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록페스티벌을 다녀왔습니다. 부산을 마지막으로 올해 대형 록페스티벌은 모두 막을 내리게 되었는데요. 국내 밴드신이 착실히 세대교체를 이루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이번 부산국제록페스티벌은 소위 ‘국밥 밴드’라 불리는, 00년대 초 밴드신을 이끌었던 원로 밴드들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국내외에 팬층이 두터운 일본 밴드와 탄탄한 팬덤을 가지고 있는 터치드와 카디와 같은 신인 밴드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죠. 그 선두에는 실리카겔과 새소년이 있었습니다.
실리카겔은 단연코 지난 1년간 가장 주목받았던 밴드임이 틀림없습니다. 작년에 발매한 [NO PAIN]은 중독성 있는 록 사운드와 멜로디로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고,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부분을 수상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신사, 29CM와 같은 패션 플랫폼과 협업을 통해 화보를 찍기도 하고, 유수의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지요. 페스티벌 현장에선 실리카겔의 심볼 마크가 그려진 타올과 티셔츠를 입은 이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사실 실리카겔 이전에도 밴드의 아이콘이라 부를 수 있는 아티스트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혁오가 있고, 잔나비와 새소년 등이 있지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국카스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리카겔이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은 모양새는 앞선 밴드들과 사뭇 다릅니다. ‘실리카겔’이란 밴드를 유지하면서 유기적으로 살아 숨 쉬는 하나의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으니까요.
무너지고 있는
신(Scene)의 경계
밴드신에 부는 새로운 바람
지난 10년간 한국 대중음악을 강타한 밴드들은 보컬의 존재가 강했습니다. 혁오의 오혁, 잔나비의 최정훈, 새소년의 황소윤처럼요. 대중음악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의 보컬이었고, 실력도 출중했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도 뚜렷했기 때문에 새로움을 원하는 대중들에게 적합한 캐릭터이기도 했지요. 다만 아쉬운 점은 밴드 이름보다 프론트맨, 그러니까 보컬리스트들의 존재가 더욱 커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선, 대중들의 관심은 불가피한 부분이고, 국내 음악 시장의 생리에서 밴드라는 비주류 장르가 살아남기 위해선 필수 불가결한 요소일 것입니다.
그로 인해 메인스트림과 인디신의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했습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밴드들은 특정 신에 국한되지 않고, 타 장르의 아티스트와 협업하거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도 하지요. 때로는 예능에 모습을 드러내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하기도 합니다. 지난 몇 년간 열렸던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유의미한 시청률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신선한 밴드들의 모습을 비추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밴드도 아이돌과 같은 팬덤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요, 이러한 흐름은 밴드신이 변화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인디신을 굳건히 지켜온 뿌리인 ‘인디펜던트’에서는 멀어졌지만, 어찌 됐든 신이 활발히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졌으니까요.
밴드신의 침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음악은 좀 더 유연한 방법으로 만들어지고 소비됩니다. 장르적인 경계도 허물면서 혁신적인 시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전통적인 의미의 밴드, 즉 그룹사운드는 직접 연주해야 하고, 여러 명의 구성원이 움직여야 하며, 곡을 만들고 제작하기까지 많은 공수가 들어갑니다. 매우 번거롭고 지난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밴드가 가진 태생적인 한계는 신이 유지되기 힘든 조건인 동시에 밴드를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지난 시간 동안 홍대를 중심으로 끈끈히 이루어져 있던 인디펜던트 정신이 와해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릅니다. 밴드가 기존의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다면,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밴드신 내에서도 하드코어나 펑크와 같은 특정 장르는 여전히 자신들만의 영역을 견고히 하겠으나, 메인스트림으로 편입되는 루트가 다양해진 오늘날, 역설적으로 밴드들은 가장 역동적인 방향으로 자신들만의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실리카겔(Silica Gel)
이라는 브랜드
불규칙하게 빚은 생경함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밴드신’이라는 영역이 모호해지면서 밴드들은 각자의 영역을 꾸려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밴드는 실리카겔일 것입니다. 그들의 행보를 보면 음악적으로나 밴드 외적으로나 실리카겔이란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로 정의돼 가고 있는 듯합니다.
실리카겔의 음악은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싸이키델릭한 사운드부터 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강력한 록 사운드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장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곡을 듣던 ‘실리카겔’이라는 브랜드 로고가 박힌 듯한 인상을 줍니다.
첫 번째 정규 앨범의 수록곡 ‘모두 그래’는 단순한 가사와 리프가 반복됩니다. 몽환적인 신시사이저 위로 변칙적으로 쌓인 박자를 가로지르며 기타가 숨 가쁘게 유영합니다. 복잡한 음향만큼이나 곡의 흐름도 휙휙 바뀝니다. 거기에다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가사는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곡의 흐름을 빠르게 몰아붙입니다.
이러한 의도된 불규칙성은 실리카겔의 음악을 이루는 주요한 뼈대입니다. 그들의 곡들은 기초 공사가 되지 않은 도로 위로, 말끔한 철로를 깐 듯한 느낌이 듭니다. 기차를 타고 철로 위를 달리다 보면, 지형의 굴곡지거나 파인 부분들이 온전히 피부로 와닿지요. 중요한 건 정해진 선로를 따라가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는 점입니다.
작년 여름, sogumm과 함께 발매한 싱글 ‘I’MMORTAL’은 좀 더 세련된 불규칙성을 선보입니다. 각각의 장으로 구분된 듯한 곡의 전개는 서로 다른 노래를 이어 붙인 듯합니다. 교향곡의 악장이 바뀌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러한 불규칙으로 인해 느끼는 ‘생경함’은 실리카겔의 음악에서 공통으로 체감할 수 있는 감각입니다.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도 그렇지요.
