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술관은 자기 몸을 재단장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 재단장의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미술관이 자신의 색을 바꾸고 있는 모습이다. 새하얗기 그지없었던 벽을 모조리 검게 칠하고, 빛으로 가득 찼던 공간을 빛을 차단하는 공간으로 바꾸어 나간다. 미술관은 창을 굳게 닫고, 블라인드를 내린다. 더 이상 개방된 구조를 부르짖지 않는다. 이제 미술관이 확장하고자 공간, 더 멀리 나아가고자 하는 공간은 실제의 공간이 아니다. 꽉 닫힌 박스 안에 투사되는 빛줄기 안에서 확장되는 공간, 과거의 환영주의가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는 평면 너머의 공간이다. 우리는 그 가상성의 세계 안에서 미술을 경험한다. 마치 우리의 삶이 변해버린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흰색의 이상적인 공간이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것은 어떤 그림 한 점보다도 20세기 미술 이미지의 원형일 것이다.”
_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 『화이트 큐브 안에서: 전시장 공간에 대한 언급들』
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는 1976년에 봄에 20세기 미술의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가 바로 어떤 작품도 아닌 화이트큐브 자체라는 예리한 분석을 해냈으나, 안타깝게도 그 이미지는 채 반세기도 지나지 못하고 다른 이미지로 대체되어 버렸다. 21세기 미술의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화이트큐브가 아니다. 21세기 미술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 우리가 눈을 감고 우리 세기의 미술을 떠올렸을 때 나타나는 이미지는 이미 미술관을 벗어나 버렸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있는 그 자체, 바로 어둠이다.
화이트큐브의 몰락?
다른 장식적인 요소를 거의 완전히 배제하고 흰 벽으로만 구성한 전시공간을 의미하는 화이트큐브는 20세기 말부터 지독히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그 비판은 어떤 의미에서 타당하게 보인다. 화이트큐브는 작품을 생산된 맥락에서 깔끔하게 때어내 무색무취의 공간에 걸어놓는다. 화이트큐브에서 작품은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하나의 ‘사물’로 기능한다. 모더니티의 산물인 화이트큐브 이전, 예술작품은 지금과는 다른 가치가 지배하는 공간에 거했다. 성당, 절, 모스크 혹은 궁궐 안에서 작품은 창작된 의도와 분리될 수 없었고,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시가치는 제의가치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더니티가 도래한 이후 작품들은 점차 수집가의 방으로, 화이트큐브로 옮겨지며 새로운 근대적 질서에 순응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최초의 전형적인 화이트큐브 공간을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받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애초에 그 기획부터가 자본 친화적이며 동시에 매우 이념적이었다.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Alfred Barr)의 야욕, 미국의 현대미술을 전전 유럽의 미술의 적자이자 세계 현대미술의 첨병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욕망이 뉴욕현대미술관의 초기 기획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바는 미술을 사회적 소요와 이데올로기에서 격리해 미국의 현대미술 자체를 역사화하고 자기 지시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뉴욕현대미술관에 작용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로써 뉴욕현대미술관이라는 화이트큐브는 인종적인 의미에서도 하얗고, 남성중심적이며, 엘리트주의적인 공간으로 탄생했다.
1970년 이후 이러한 화이트큐브와 근대적 전시 제도를 비판하는 제도비판미술이 속속들이 등장했고, 여러 미술 평론가 역시 화이트큐브를 비판하는 글들을 다수 발표했다. 과거 특권계층에만 허락되던 미술 감상이 점점 화이트큐브라는 공공 전시공간으로 이동했지만, 사실 그 이동의 이면에는 여전히 배제의 정치와 자본주의의 논리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미술과 미술평론이 모두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태도는 실제로 당시의 미술을 추동하는 아주 강력한 경향으로 작동했다.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포스트모던미술은 그렇게 전시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새하얀 진공의 공간에 신물을 느낀 수많은 작품들이 미술관 밖에서 새 삶을 부르짖었다. 공사장이 새로운 미술관이 되고 드넓은 대지가 새로운 전시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이트큐브는 죽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며 여전히 주요한 예술 경험의 기지로 자신의 역할을 잃지 않았다. 미술사학자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벽 없는 미술관」에서 벽을 허물고 외부의 전경(vista)를 미술관 내부로 끌어들이며 끝없는 복제와 상품화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질서를 흡수하는 포스트모던 미술관의 등장을 이미 냉철하게 분석해 낸 바 있다.
그리고 화이트큐브는 21세기를 맞아 포스트모던 미술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제도비판미술이 이제 다시 제도공간 안에서 전시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있다. 뉴미디어 전시가 범람하고, 시뮬라크라가 실제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스스로 빛을 발하는 미술이 동시대 미술의 주류를 거머쥐면서 이제 화이트큐브는 자신의 이름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화이트큐브가 블랙박스로 변하는 과정을,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가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 방)가 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블랙박스: 플라톤의 동굴
많은 미디어아트가 빛을 투사하거나 발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이를 감상하기 위해서 최근 많은 전시장이 블랙박스로 변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연히 블랙박스의 기능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새로운 미술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전시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밝은 방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어두운 방에서 빛을 발하는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관람 경험을 제공하고, 불편할 정도로 현대 자본주의 스펙터클을 닮아있다.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주장한 것처럼 스펙터클은 번쩍이는 그 외양으로 개인의 시각을 현혹하고 개인의 삶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킨다. 블랙박스가 작동하는 방식은 놀라우리만치 이 스펙터클의 구조를 답습한다.
블랙박스 안으로 걸어가는 체험을 상상해 보자. 우리는 전시장이라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작품이 뿜어내는 광휘뿐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두렵고 외롭다. 그 순간 빛이 우리의 눈을 찌른다. 우리가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우리 시야로 직접 침입해 들어오는 것이다. 색색의 화면이 우리의 시야를 계속 채우고, 그 공간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우리는 수동적으로 쉴 새 없이 바뀌는 화면에 압도된다.
