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입니다. 곧 새싹이 움트는 봄의 계절이 시작되면서 여기저기서 작은 움직임들이 시작될 거예요. 씨가 발아하고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거나 꽃봉오리가 피어나 활짝 개화하는 모습을 저속 촬영(타임랩스)한 영상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식물들은 쉼 없이 바삐 움직이며 저마다의 모습을 갖춰가는데, 가만히 관찰하지 않으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죠. 하지만, 이렇게 작은 움직임들은 시간의 속도와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전달하기도 합니다. 바삐 흘러가는 시간이 집적된 김수현 작가의 작품세계를 소개합니다.
쑥쑥 자라나는 작품의 정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작품의 모양새가 계속해서 변하는 전시를 보신 적 있으세요?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점점 자라나기 때문에 전시의 첫날과 마지막 날, 전혀 다른 형태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기르고, 키우고 있기 때문이죠.
김수현 작가는 파라핀 왁스를 녹이고 액체 왁스를 조금씩 떨어뜨려 조형물을 만들어냅니다. 전시장 전체를 눈같이 하얗게 덮고 있는 것은 바로 엉겨 붙은 파라핀 왁스입니다. 작가는 열전구가 설치된 매쉬망 위에 파라핀 알갱이를 두고, 열에 의해 녹은 왁스들이 똑똑 떨어져 마치 동굴 속 석순과 같은 형태로 쌓이게 작품을 설계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파라핀 왁스 알갱이를 열전구 아래에 두기도 하지만, 기계를 이용해 자동화하기도 합니다. 이때는 작가의 개입 영역이 더욱 적어지니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파라핀 왁스 액체의 움직임이나 맺힘 형태는 더욱 자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꼭대기에서부터 액체 왁스가 흘러내리며 작품들은 점점 키가 높아지고, 부피가 커지고, 독특한 모양새가 됩니다. 바닥에서부터 자라나는 왁스 더미는 낙하하는 파라핀 왁스 액체가 굳어져 저마다의 종모양 형태를 갖춥니다. 반면, 매쉬망에 맺히게 되는 왁스들은 종유석이나 고드름 같은 모습을 하며 조금씩 위에서 아래로 자라납니다. 바닥에서부터 자라는 파라핀 왁스, 위에서부터 떨어지며 맺히는 파라핀 왁스는 계속해서 자라고, 조금씩 그 모양새가 변합니다. 그래서 작가의 전시는 파라핀 왁스 덩어리가 얼만큼이나 자랐나 확인하고, 얼마나 제각각의 형태를 갖추었는지 관찰하는 재관람의 재미가 더해집니다.
이렇게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조형물은 마치 오랫동안 불을 켜 놓아서 촛농이 흘러내린 양초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촛농이 고이고 고여 흘러내리는 것처럼, 파라핀 왁스도 켜켜이 중첩되고 쌓여 형성됩니다. 그래서 김수현 작가의 집적된 왁스 더미들은 지나간 시간을 시각화한 결과물이 됩니다. 열전구 아래에서 한 방울, 한 방울씩 액체 파라핀 왁스가 떨어지고 축적된 것이죠. 김수현 작가는 액체 파라핀 왁스가 낙하하는 반복 행위를 모으는 작업을 통해 시간을 쌓습니다. 관람객은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 조형물의 높이를 형성하게 되었을지 상상하며 작품에 ‘쌓인 시간’을 감각하게 되죠.
식물을 대신하는 인공물의 생명력
작가는 파라핀 왁스 액체를 축적하기 위해 왁스의 양, 열전구의 온도, 매쉬망의 크기나 높이 등 다양한 ‘작품 성장 환경’을 컨트롤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색감을 더해 형형색색의 왁스 더미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위적인 환경에서 쌓고 모은 인공 물질 더미가 화분에 담길 때가 있습니다. 화분은 ‘식물을 담는’ 그릇인데, 식물 대신 파라핀 왁스 조형물을 담다니 어색하신가요?
작가는 열전구 아래에 파라핀 왁스를 추가하며 작품을 키우는 작업 방식을 ‘먹이 주기’에 비유합니다. 자신의 작품에 먹이를 주며 조금씩 키워나가는 것이죠. 그래서 그럴까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반려 식물처럼 대하기도 합니다.
사실 먹이(파라핀 왁스 알갱이)를 주고, 성장을 위해 햇볕(열전구)을 쬐고, 조금씩 자라나는 왁스 더미를 보면 화분에 있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또, 녹은 파라핀 왁스가 떨어지는 위치, 흘러내리거나 맺히고 굳는 모양새는 작가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죠. 파라핀 왁스의 물성과 주변 환경의 여건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해집니다. 여기서 김수현 작가의 작품세계는 자연적인 성질과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라난다’는 특성이 왁스 더미에 자연의 에너지를 더하겠죠.
이렇게 자연을 닮은 김수현 작가의 인공 식물들은 화분을 넘어 이끼가 있는 곳에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이끼나 돌, 꽃, 작은 식물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자라며 자연 풍경 속에 위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작가는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파라핀 왁스 작품을 시작했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파라핀 왁스들로 이루어진 생태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화이트 큐브에서 식물처럼 자라나고 자연물과 함께 배치된 왁스 더미들은 이제 더욱 선명하게 공간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김수현 작가는 먹이를 먹고 빛을 쬐며 쑥쑥 자라난 파라핀 왁스 조형물로 자신의 인공 자연 생태계를 완성합니다.
WEBSITE : 김수현 작가
INSTAGRAM : @some_intervals
김수현 작가의 작품세계를 접하면 ‘자연을 닮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의 인공 식물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고 점차 자라나며 성장합니다. 그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오랜 시간 반복되는 행위를 축적하고 모았을 때, 자연의 어떤 힘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김수현 작가가 발견한 자연의 생명력은 무엇인지 작가의 인공 생태계 속에서 발견해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