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한 사회 면면을 들여다볼수록 우리 시대가 진보하기보다는 후퇴하고 있다고 비관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낙관은 그저 바람일 뿐, 화를 입기 전 스스로 권리를 움켜쥐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사회 전반으로 번지는 듯합니다.
그런 아비규환의 시대 한복판에서 한 사람이 온 생을 다해 하나의 가치관을 부르짖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그 목소리가 세대를 이어갈수록 우렁차게 울려 퍼질 때 얼마나 거대한 힘이 발휘될지 가늠해본 적은요?
여기, 피와 살을 지닌 여성들이 세상이 정한 페르소나가 아니라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살기 위해 수십 년간, 여러 세대를 걸쳐 힘을 모아온 기록이 있습니다. 시대의 억압에 맞서기 위해 그들의 투쟁은 과격해야만 했고, 절박함에 동반된 과격성은 곧 그녀들에게 ‘미쳤다’는 수식어가 붙게 만들어버렸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했던 나라 미국에서 왜 여성들은 그토록 처절하게 울부짖어야 했을까요. 때론 단결하고 때론 대립하며 거대한 사상의 물결을 이뤄온 그녀들의 행보가 『여전히 미쳐 있는』에서 펼쳐집니다.
미국 현대사와 함께한
페미니즘 역사
이 책은 1950년부터 수 세대에 걸쳐 여성 작가들이 어떻게 정치적, 문화적 변혁을 일구어왔으며, 그 변화 뒤에서 자기 인생 과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충실히 설명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페미니스트들이 태동하기 시작한 1950년대, 본격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던 1960년대, 어머니 세대의 좌절을 목격하며 조목조목 권리를 요구하는 후손들이 본격 활동한 1970년대, 보수적이었던 시대 앞에 혼란과 분열을 겪고 다시 일어서던 1980, 90년대,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품은 불안을 딛고 다양한 연대를 모색하며 발전하고 있는 21세기까지. 『여전히 미쳐 있는』에서는 세계 초강대국으로 호령하던 미국의 화려한 겉모습과 동시에 그 이면에 분명 실존했던 착취와 억압의 타자였던 존재들의 상처도 고스란히 다루고 있습니다.
전작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영어로 글을 쓰는 여성 작가들의 사상을 두루 주목했던 것과 달리, 신작 『여전히 미쳐 있는』에서 저자들은 미국 역사와 나란히 발전해온 미국 여성들의 투쟁사에 집중합니다. 2017년 ‘상스럽고 철저히 부적격한 차별주의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충격으로, 자기 나라의 역사에 모든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죠.
워낙 거대한 나라이자 거대한 사상의 연대기라 지루하고 개괄적일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저자들은 집요한 형사처럼 어느 시대, 어느 작가 하나 놓치지 않고 그녀들의 생을 만들어낸 모든 관계, 사건을 취합해 놓았으니까요. 우여곡절 많았던 페미니즘이라는 바다를 이뤄온 작은 파도 물결 하나까지 놓치지 않음으로써 반드시 현실 문제의 원인을 찾고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고 말겠다는 저자들의 강력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피와 살을 가진 실체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이 지닌 강렬한 인상 때문에 그 사상을 섬세히 조각해온 개개인들의 이야기는 밀려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세상이 대격변으로 요동치는 중에도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공유하며 모든 여성의 연대를 끌어낸 강인한 여성 작가들의 인생 모든 것에 조명을 샅샅이 비춥니다.
시대가 혼란할수록 기성세대와 집단들은 대의라는 명분을 우선순위로 들어 약자들의 침묵을 당연시합니다. 하지만 여성과 약자들이 시대의 고루한 억압에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한 의지를 심어주는 등대 같은 작가들이 때마다 존재했습니다.
