여전히 부족사회를 이끌며 전통에 기초한 사냥, 채집생활을 이어간다. 나비족 제이크의 수렵생활은 지구에서 살던 인간 제이크에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마트에서 손질된 고기와 생선을 구입하면 되기에 그것들을 먹기 위해 사냥하고 손질하는 능력이 퇴화되었다. 상품의 힘을 매개 삼지 않으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잃어버린 보통의 인간이었던 제이크가 자연과 교감하며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야 하는 생명만 거두는 삶으로 전환한 모습은 경이로운 지점이다.
자녀들에게 언어를 제외한 인간의 학문을 교육하지 않지 않는 제이크의 모습 역시 눈에 띈다. 제이크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가족애, 사냥하는 법, 전사로 살아남는 법 등에 대해 교육하지만 자신이 지구에서 배웠던 문화, 교육, 사상 등을 교육시키지 않는다. 판도라에 사는 나비족들에게 인간의 학문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제이크는 깨달았다. 이러한 장면들은 전편에서 나비족과의 교류를 위해 학교도 지어주고 영어도 알려주었던 인간들의 행동이 얼마나 무의미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항대립 구도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영화의 주제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보여졌던 제이크의 변화는 단순히 인간과 나비족간의 비교 대조를 통해 자연친화적인 삶, 원시적 문화로의 이행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인간 중심의, 기술 중심의, 진보사관에서 벗어난 본질적인 사유체계의 전환을 이야기하며, 지금까지의 성장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촉구한다.
영화의 제목이 왜 ‘아바타’인지 상기해보자. 제목이 ‘미지의 행성 – 판도라’, ‘나비족’ 등의 미지의 영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인류의 욕망이 투영되고 기술력이 투입된 ‘아바타’라는 점은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을 암시한다. 아바타 시리즈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바타 시리즈를 두고 ‘영화관의 존재 이유’, ‘영화의 미래’를 논하는 것도 좋지만, 이 영화가 우리의 사유체계에 어떠한 균열을 가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한다. 각성한 제이크의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 <아바타2>에 이어 선보일 시리즈들에서 제이크가 인류와 어떻게 다른 행보를 보여줄지 기대해 본다.
- 나오미 오레스케스, 에릭 M.콘웨이,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 홍한별 옮김(서울: 갈라파고스, 2015)
-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美 원주민 단체들 아바타 불매운동…“인종차별적 영화” 비판’(2023년 2월 4일 접속)
- 사이토 고헤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김영현 옮김(경기: 다다서재, 2021)
- 한우, 「영화 <아바타<Avatar)>에 나타난 혼성성 연구」, 『콘텐츠 문화』 Vol.4,(문화예술콘텐츠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