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열망은 ‘내가 나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때’ 불쑥 솟구치는 것 같습니다. 문득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아득해지고, 집단과 사회에서 요구되는 충실한 자아로 사는 것에 익숙해지다 못해 권태가 찾아오죠. 여기, 이 광활한 우주 아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바쁜 일과에 치여 무시하고 살았던 생명 있는 모든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채색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독창적인 숨결을 불어 넣어 주는 작가, 메리 올리버를 소개합니다.
미국 최고의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는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그를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시인”으로 평가하고요. 미국 전역을 사로잡은 메리 올리버의 독보적인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메리 올리버의 이름 앞에 붙는 대표적인 칭호는 ‘자연 친화 시인’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기꺼이 자연의 한복판에서 살며 그 찬란한 광경을 시에 담아냈기 때문이죠.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데 익숙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는 월트 휘트먼, 헨리 데이비드 소로, 로버트 프로스트처럼 자연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과 생과 사의 본질을 아름다운 언어로 남긴 시인들에게 영향을 받았죠. 그렇게 열세 살쯤부터 자연스럽게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훗날 그는 이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받았음을 숨기지 않으며 존경과 애정을 담은 산문을 작성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모로 메리 올리버를 ‘휘트먼, 소로, 프로스트의 후계자’로 지칭하는 이유입니다. 자기 삶과 자연의 순환을 별개로 두지 않은 위대한 작가들의 차분하고도 단단한 시선은, 이 복잡한 세상을 버티듯 견디는 사람들에게 고요한 위로와 해탈의 감정을 선사합니다.
자연 친화를 넘어
자연의 일부가 되는 삶으로
메리 올리버는 말 그대로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황금빛 자본을 만끽하다가 ‘환경 보호’라던가 ‘지구를 지키자’는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만 뱉는 사람이 아니었죠.
그는 예술가들의 고장이라 불리는 프로빈스타운에서 살면서 날마다 자연 속에 뒹굴었습니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 나온 목재를 주워 와 제 손으로 직접 집을 짓기도 하거니와 자신과 다른 존재와 교감하기 위해 기꺼이 땅에 네 발을 디디며 움직이기도 했죠.
그의 일상은 바닷가에 나가 먼바다를 바라보다가 해변가에 올라와 알을 품는 거북이를 관찰하기도, 그 거북이가 소중하게 모래밭에 숨겨둔 알을 신나게 훔쳐 먹는 너구리를 지켜보기도 하는 날들입니다. 대부분의 날은 습지로 나가 새들의 움직임을 쫓거나 그들의 울음소리에서 받은 영감을 공책에 이런저런 말들로 기록하며 지내기도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리포터 시인’으로 부를 만큼 자연이 전하는 감동적인 뉴스를 소박한 언어로 재현해낸 다정한 시인이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를 좇아 살던 미국인들에게 그의 시가 얼마나 위안과 향수를 불러일으켰을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실은 미국인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지만요.
『서쪽 바람』
여기 내 머릿속, 언어의 작은 소음이 그치질 않아. | 단단한 흰 별들과 친구 되기를 나 어찌 바랄 수 있을까?
_메리 올리버, 『별들』
메리 올리버의 독창성은 자연 본연의 모습을 관찰했다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임을 잊어버린 듯, 관찰 대상의 영혼 속으로 뛰어듭니다. 어두운 밤을 활개 치는 올빼미가 되거나 물수리에게 잡힌 물고기가 되기도, 심지어는 구렁이의 입장이 되기도 하죠. 올빼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죽음’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보신 적 있나요? 나무를 휘감은 검정 뱀이 되어 내 몸을 느껴 본 적 있나요? 생각이라는 활동의 경이로움을 담은 언어를 따라 나의 감정 결을 더듬어 보신 적 있나요? 형식과 길이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작품들이 모인 『서쪽 바람』에서는 스스로 한계를 두지 않고 자연의 모든 것을 만끽하고, 끈질기게 관찰하는 시인의 모습을 경탄하며 바라보게 됩니다.
이 시집의 표제작 『서쪽 바람』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쓰였습니다. 바람이라는 소재뿐 아니라 우리들의 소박한 일상 속 행복, 새들과 곤충, 꽃을 바라보는 마음에 깃든 ‘사랑’이라는 소재를 담아냈죠. 이토록 각양각색의 소재들을 한곳에 모아 사랑으로 엮어내는 언어는 독창적이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습니다. 외형도 특성도 다른 세상만사 모든 것의 근본에 사랑이 있음을 노래하는 그의 시를 듣다 보면, 마치 항복하듯 시인의 말을 인정해 버리게 되는 위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긴 호흡』
내게 일이라 함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 나중에, 긴 시간이 지난 뒤에 이 말들의 모임은 다른 책에 오를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되어 지금 이 시간 내가 달콤한 어둠 속에서 보거나 들은 걸 여러분이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_메리 올리버, 『긴 호흡』 서문
시라는 형식은 시인이 의도한 호흡에 맞춰 그 정경을 따라갈 수 있기에 작품의 본질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데 제격입니다. 하지만 다소 낯선 형식에 선뜻 도전하기 주저된다면 메리 올리버의 솔직담백한 에세이와 시를 함께 엮은 시선집을 추천합니다.
메리 올리버의 시선집으로는 여러 책이 있지만, 그 중 『긴 호흡』은 규칙적으로 기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일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불현듯 영감이 떠오르지만, 기록할 종이가 없어 안절부절못하거나, 분명 충실히 기록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니 불후의 걸작으로 남기기에는 어딘가 빠진 듯한 아쉬움을 느낀 경험이 있으신가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작가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에세이는 평생을 시인으로 살았지만 자주 낙담하고 수시로 경이로워하는 천상 예술가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는 전업 작가지만 기록하는 삶을 인간 본연의 삶과 분리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의 생애와 우리 삶의 흐름은 무관하지 않음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자연의 생애를 충실히 관찰하며 얻은 통찰을 자신의 가치관을 벼르는 날카로운 도구로 삼아 끊임없이 가다듬는 데 집중합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아도 선뜻 답이 떠오르지 않는 독자들에게, 메리 올리버는 자연의 일과를 보여주며 ‘자, 여기서 네 답을 찾아봐!’라고, 명랑하게 이야기합니다. 자연의 다정한 세계 속으로 이끌어 주면서 말이죠.
너의 절망을 말해 봐, 그럼 나의 절망도 말할 테니.
_메리 올리버, 『기러기』
메리 올리버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시 중 하나인 『기러기』는 2009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9.11 테러 추모식에서 낭송해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서로서로 위로하고 치유해 주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요. 『기러기』를 읽다 보면 자유롭게 비상하는 기러기처럼 우리도 각자의 슬픔에서 놓여 자유로울 것을 희망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각자의 세상에서 힘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 독창적으로 근사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잊고 사는 그 진부한 사실이 우리가 절망과 낙심, 권태에 지쳐 휘청거릴 때 우리를 지탱하거든요. 메리 올리버는 우리가 자신의 근사한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앉은 위치를 잠시 바꿔주는 시인입니다. 올여름, 잠시 쉬어가고 싶을 때면 메리 올리버의 책을 들고 자연이 숨 쉬는 곳 한복판으로 떠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