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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소비자가
돈은 발렌시아가가

개인의 노동을 교묘하게 유도하는
신자유주의적 방식
Edited by

발렌시아가의 헤진 신발, 이케아 가방, 과자 봉지. 논란이 되어 많은 주목을 받아온 제품들이다. 럭셔리 브랜드로서 독특한 전략이다. 럭셔리 브랜드는 보통 대중이 친근하게 느끼지 않고,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배타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발렌시아가가 ‘럭셔리함’에서 빗겨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발렌시아가는 무엇을 의도했을까?


청중의 노동

발렌시아가 제품에 대한 트위터 사용자의 게시글. 이미지 출처: Mirchi Plus

우린 발렌시아가가 ‘관심(attention)’을 의도했음을 잘 알고 있다. 소위 ‘바이럴(viral)’되는 것을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발렌시아가가 얻는 것은 관심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케아 가방과 비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올리거나 헤진 신발을 보며 웃고 비판하는 영상을 직접 제작한다. 관심에서 나아가 복제되고 재생산되는 것이다. 단순히 ‘좋아요’를 받고, 댓글이 달리고, 공유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새로운 콘텐츠가 쏟아진다. 눈에 띄는 이질적인 요소, 웃음을 불러 일으키는 터무니 없는 모습, 접근하기 쉬운 맥락은 대중의 “능동적인” 반응을 얻는다. 이렇게 발렌시아가는 밈이 된다. 발렌시아가는 밈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브랜드다.

미디어 학자 Skjulstad(2021)는 발렌시아가의 전략을 두고 ‘audience labour’를 이용한다고 설명한다. 번역하자면 청중이 직접 노동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발렌시아가 대신 제품을 홍보하는 노동을 한다. 발렌시아가는 노동하지 않고 원하는 결과물을 얻는다. 이는 발렌시아가가 직접 홍보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유하면서 콘텐츠의 유통이 아주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대중의 모든 반응이 ‘노동’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노동이란 화폐를 얻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다. 즉, 노동은 본래 생산과 소비의 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생산자와 소비자, 또는 이익을 얻는 자와 주는 자가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 ‘청중 노동’의 개념은 노동을 주고 받는 관계가 모호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발렌시아가는 이익을 얻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생산하지만 대가를 받지 않는다. 이들은 발렌시아가의 소비자인가, 홍보 콘텐츠의 생산자인가? 발렌시아가는 이익을 얻지만, 노동의 대가로 무엇을 주는가?


알고리즘 시대의 노동

이미지 출처: Unsplash

발렌시아가와 ‘노동하는 청중’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스타그램, 트위터, 유튜브와 같은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이 있다. 이 플랫폼들은 밈이 유통되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플랫폼에서는 브랜드의 홍보와 사람들의 반응이 모이고 섞이며 수많은 데이터가 형성된다. 쉽게 시선을 모으는 브랜드와, 이에 답하는 수많은 대중의 노동이 방대한 데이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데이터로 발생하는 이익은 플랫폼이 취한다. 그 이익의 핵심은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이 도입된 이후, 사람들의 모든 반응, 감정, 교류는 데이터가 되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온라인에 입장하는 순간 우리의 활동은 빈틈없이 기록되고, 금전적인 영향으로 환산된다. 우리의 모든 눈짓과 몸짓, 감정과 반응, 대화와 참여에 가격표가 따라붙는 것이다. 이로써 알고리즘을 형성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의 모든 활동, 관계, 시선이 데이터를 생산하는 노동이 되었다. 플랫폼은 알고리즘의 원리는 공개하지 않은 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광고 기회를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2023년 11월, 유럽에서 인스타그램이 유료화되었다는 소식은 시선이 상품화되고 활동이 노동화된 플랫폼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인스타그램의 유료 버전에서는 광고가 사라지고 개인 정보와 활동 내역이 데이터로 활용되지 않는다. 즉, 무료 버전에서는 광고에 노출되고 데이터를 생산함으로써 플랫폼 이용의 대가를 지불했다는 뜻이다. 개인의 활동은 데이터를 생산하는 노동이자, 데이터라는 상품 그 자체다. 플랫폼은 개인의 노동을 통해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동은 대가를 논할 만한 노동인가? 그 자발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온전히 자발적이라 볼 수 있는가?


개인은 교묘하게 통제된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개인을 통치(govern)하는지 설명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개인을 둘러싼 환경을 개입하고 통제함으로써 개인이 움직이는 방향을 제한한다. 이때 개인은 외부의 요인에 의해 행동이 조절되는 수동적인 존재다. 즉, 통치는 교묘하게 이루어진다.

개인의 욕망 역시 사회적으로 의도된 결과물이다. 이를 테면, 부에 대한 욕망과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이 있다. 개인은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며 보편의 욕망을 학습한다. 그리고 그 욕망에 따라 스스로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관리하고 경쟁한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욕망을 추구하는 환경을 형성했고, 그 환경을 통제하며 개인이 끊임없이 갈구하게 만든다. 발렌시아가는 이러한 욕망이 향하는 곳에 있다. 플랫폼에서 활동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시성 또한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개인을 통치하는 방식은 발렌시아가의 전략과 매우 유사하다. 발렌시아가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재창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마련했고, 사람들은 발렌시아가가 의도한 대로 행동했다. 발렌시아가의 경제적, 계급적 지위도 대중의 행동을 유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결국, 발렌시아가는 사진만 제시했을 뿐인데 막대한 홍보 효과를 얻었다. 플랫폼의 운영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도 이용을 강요하지 않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한다. 가시성과 그로 인한 이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유도된 ‘자발적인’ 노동을 통해 플랫폼의 권력과 발렌시아가의 인지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교묘하지 않은가?


이제 노동은 생산과 소비 사이 모호해진 경계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유도된다. 개인은 노동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이익은 기업이 가져간다. 우리의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인 노동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개인의 활동 속에 담긴 비자발성을 포착했다 하더라도, 우린 거부할 수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소셜 미디어에 입장하고, 관심 있는 브랜드의 게시물을 공유할 것이다.


김희량

김희량

패션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보였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포용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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