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어떤 사람들일까? 먼저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예술가 이미지를 끄집어내서 이리저리 살펴보자. 그들의 옷차림은 어떠한가? 고상한가 아니면 너덜거리는가? 아마도 비즈니스맨을 위한 멀끔한 정장을 입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강렬한 눈빛을 지닌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나와 다르게 소시민적인 고민에서 자유로울 것만 같다. 어제 친구와 한 말다툼 때문에 속을 썩이지도, 바쁜 아침 시간에 지각을 면하기 위해 무단횡단을 할지 말지 고민하지도 않을 것 같다. 위대한 현대미술의 ‘악동’은 나와 같은 사소한 고민으로 인생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친구와 격렬한 주먹 다툼을 하고 가로수에 차를 처박아버릴 것이다. 절로 그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샘솟는다.
슈퍼스타의 탄생
이제 우리의 황홀한 상상에서 걸어 나와서 우리 사회를 떠도는 예술가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미디어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어떠한가? 그들도 우리의 상상 속의 예술가와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미디어 속의 예술가도 우리 상상 속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열정적이고 독특하며 외롭고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의 반항적인 외침은 마치 선지자처럼 우리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끈다. 우리는 영원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상관없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행하는 기행을 보고 즐거워 할 것이고 놀라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종의 모순이 감지된다. ‘악동 예술가’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우리는 그들의 예술작품에서 오히려 멀어진다. 예술가의 본분은 예술작품을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하는 것이고, 우리는 수용자로서 이를 감상할 권리를 가진다. 그런데 매혹적인 ‘악동 예술가’에 대한 선망은 우리를 작품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과 발언, 그리고 미디어가 비추는 그들의 이미지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슈퍼스타’의 탄생이다.
‘예술하는 천재들’
표면에 드러난 십분의 일 밑으로 사회통념(Idée reçues)이라고 하는 거대하고 불확실한 덩어리가 있다.…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기본 전제는 미켈란젤로와 반 고흐, 라파엘로와 잭슨 폴록 같은 개별 슈퍼스타들을 ‘위대한’이라는 문구로 서로 묶어준다.
_린다 노클린,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현대미술계에는 이런 ‘악동’의 이미지가 그대로 덧씌워진 예술가들이 여럿 존재한다.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의 대다수의 작가가 그렇고, 최근에 리움 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전시를 마친 마우리치오 카텔란도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악동 예술가’에 대한 동시대의 컬트적인 선망 이전에는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선망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오래된 ‘천재 예술가’의 신화
린다 노클린이 자신의 저작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예술이 천재적인 개인의 소산이라는 사회 통념은 미술사 서술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박물지』의 저자 플리니우스도 고대 그리스 조각가 리시포스를 타고난 천재로 묘사했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리시포스는 어린 시절부터 내부의 신비로운 부름을 들은 예술가로, 그는 스승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자신의 예술을 깨우쳤다. 조르주 바사리도 『미술가 열전』에서 플리니우스와 비슷한 서술을 이어간다. 바사리에 따르면 위대한 예술가는 범인과 다르다. 이들은 스스로 깨우치는 자이며 기존의 예술을 뛰어넘는 내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예술가 천재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 역사서에도 예로부터 등장한다. 『삼국사기』는 신라 시대 화가 솔거를 비범한 천재로 묘사한다. 솔거의 소나무 그림이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새가 그 그림으로 날아들었다는 이야기는 세부만 조금씩 바뀌며 다른 예술가의 일화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거의 천재 예술가 설화가 현대의 ‘악동 예술가’ 유행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술가를 ‘악동’ 혹은 ‘반항아’로 묘사하기보다는 하늘이 낳은 천재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천재 예술가, 악동들
그렇다면 언제부터 악동들이 ‘하늘이 내린 천재’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을까? 노클린은 사회의 물질주의에 저항하는 ‘성자 예술가’ 유형이 19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분석한다. 노클린에 따르면 이들 예술가는 “완고한 부모와 사회의 반대에 맞서 싸우며, 여느 기독교 순교자처럼 사회적 비난을 맞고 고통을 겪는다.” 반 고흐와 세잔이 이러한 성자 예술가 유형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사회에 저항하는 예술가 유형은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에서 ‘악동’으로 변모했다. 과거의 성자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위해 물질주의를 완고하게 거부하고 역경 속에서도 예술적 광휘를 내뿜는다면, 악동 예술가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자신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이들은 여전히 과거의 성자 예술가처럼 물질주의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들은 오히려 이를 꺼리기보단 그 속에 몸을 던진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철저하게 전유함으로써 이를 비판한다(혹은 비판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작품은 갤러리에, 옥션에, 수집가들의 컬렉션에 당당히 발을 들이민다. 그리고 보통 논란을 몰고 다니는 많은 ‘악동 예술가’의 뒤에는 놀랍도록 체계적인 변호인단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며 ‘못된 짓’을 반복할수록 이들은 부유해진다.
예술가들이 예술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을 비난할 마음은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예술가도 직업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라면 모름지기 돈을 좇지 않고 자신의 예술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예술에 대한 오래된 신화다. 그리고 ‘악동’ 칭호를 얻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폄훼할 마음도 없다. 이들의 작업에 대한 평가는(어떤 평가를 내가 내려야만 한다면) 그들 이름 앞에 붙은 ‘악동’ 딱지를 떼고 내리고 싶다. 실제로 필자는 ‘악동’이라 불리는 몇 예술가의 작업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최근의 ‘악동 예술가’에 대한 선망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이러한 ‘반항적인 이미지’는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통해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에 관한 관심을 컬트적인 선망으로 선회시킨다. 예술 속에 들어있는 사회적 맥락, 우리가 정말 집중해야만 하는 문제의식은 이 선망 뒤로 쉽게 사라져버린다. 전시 브로슈어가 만들어내는 이 알록달록한 포장지를 벗겨내고 정말 작품으로 다가설 때만이 우리가 진정한 ‘반항하는 예술’을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