화이트큐브에서 우리는 우리 주변을 메운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이 더 머무는 장소와 그들이 빠르게 지나치는 장소를 볼 수 있었다. 작품 옆에는 다른 작품이 놓여있고,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점유하려고 노력하는지와 별개로 우리는 얼마간의 거리를 통해 그들을 선택적으로 관조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공간 안에 존재했지만, 그곳에 잠겨 있지는 않았다. 많은 미술 비평가들이 화이트큐브 자체가 현대미술로 제시되는 현상을 비판했지만, 사실 그 비평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이다. 블랙박스는 그 자체가 정말로 작품이다. 마치 카메라 옵스큐라 전체가 하나의 사진기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제 거리를 두고 작품을 관조하기보다는 그 작품 안에 잠겨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인공빛을 받아 울렁이는 그림자의 환영을 하염없이 지켜보게 되었다. 블랙박스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관조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몰입을 요구한다. 순수하고, 침전하는 몰입을. 우리는 이를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관조가 선사하는 거리:
화이트큐브에서
발견하는 구원의 가능성
블랙박스가 되지 못한 화이트큐브는 정말 끈질기게 살아남은 근대성의 성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성전을 과거와 다르게 방문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화이트큐브의 신도가 아니며, 더 이상 과거의 관람자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화이트큐브의 변모를 보았고, 화이트큐브가 숨기려 했던 비밀을 들춰냈다. 이제 우리는 순례자라기보다는 관광객일 것이다. 수상한 흥미와 불경한 생각을 가지고 화이트큐브 곳곳을 누비는 관광객. 심지어 우리는 이제 저마다 하나씩 카메라를 손에 쥐고 화이트큐브에 들어간다. 우리 자신이 이제 화이트큐브에 침입하는 일상성이다. 우리는 이제 하얀 장막을 깨부수고 그 안에 성스러움과 일상성의 묘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달라진 관람자와 달라진 작품은 화이트큐브의 결벽적인 성질과 이미 흥미로운 투쟁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1990년 리크릿 티라바닛(Rirkrit Tiravanija)은 뉴욕의 폴라 앨런 갤러리 전시장 안에서 팟타이를 만들어 관람자들에게 대접한다. 그의 작품은 바로 팟타이를 만드는 행위와 팟타이를 먹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예를 들어 티라바닛의 전시가 전시장을 떠나 한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사실 팟타이는 원래 레스토랑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더 흔한 일이고, 아마 사람들은 더 편하게 팟타이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레스토랑이 갖춘 조리 설비와 식탁과 의자는 팟타이 먹기에 더욱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사람들의 대화를 더욱 즐겁고 편안하며 더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팟타이》가 레스토랑에서 열렸다면 원래 전시가 가진 예리함, 담론적 가치는 훨씬 줄어들고 말 것이다.
폴라 앨런 갤러리에서 열린 《팟타이》에는 전시장은 원래 음식이 침범할 수 없는 결벽적인 공간이라는 통념과 팟타이를 먹는 행위 사이의 긴장감이 감돈다. 실제로 폴라 앨런 갤러리의 큐레이터는 당시를 회상하며, 갤러리에 음식 냄새가 밸까 몹시 걱정했다고 말한 바 있다. 관람자들이 팟타이를 먹으며 다른 사람과 담화를 나누는 것에 의식적으로 열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긴장에 놓여있다. 일상성이 제거되어야 마땅한 순백의 화이트큐브에서 일상적이고 냄새나고 친밀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그 인지가 관람자에게 팟타이를 먹는 행위, 팟타이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행위가 미술 생산의 일부라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화이트큐브 안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관람자는 자신이 관람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예술 담론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화이트큐브는 근대적 사고가 집합된 공간이다. 화이트큐브는 근대적 인간관, 남성중심적 사고, 자본주의가 농축된 공간으로 관람자에게 하나의 방향을 지시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던 바처럼 화이트큐브는 블랙박스와 달리 관조의 공간이다. 블랙박스는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고 몰입을 요구함으로 우리가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작품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제거하지만, 화이트큐브는 그렇지 않다. 화이트큐브는 근대적 미적 명령인 관조의 전통을 따르고, 관조는 우리에게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 우리는 불경한 방문자로서 화이트큐브가 제공하는 일정한 거리감 속에서 화이트큐브라는 그 공간 자체에 대해서 지각하고 판단하고 비판한다. 비판적인 관람자인 우리를 통해 화이트큐브는 근대성의 성전이자 동시에 새로운 담론 공간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블랙박스의 맹점을 비판했지만, 블랙박스가 부정적인 측면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대 미술은 과거의 미술이 배격했던 것들을 흡수하며 그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이제 미술의 범주는 굉장히 넓고, 미술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지도 주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블랙박스는 분명 그 확장의 산물이다. 현대미술은 연극과 영화의 요소를 모두 흡수하며 새로운 장으로 나아갔다. 블랙박스는 그 뿌리를 분명 화이트큐브뿐 아니라 극장과 카메라 옵스큐라에도 내리고 있다. 현대미술이 흡수해 온 다른 영역을 포괄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바로 블랙박스다. 다만, 내가 경계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모든 전시 공간이 블랙박스로 변하는 현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동시대의 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원성을 깊숙하게 받아들이며 나아가고 있다. 이를 조화롭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미술의 전시장 역시도 그 다원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것이 화이트큐브와 블랙박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미술 공간들이 모두 동시대 미술에 절박하게 필요한 이유다. 이러한 전시 공간의 혼종성이 21세기 미술의 새로운 이미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