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실수는 아마도 전쟁일 것입니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는, 패자는 있지만 승자는 없는 행위지요. 여러분은 단어만으로도 재앙 그 자체인 전쟁을 어떻게 접하고 계시나요? 필자를 비롯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모두 전쟁을 겪어본 적 없는 간접세대일 것입니다. 대신 뉴스를 통해 세계 각지의 비극적 소식을 접하거나, 영화 속에서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참혹한 장면을 보며 비통함을 느끼곤 하겠지요. 그렇다면, 예술은 전쟁에 대해 어떤 시선을 던질 수 있을까요? 각성, 비탄, 저항 등 다양한 관점 중에서도 관찰자적 시선을 취하는 다큐멘터리 장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던 전쟁의 얼굴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환멸을 살갗으로 느끼게 해주는 다큐멘터리 세 편을 소개합니다.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기
<우크라이나에서(In Ukraine)>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벌써 600일이 지났습니다. 22년 2월 러시아의 첫 침공에 대한 충격도 잠시, 매일 같이 보도되는 뉴스에 ‘아직도 안 끝났네’라며 지겨움을 느끼고 채널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쟁 안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돌려도 보이고, 눈을 감아도 들리는 지독한 현실입니다. 118개의 지역이 폭격을 당했고, 최소 1,300개의 학교가 파괴되었습니다. 사상자는 약 50만 명이 추산되며, 800만 명의 난민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쟁이 지나간 자리, 집이었던 그곳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들도 한때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In Ukraine)> 는 피오트르 파블루스(Piotr Pawlus)와 토마시 볼스키(Tomasz Wolski) 감독의 올해 개봉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카메라가 향하는 곳은 아직도 전쟁 중인 나라, 우크라이나입니다. 하지만, 전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정적인 카메라 무빙으로 폭격이 지나간 도시,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인터뷰처럼 “집이 무너졌어요. 정말 슬프고 암담합니다”와 같은 대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보여주기만 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흔적이 즐비한 도시 속에서 생존의 의지를 부여잡으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대신합니다.
“아빠, 이 탱크는 우크라이나 거예요? 러시아 거예요?”
_<우크라이나에서(In Ukraine)>
탱크 위를 올라타며 노는 아이들, 전쟁의 잔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그리고 곳곳에서 웃음소리도 들려 옵니다. 언제고 다시 폭격을 맞아도 이상할 리 없는 전쟁 한복판에서 이런 평범한 일상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이들의 현실이자 전쟁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내 땅에서 마음대로
농사 짓고 싶을 뿐
<올 리브 올리브(All Live Olive)>
신에게 바치는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울분 속에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랜 분쟁의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입니다. 올해 10월, 하마스의 공습으로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맹렬한 포격과 함께 최전방에서 벌어지는 국지전의 모습을 보곤 합니다. 하지만, 주거 지역도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올 리브 올리브>는 김태일, 주로미 감독의 공동 연출로 2017년 개봉된 다큐멘터리입니다. 전쟁 전후 달라진 일상에 촘촘히 스며들어 있는 고통을 보여줍니다. 서안지구 나블루스시에는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올리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장 큰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위즈단 가족 또한 올리브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유대인 정착촌으로부터 쫓겨나면서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습니다. 농사일을 하러 갈 때마다 매번 이스라엘 군의 검문을 받으며 통행해야 합니다.
김태일 감독은 국내 대표적인 독립 다큐멘터리스트입니다. 이 작품은 <민중의 세계사> 프로젝트로 광주, 캄보디아에 이어 3번째 작품입니다. 취재 대상과의 끈끈한 라포가 스크린 너머로 느껴질 정도로, 출연진들은 카메라를 향해 마치 가까운 이웃과 대화하듯이 내밀한 이야기들을 꺼냅니다.
“집으로 날라 온 폭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고작 세 살이었습니다.”
_<올 리브 올리브(All Live Olive)>
무함마드는 전쟁으로 아들 셋을 잃었습니다. 세 살짜리 막내아들은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죽었습니다. 폐허가 된 골목길을 천진하게 뛰어노는 아이들, 이 아이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설명해 줘야 하는 어른들의 죄책감, 전쟁 없는 세상을 물려주지 못한 미안함이 전해집니다. 분노와 억울함에 찬 양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고작 돌 다섯 개가 전부입니다. 어른이며, 아이들이며 이스라엘 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항합니다. 이들의 터전은 전쟁터이며, 평온함이 유일한 소망, 그리고 저항만이 전부인 삶을 살아갑니다. 촬영 당시 장면은 벌써 10년 전 이야기입니다. 10년이 지난 현재, 이들의 유일한 소망이었던 평온한 일상이 더 멀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전쟁이 낳은 진짜 비극은, 이 비극의 끝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거 사람 다 직있다 아이가
<소성리>
전쟁이 멈추었다고 해서 과연 과거가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땅에서 일어난 비극인 한국전쟁, 그날의 상흔을 여전히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성리>는 2018년 개봉한 박배일 감독의 다큐멘터리입니다. 경북 성주군 소성리에 사드가 배치되면서 마을의 안온한 일상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카메라는 할머니들의 67년간 봉인되어 있던 기억의 파편들을 따라갑니다. 할머니들이 기억 속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카메라 앵글은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무성한 풀숲을 어둡고 스산하게 담아 내기도 합니다. 소성리는 사드를 두고,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되어버렸습니다. 분열이 또 다른 분열을 낳고, 여전히 봉합되지 않은 상흔을 지닌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자체가 비극으로 다가옵니다.
“6·25 때 비행기 댕기는 것캉 똑같다 요새”
_<소성리>
도로에는 사드를 실은 장갑차 행렬이 지나가고, 하늘에는 헬기가 뚜두뚜두 소리를 내며 돌아다닙니다. 결국 소성리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는 ‘전쟁이 무섭다’, ‘전쟁은 두 번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 이것뿐입니다.
스펙타클한 서사는 없습니다. 가슴이 저릿한 결말 또한 없습니다. 하지만, 삶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평생에 걸쳤을 굴곡을 어떻게 단 90분 안에 담을 수 있을까요.
“저 골짜기에 델꼬 가가지고 사람을 이래이래 철사로 엮어 마 구덩이 파 놓고 총 다 쏴 직있다. 시방 돌 크다나이 섰는데 있제? 거도 사람 마이 죽었다. 계곡으로 내빼다가 계곡에서 죽는 사람, 산에 가 죽는 사람…“
_<소성리>
전쟁의 참혹한 얼굴은 뉴스나 유튜브로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훨씬 더 극사실적인 현장감을 느껴볼 수도 있습니다. 미디어의 세계 속에 사는 우리가 전쟁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가상현실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우리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깜깜한 막 뒤편에도 끊어질 듯 말듯 불안한 삶의 끈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전쟁을 이미지로만 소비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면은 전쟁 자체가 아닌 전쟁 이후 남겨진 불완전한 삶의 모습입니다.
위에 소개한 3편의 다큐멘터리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외침 같습니다. 전쟁이 마치 엊그제 본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잊혀질 때쯤, ‘여기 아직 사람 살아요’라고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