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을 켜켜이 쌓는
박서보의 세계

똑같은 일을 매일 해도
질리지 않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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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일상이 지루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 단조로움마저 잊어버리고 끝까지 밀어 붙여보게 될 겁니다. 자신의 삶을 그렇게 묵묵히 살아낸 화가, 박서보의 면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박서보의 생애

박서보와 루이비통의 콜라보레이션
박서보와 루이비통의 콜라보레이션. 이미지 출처: LOUIS VUITTON

그림을 그리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1950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한 박서보는 대학에서 한 학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6·25 전쟁으로 인해 피난 생활을 시작합니다. 박서보는 전쟁이 끝난 후 복학하지만, 전쟁 후 동양화과 교수들이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김환기가 교수로 있는 서양화과로 전과하게 됩니다. 이후 박서보는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거나 클럽 벽화를 그리며 돈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홍익대학교 교편을 잡으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박서보는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수식어처럼 예술에 뜨겁게 몰입합니다. ‘뇌경색이 오기 전까지는 매일 같이 14시간 이상으로 작업을 안 해본 적이 없다’는 박서보는 이제 한국 예술에 있어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큰 별이 되었습니다.


박서보와 단색화

박서보, “Écriture (描法) No.020524”, 캔버스에 한지, 2002
박서보, “Écriture (描法) No.020524”, 캔버스에 한지, 2002 이미지 출처: 국제갤러리

1960년대 중반, 한국 화단을 지배하던 사조였던 앵포르멜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서보는 ≪앙데팡당≫전과 ≪에꼴 드 서울≫전, ≪서울현대미술제≫전의 3개 곳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전시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이우환은 단색화의 철학적 기반을 성립합니다. 이러한 토대를 기반으로 하여 윤형근,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과 같은 작가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단색화라는 사조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단색화는 국내의 여러 논고에서 서구 모노크롬과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단일한 색채를 사용하는 의미 (單色, monochrome)는 같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신체가 직접 노동 집약적인 반복 행위를 함으로써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강조하는 단색화의 특징은 비움의 미학, 마음의 수양에 집중하는 도가 사상 혹은 문인화와의 연결 고리 속에서 설명되기도 합니다.


박서보와 군사 정권

박서보, “Écriture (描法) No.071208”, 캔버스에 한지, 2007
박서보, “Écriture (描法) No.071208”, 캔버스에 한지, 2007 이미지 출처: 국제갤러리

박서보는 한국전쟁과 4·19 민주화 혁명, 5·16 군사 쿠데타와 같은 한국사의 변곡점을 모두 경험합니다. 동양적인 정신성과 끝없는 반복적 수행을 강조하는 단색화가 유신정권과 시작 시점이 맞아떨어진다는 점은 굉장히 아이러니합니다. 기성 체제의 전복을 외쳤던 일부 단색화가들이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본래 추구하던 예술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구상화를 그렸던 사실이 있다는 점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서보 역시 1967년에 1000호 크기의 대형 작품인 “음성지역포위섬멸전”을 출품합니다. 1972년에는 베트남 파병 부대를 그리는 종국화가단에 소속되어 “몬타나족 수용소 대민의료지원”, “중대기지 경계” 등의 작품을 그리거나,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목적의 민족기록화 사업의 일환으로 “수출선박”,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 등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박서보 예술상이 많은 비판 여론에 부딪혀 1회 시상을 끝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이유가 됩니다.


박서보의 작품 양식

1977년 작업실에서 묘법을 작업 중인 박서보의 모습
1977년 작업실에서 묘법을 작업 중인 박서보의 모습. 이미지 출처: Park-Seo-Bo Foundation

박서보의 작품 양식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뉩니다. 196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하는 “원형질” 연작 시기,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는 “유전질” 연작 시기, 박서보의 대표적인 작업으로 알려지게 되는 초기 묘법 시기와 후기 묘법 시기가 그것입니다.

박서보는 세포 안에 살아있는 물질계를 뜻하는 원형질 연작에서 생물 유기체적인 형상들, 거칠고 강한 붓질 등을 통해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을 표현합니다.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 그것에 대한 수용과 희망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박서보는 현대적인 화면 구성에 전통적인 오방색을 활용한 작업을 선보입니다. 옵아트와 팝아트에 영향받은 것으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작업은 기하학적인 화면을 스프레이로 매끈하게 처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작업 활동을 이어 나가던 중, 박서보는 자신의 둘째 아들이 공책을 연필로 긋는 낙서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화면에 흰색 물감을 두껍게 바른 뒤 물감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사선을 채워 넣는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조의 도공들이 아무 생각 없이 물레를 돌리듯이 캔버스 위에서 직선을 무수히 그려보았다”는 박서보의 언급에서도 느낄 수 있듯, 이 시기에는 한국적인 전통을 완전히 체화하여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나타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인 후기 묘법에 이르러서는 한지를 평면 위에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 방향을 전환합니다. 밭이랑 같기도 하고 무언가가 줄지어 퇴적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작업은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박서보는 자신의 칠순이자 화집 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어릴 적 “앞에 가는 똥차 비키시오”라고 선배 화가들을 향해 소리쳤던 것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예술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며 “자신 있거든 나를 추월해 가시구려”라고 도로 외칠 것이라고 말했지요. 반복적인 작업에도 지치지 않고 하루하루 진심을 다했던 예술가, 그의 자신감은 이런 태도에서 오는 것 아닐까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국 예술의 큰 별을 떠올리며, 오늘 하루를 촘촘히 살아낼 마음가짐을 얻어가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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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취향과 기록으로 세계를 확장하는 일에 기꺼이 마음을 빼앗깁니다.
장래희망은 탐미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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