가령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를 거의 질식시키던 가정생활에서 벗어나 “내게는 되찾아야 할 자아가 있다”고 말하며 여성이 일반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강요받아야 했던 생활을 시로 표출합니다. 수전 손택이나 케이트 밀릿은 미국 역사와 맞물려 여성이 세뇌받아왔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조명하는 날카로운 글들을 출판했죠. 특히 토니 모리슨은 흑인 여성으로써 겪어야 했던 파괴적인 억압으로 인해 삶이 얼마나 비참하게 일그러지는지 고발하는 작품들을 남겼고 그 작품성과 의미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들은 여러 환경 요소에 눌려 분노를 미루는 대신 더더욱 전략적으로 분노하기를 택했습니다. “내 침묵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았다”고 말한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침묵은 이전 세대의 절망을 되풀이할 뿐이라는 것을 여성들이 절감할수록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에도 연대의 힘이 실렸고, 페미니즘의 불길은 점점 더 거세어져 온 것이죠. ‘사상’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그 뒤에는 분명 실체가 있는 무수한 여성들의 공감과 분노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페미니즘이 이데올로기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행진과 투쟁의 흰옷
2020년 11월, 미국 첫 여성 부통령이자 흑인 부통령으로 선출된 카멀라 해리스는 우아한 흰색 바지 정장을 입고 연단 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투표권을 확보하고 지켜내기 위해 한 세기 이상에 걸쳐 힘써온 모든 여성에게, 그리고 2020년 현재 목소리를 내기 위해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새로운 세대 여성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덧붙여 유명한 한마디를 덧붙였죠. “제가 부통령이 된 최초의 여성일 테지만, 최후의 여성은 아닐 겁니다.”
흰옷은 대서양 양안의 여성들이 참정권을 위해 행진과 투쟁을 할 때 입었던 옷입니다. 미디어와 여론의 이목을 끌려는 의도도 있지만, 흰색은 전통적으로 신부 드레스 색상이기에 참정권자들이 이 색상을 극적으로 드러낸 것은 하나의 정치적 주장이자 패러디이기도 했죠. 힐러리 클린턴, 제럴딘 페라로, 낸시 팰로시 등 저명한 여성 정치가들이 흰옷을 입고 언론에 등장하는 모습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 흰옷은 굴종이 아닌 자의식을, 낭만적 로맨스가 아닌 이성을, 연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분노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어느덧 70년이 훌쩍 넘어가는 2020년대, 투쟁하는 여성들이 여전히 흰옷을 입고 등장하는 모습에서 미국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게 됩니다. 자유와 평화의 나라를 자처하는 곳에서, 부통령 카멀라의 이름을 괴상하게 발음하며 그녀의 인종과 성별을 비웃고, 대학 교수로 일하는 퍼스트레이디 질 바이든 여사를 “어이!” 하고 부르거나 그녀가 취득한 박사 학위를 “별로 유망하지도 않은 학위 칭호”라며 깎아내리고 조용히 남편 보필이나 할 것을 요구하죠. 하지만 그녀들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한 차별과 조롱 앞에 침묵하기보다는 거친 투쟁으로 대응하며 유리 천장을 깨부수고 있습니다. 조 바이든 취임식 무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어맨다 고먼은 “겁을 집어먹었다고 해서 다시 뒤로 돌아가거나 가로막히지 않을 것”이라는 시 한 구절을 낭송합니다. 그 구절대로, 겁먹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앞선 여성들은 전 세계 모든 여성들, 나아가 연대와 보호가 필요한 약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미쳐 투쟁하도록 계속해서 뒤흔들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책에서 소개하는 여성 작가들이 목숨 걸고 피워낸 성과에 맹목적 추앙만 보내지는 않습니다. 그녀들이 이룬 성과에 걸맞은 찬사를 조목조목 보내면서도 시대가 지닌, 그리고 개개인의 역량이 지닌 한계는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시대가 흐르면 이전 세대의 한계를 보완해야 함에도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한 이들에게는 냉혹한 비판을 던지기도 하고요. 그녀들의 요구를 처절히 묵살해온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의 사상도 더 철저하고 냉정하게 바라봐야 했던, 여전히 미쳐 있는 한 세대 여성 학자들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사람다운 삶’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의 연대기를 읽으며 나는 무엇을 위해 미쳐볼지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요. 혼란한 세상 속 자신의 위치와 방향, 정체성까지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해당 아티클은 북하우스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