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혜성처럼 등장해 세상을 들썩였던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 ‘챗GPT(ChatGPT)’의 성장 추이가 심상치 않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챗GPT에 대해 “1980년대 이후 가장 혁신적인 기술 발전”이라고 말했다. 마치 2010년대 초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을 때와 유사한 파급력이 느껴진다. 공식 행사에서 챗GPT가 작문한 개회사를 읊고, 사과문을 작성할 때마저 챗GPT를 활용하는 것이 놀랍지도 않은 시대가 왔다. 무서우리만큼 자연스러운 이 인공지능 챗봇은 어쩌면 이미 필자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방대한 양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글을 써 내려가는 인공지능 챗봇, 이 정도의 기세라면 머지않아 작가와 에디터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30시간 만에 책 한 권을 써낸 AI
얼마 전, 한 신간 도서가 출간 하루 만에 8천여부의 재고를 모두 판매하며 품절을 선언했다. 챗GPT가 집필하고 네이버 파파고가 번역한 책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의 이야기다. 한 권의 책이 출간되기까지 통상 소요되는 시간은 1년여 남짓, 그러나 이 책은 집필 시작부터 독자에게 책이 전달되기까지 단 7일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인쇄 기간 3일을 제외하면 단 3일 만에 집필과 번역, 교정·교열이 모두 이뤄진 셈이다. 물론 책의 기획과 목차가 완성된 상황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챗GPT의 원고 생성 능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추상적인 주제였음에도 45가지 방법에 대한 설명을 순식간에 써 내려갔고, 원고가 중복되거나 흐름에 어긋나는 부분도 드물었다.
챗GPT는 미국의 스타트업 오픈 에이아이(Open AI)가 개발한 인공지능 챗봇으로, 대규모 인공지능 모델인 GPT-3.5 언어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챗GPT가 저자명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책이 출간되었으니, 허무하게도 본 아티클 제목에 대한 대답은 ‘No’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시작으로 챗GPT가 쓴 수 권의 책이 출간되었으며, 카피라이팅이나 작사 같은 단문 창작 분야에서도 뛰어난 협업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물론 아직 작문 흐름이 어색하거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제 마음대로 조합하여 출력하는 허언증 같은 면모도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가 해결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잠들지 않는 챗GPT가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 분포된 사용자들에게 언어를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인공지능 챗봇이 인간을 뛰어넘는 작가로 인식되기는 어려우리라 감히 단언한다.
글 너머의 사람을 인식하는 인간
기술이 인간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지겨우리만큼 오래 지속되어 왔다. 실제로 수많은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꿰찼고, 그러한 현상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물리적인 속도나 정확성뿐만 아니라 창의력마저 갖춰가고 있으니 인간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는 말도 쉽사리 뱉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넘어선다’의 기준이 무엇일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정보, 적확한 어휘, 유려한 문장, 완벽한 문법 따위가 아닌가? 물론 흔히 말하는 좋은 글을 구성할 때 이 요소들이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은 맞지만, 인간은 이러한 이유만으로 글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글 너머에 있는 사람, 즉 작가의 존재를 인식한다.
우연히 접한 글이 너무 좋거나 싫을 때 이 글을 누가 썼는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고유의 문체를 알아채고 이에 대한 선호를 드러내는 일도 많으며, 작가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경우 글을 읽을 때 그 소리로 읽히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글은 항상 사람을 데려온다. 악플이 상처가 되는 이유도 글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악플을 쓴 주체가 인공지능이었다면 그만큼의 타격감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적어낸 글에는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각자의 인격이 담겨있다. 그 사람이 겪은 경험, 그 사람이어서 하는 생각, 그 사람이기 때문에 쓰는 표현이 뾰족하게 묻어난다. 방대한 데이터를 가공하여 일반적인 언어를 만들어내는 인공지능 챗봇이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라면, 인간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정보 취득의 목적이 아니라면, 인간은 인간이 쓴 글에 반응하고 이끌릴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
더욱이 다행인 사실은, 읽고자 하는 사람만큼 쓰고자 하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태초부터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실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언어가 탄생했고, 발화와 동시에 휘발되는 구어를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문자’를 만들어냈다. 활용 범위가 출판물에 국한되어 오랜 기간 지식인들의 전유물에 가까웠던 문자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날개를 단다. 이메일로 시작해 카페, 블로그, 각종 소셜 미디어들까지 무한히 열린 소통의 장 위에서 사람들은 문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사진·영상 매체로 대세가 이동하긴 했지만, 여전히 글을 쓰려는 사람들은 넘치게 존재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근거가 ‘네이버 블로그’와 ‘카카오 브런치’다.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네이버 블로그는 ‘당신의 모든 기록을 담는 공간’이라는 슬로건으로 국내 최대 블로그 플랫폼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22년 기준 3,200만 명이 네이버 블로그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알만하다. 20년 동안이나 사랑받은 플랫폼이지만 골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공간에서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때론 지식과 정보를 나눈다. 누구든 마음껏 원하는 글을 써낼 수 있는 곳이자, 그 기록이 쌓였을 때 자연스레 전문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곳. 그것이 네이버 블로그의 전부였다.
2015년 카카오에서 선보인 ‘브런치’는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이라는 슬로건처럼 글로써 승부를 본다. 별도의 승인 제도를 통과한 유저들만 글을 발행할 수 있고 모두 ‘작가’라는 호칭을 부여받는다. 등단하지 않아도, 책을 출간하지 않아도 작가라는 사명을 가지고 나만의 매거진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게 브런치의 강점이다. 탈락하면 재수를 해야 하는 까다로운 승인 제도가 있음에도 벌써 사용자가 5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진심인지 알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파편과 외부에 있는 정보들을 모아 배열하고,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 엮어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글이라는 수단이 오래도록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이 과정 자체가 인간의 자아와 그가 속한 사회를 다지고 변화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생각을 언어화해서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누군가와 이를 나누고, 공감받고, 논쟁하는 경험의 총체는 꽤 즐겁다. 이 경험을 즐기는 이들이 계속해서 펜대를 놓지 않는다면 쓰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0만 년간 인간만이 독점하고 있었던 ‘언어’를 쓸 줄 아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실로 놀랍고도 두렵다. 챗GPT는 오늘도 전 세계 수억 명의 인구와 대화하면서 각국의 언어를 학습하고 있으며, 기업에서는 어떻게 하면 이를 자사 서비스와 결합할 수 있을지 앞다투어 고민하고 있다. 질문 하나만 던져주면 몇 초 만에 그럴듯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시대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생각의 게으름’이다. 현생 인류는 슬기로운 사람 ‘호모 사피엔스’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사고력의 상실은 곧 인류 존재 가치의 상실을 의미한다. 인간이 여러 번 의심하고 골몰히 생각하며 글로 표현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인공지능이 쓴 글은 사람이 쓴 글보다 매력적이기 어렵지 않을까.
- 2022 네이버 블로그 리포트, 네이버, 2022
- SBS Biz, [오후초대석] 챗GPT가 30시간 만에 쓴 책 나왔다(2023.03.21)
- 뉴시스, 빌 게이츠 “챗GPT, 1980년대 이후 가장 혁신적인 기술 발전”(2023.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