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자아의 본질을 묻는
문화콘텐츠 3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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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해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를 수식하는 숫자와 언어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이고, 어떤 일을 하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따위의 것들이지요. 그러나 어쩐지 이 수식어들은 나를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나’는 훨씬 더 복잡다단합니다. 몇 마디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나요. 태어나 겪어온 무수한 사건들과 마주해온 세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나는 나의 육체일까요, 아니면 나의 정신일까요? 또 다른 무언가는 아닐는지요? 이러한 고민에 고민을 더하는 세 가지 문화콘텐츠를 소개합니다.



『’나’라는 착각』

책 『’나’라는 착각』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망상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지한 자아조차 생각에 불과한 것이지는 않을까요? 세계적인 신경과학자 그레고리 번스는 신경과학, 심리학, 사회학을 넘나들며 자아는 뇌가 만들어낸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떠올려보면,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결코 완전하지 않지요. ‘기억의 왜곡’이라는 말처럼 기억은 믿기 어려운 대상입니다. 뇌가 기억의 빈틈을 제멋대로 메꾸어 편집해 버리거든요. 자아 정체성은 이렇게 얼기설기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계에서 자라며 듣고 학습한 사회적인 행동 양식들은 우리의 뇌 속에 스키마로 자리 잡아 사고체계의 기반이 됩니다. 개인의 취향이라고 하지만 그 취향은 누군가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죠.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저자는 우리의 자아가 매우 불안정하며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언뜻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아가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를 깨부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거든요.


『’나’라는 착각』 구매 페이지


다큐멘터리
<마이 뷰티풀 브로큰 브레인>

다큐멘터리 <마이 뷰티풀 브로큰 브레인>
이미지 출처: Netflix

“물질적 육체나 뇌가 파괴됐을 때 자아도 같이 파괴되는 걸까요?” 책 『’나’라는 착각』을 통해 자아 개념은 뇌와 신경을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의식을 잃은 나, 뇌가 활동을 멈춘 나는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의식 없는 나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은 내가 이름 석 자로 불리는 누군가라는 걸 너무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겠지만요.

다큐멘터리 <마이 뷰티풀 브로큰 브레인>
이미지 출처: Netflix 공식 유튜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마이 뷰티풀 브로큰 브레인>의 주인공 로체는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집니다. 논리적이고 유능했던 영화제작자였던 그는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채로 의식을 회복하지요. 육체는 그대로이지만, 인지·언어능력을 상실한 로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합니다. 세상에 마치 자신만 홀로 남겨진 것 같다고 말하죠. 내가 누구라고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도 로체는 부단한 치료와 재활로 ‘나’를 다시 만들어 갑니다. 자기 자신으로서 숨 쉬듯 해온 모든 일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까요?


<마이 뷰티풀 브로큰 브레인> 상세 페이지


영화
<얼굴도둑>

영화 <얼굴도둑>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누군가와 대면하는 상황에서 그와 나를 단번에 구분짓는 건 다름 아닌 생김새죠. 예능 프로그램의 ‘인물 퀴즈’를 떠올려보세요. 찰나에도 사진 속 외모를 기준으로 ‘이 사람은 누구다!’라고 판단합니다. 얼굴 전체가 아니라 이목구비를 분리해 놓아도, 대상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어요. 그만큼 얼굴은 ‘나’라는 존재를 누군가에게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매체가 됩니다.

영화 <얼굴도둑>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얼굴도둑>의 주인공 니콜라는 스스로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타인의 인생을 훔치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죠. 목표 대상이 일상을 잠시 떠나 있는 동안, 그와 똑같이 변장해 그 사람인 듯 삶을 누립니다. 그런 세바스티앙 앞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몽탈트가 나타납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몽탈트의 삶을 훔치는데요. 문제는 몽탈트가 그 순간 자살을 해버렸다는 거예요. 타인의 삶에 깊게 관여하게 된 세바스티앙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요? 프랑스 영화답게 심오한 미장센과 철학적 뉘앙스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우리의 욕망과 자아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Nobody From Nowhere’이라는 원제도 눈여겨보세요.


<얼굴도둑> 보러 가기


“나는 누구인가?” 진부하리만큼 익숙한 이 물음은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누구’라는 인칭 대명사를 쓰는 것이 적절한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무엇인가?”로 정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서 소개한 세 가지의 콘텐츠를 들여다보고 나면,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머릿속만 더 복잡해집니다. 점차 우리는 사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올라요.

불교철학에는 무아(無我)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는 없다’는 뜻이지만, 불변하는 절대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대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합니다. 자아의 본질이 흐릿하다면, 죽을 때까지 영영 알 수 없다면, 모든 대상에 나를 투영하고 사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일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보듬고 위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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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유림

아무래도 좋을 것들을 찾아 모으는 사람.
고이고 싶지 않아 잔물결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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