낯선 이미지들의 나열
두렵게 아프게 무섭게
실리카겔의 뮤직비디오는 비주얼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명확한 밴드입니다. 초창기에는 VJ 맴버가 따로 있었을 정도로 미디어 아트에도 공을 들입니다. 실제로 자경단(실리카겔의 팬덤명)들은 ‘실리카겔의 라이브는 영상과 함께 봐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미디어는 그들의 음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비일상적인 언어와 파편화되어 의미를 색출하기 힘든 가사만큼이나 그들의 뮤직비디오는 모든 서사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립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뚜렷한 컨셉이 존재하는 ‘Desert Eagle’의 뮤직비디오는 ‘미지의 사막을 횡단한다’라는 조그마한 모티브를 바탕으로 서사를 꾸려 나가고 있습니다.
이 곡의 가장 유명한 기타 솔로 즈음에 도달했을 때, 강렬한 색채 대비와 빠르게 교차 편집되는 컷들이 쏟아지며 뮤직비디오는 반전을 꽤 합니다. 청자가 곡의 흐름과 영상 이미지에 익숙해질 때쯤 일부러 거리를 두어 비현실적인 감각을 느끼게끔 유도합니다.
비디오 그래퍼 멜트밀러(MELTMIRROR)와 함께한 ‘NEO SEOUL’의 뮤비는 현대적인 멜랑꼴리를 탁월한 비주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NEO’라는 단어를 접하시면 어떤 심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필자는 ‘Strange’란 표현이 직접적으로 떠오릅니다. 새로워서 이상한 것. 앞단에서 말씀드린 ‘생경함’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NEO SEOUL’은 서울의 젊은 청년들의 모습을 다채로운 컷으로 묘사합니다. 새로운 가치가 태어나고 충돌하는 서울이란 도시에서 느끼는 고독과 방황을 밤의 이미지, 청년들의 모습으로 구현하는데요, 정형화 되지 않은 컷 분할과 의도적으로 흐름을 방해하는 듯한 컷 편집들로 익숙한 장면들을 낯설게 비틉니다. 어느 지점은 호러스럽고, 기괴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낯선 이미지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실리카겔의 뮤직비디오는 그들이 음악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추상의 감각을 실체화하는 아주 중요한 과업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실리카겔이란 밴드가 단순히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그룹사운드가 아닌 하나의 아티스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정표
메인스트림과 실리카겔이라는 밴드
실리카겔이 대중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은 건 ‘No Pain’일 것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큰 사랑을 받았던 곡이지요. 비교적 난해하고, 접근성이 떨어졌던 다른 곡들과 달리 ‘No Pain’은 대중들이 록밴드에 기대하는 모든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트랙입니다. 중독서 있고 따라 부르기 쉬운 후렴구,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밴드 사운드와 머리 속에 맴도는 기타 리프 등, 말 그대로 킬링 트랙이라 할 수 있는 노래입니다.
실제로 이 노래 이후로 실리카겔은 다양한 매체에 소개됐고, 탄탄한 팬덤도 형성됐습니다. 여타 다른 밴드들이 걸어왔던 ‘메인스트림’으로 편입될 수 있는 정도’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실리카겔은 ‘No Pain’을 기점으로 방향키를 새로이 잡습니다. 자신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면서 실리카겔이란 이름을 견고히 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6년 만에 발표한 EP 앨범 [Machine Boy]가 ‘No Pain’과는 거리가 있는 실험적인 트랙들로 채워진 것입니다. 메인스트림, 대중이 선호하는 방향성이 아닌 자신들이 지금 하고자 하는 음악을 보여주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대중들에게 ‘실리카겔’을 설득해 나가는, 비교적 어려운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듯 올해 선 페스티벌에서 그들은 ‘No Pain’을 셋리스트 맨 첫 번째에 세웠습니다. 그 곡을 기대하고 온 대중들에게 “우린 이거 말고도 보여 줄 것이 많습니다.”라고 선언하듯이 말이죠. 공연 시작과 함께 터져 나오는 기타 리프가 메인스트림에 맞추어 나가기보다는 자신들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자 하는 담대한 선언처럼 들렸습니다.
WEBSITE : 실리카겔
INSTAGRAM : @silicagel.official
KBS 뮤직 토크쇼 ‘더 시즌즈’를 통해 공중파에 데뷔하고, 8월에 공개한 싱글 ‘Tik Tak Tok’이 차트에 진입을 하면서 다시 한번 실리카겔이란 브랜드가 가진 펀치력을 증명했습니다. 여기서 고삐를 늦추지 않고, 7년 만의 정규 앨범 2집 [POWER ANDER 99] 발매 예고를 했지요. 다음 달에는 발매 기념 단독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포크라노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기타리스트 김춘추는 “저는 여러 뮤지션과 작업을 하고 싶지만, 그것을 통해서 신이나 크루를 만들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의 상황은 저희가 자초한 거예요. 계속 이상한 애들이 되고 싶고 얼터너티브 한 방향으로 가고 싶어서요.”라고 말했는데요. 그의 말처럼 실리카겔은 올곧은 방향성을 가진 브랜드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숨 가쁘게 싱글을 내고, 다양한 아트워크와 협업으로 보인 족적을 살펴보면 지금까지는 유효한 것 같습니다. 실리카겔이 걸어온 길들은 앞으로 국내 밴드가 메인스트림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브랜딩 방법론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