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있는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창밖을 응시하거나 어리둥절한 채 속절없이 눈물이 나오는 날들. 그런 날들이면 저는 활자로 인쇄된 다정함 사이로 숨고는 했습니다. 때로는 그 다정함의 온기가 너무 따뜻해 울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최대한 멀리 달아날 때까지 이 책들의 귀퉁이를 접고 또 접었습니다. 비록 물성의 따뜻함은 없어도 그 온기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삶의 어려운 순간들을 통과하고 계시는 독자분들의 마음을 꽉 안아 줄 에세이 3권을 소개합니다.
세상에 숨겨진 다정함을 찾아내는 일
『다정소감』, 김혼비
『다정소감』은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말이라고 합니다. 책 제목에 걸맞게 모든 글들에서 김혼비 작가가 만나고 스쳐 지나온 다양한 다감한 사람들이 남긴 다정함이 느껴집니다. 김혼비 작가의 글들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소재를 글로 쓸 생각을 하셨을까?’하며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이런 소재를 가져와 자신만의 세계로 다정한 세계를 뚝딱하고 완성해 우리 앞에 내어놓습니다. 들여다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운 주변의 어떤 것들을 꺼내 와 글로 풀어쓰기란 여간 여러운 일이 아닐텐데 말이죠.
『다정소감』의 첫 번째 챕터 또한 ‘김솔통’에 관한 것 입니다. 김에 기름을 바르는 솔을 넣어 놓는 통인 김솔통을 발견하고 이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는 김솔통 뿐만아니라 다양한 일상의 장면들에 숨겨진 다정을 찾아냅니다. 여기에 살짝 곁들여진 유머 한 스푼은 김혼비 작가의 글과 속절없이 사랑에 빠지게 만들죠. 필자는 삶이 버거울 때 도망치고 싶을 때 김혼비 작가의 글에 빚진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빛 아래 살아가고 있는데요. 지난겨울 동안 매섭게 부는 찬바람에 꽁꽁 얼어버린 마음을 잠깐 녹이고 싶은 독자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그래, 이거였다. 나는 갑자기 김솔통 같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지구상의 중요도에 있어서 김도 못 되고, 김 위에 바르는 기름도 못 되고, 그 기름을 바르는 솔도 못 되는 4차적인(4차 산업혁명적인 게 아니라 그냥 4차적인) 존재이지만, 그래서 범국민적인 도구적 유용성 따위는 획득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그 잉여로우면서도 깔끔한 효용이 무척 반가울 존재. 보는 순간, ‘세상에 이런 물건이?’라는 새로운 인식과 (김솔처럼) 잊고 있던 다른 무언가에 대한 재인식을 동시에 하게 만드는 존재. 그리고 그 인식이라는 것들이 딱 김에 기름 바르는 것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 김솔통. 드디어 찾았다. 내가 쓰고 싶은 글. 두괄식을 만들어줄 첫 문장.
_김혼비, 『다정소감』
연결되고 흐르는 생의 기쁨
『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필자에게 이슬아 작가의 글은 마치 박카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신기하게 하루 끝에 이슬아 작가의 글을 읽으면 묘한 힘이 나죠. 『끝내주는 인생』은 이슬아 작가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산문집입니다. 어떻게 사는 게 ‘끝내주는 인생’인 걸까? 이 질문에 작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고생 한복판에서도 “오, 끝내주는데?”라고 농담할 수 있는 인생. ‘끝나버린’ 혹은 ‘끝장난’ 인생이 아니라 연결되고 흐르는 인생 자체가 끝내주는 인생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끝내주는 인생’을 읽고 나면 필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이야기집이 생기는 기분이었습니다.
책 속에서 이슬아 작가는 어쩔 도리 없는 일들에 무너지기도 하고 또 이런 일들에서 뜻밖의 기쁨을 얻는 일들을 반복하죠. 이를 통해 필자는 삶에서 기쁨과 슬픔을 분리수거하듯 구별해 낼 수 없다는 생의 진실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간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을 모두 이야기하는 이슬아 작가의 글이 유난스러운 삶에 지쳤을 때 유난히 자양강장제처럼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끝내주는 인생의 찰나를 담은 이훤 작가의 사진도 책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지만 왜인지 모르게 발을 딛고 설 힘이 없는 독자분들에게 『끝내주는 인생』 한 모금을 권합니다.
할아버지네서 함께 울던 우리들의 작은 인생이 여기까지 왔다.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더 멀리 가라는, 네가 가고 싶은 곳까지 멀리멀리 가보라는 말뿐이다. 우리는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게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삶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것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듯이.
_이슬아, 『끝내주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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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지만 진솔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고백
『멜라지는 마음』, 김멜라
현대 소설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아마 젊은 작가상이나 그간 출판된 여러 소설들을 통해 김멜라 작가를 눈여겨보셨을 것 같습니다. 저도 누군가 ‘바로 지금!’ 문단에서 주목 받고 있는 작가를 물어본다면 자신있게 김멜라 작가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멜라지는 마음』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김멜라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집입니다. 김멜라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되어 그의 일상을 관찰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이토록 온전하고 다정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은 어떤 능력일까?’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작가는 책 속에서 ‘내 세계를 온전히 둘러보다 보면 반드시 사랑스러운 것이 있다고, 그러니 그것들을 잘 지키고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독자를 다독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수줍지만 진솔하게 고백하는 김멜라 작가의 글에 마음을 기대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 책은 작가의 안식처이자 문장의 마침표를 찍어주는 사람인 온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김멜라 작가에게 온점이 있는 것과 같이, 필자에게도 좋은 이유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해도 질리지 않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자분들에게도 소중한 사람과 따뜻한 봄날에 이 책을 함께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예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아니어도, 계절과 색을 점유한 위대한 창작품이 아니어도, 나를 둘러싼 세계에는 반드시 사랑스러운 것이 있기 마련이다. 돋보이는 개성보다 그 개성을 도드라져 보이게 해주는 배경이 때론 더 귀하게 다가온다. 이 글의 제목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선반에 놓인 과자 봉지를 봤을 때처럼. 반쯤 먹은 과자 봉지를 빨래집게로 집어놓은 온점의 습관처럼. 나는 그 빨래집게 같은 글을 쓰고 싶다.
_김멜라, 『멜라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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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필자는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핸들을 너무 세게 또는 약하게 쥐어도, 페달을 구르는 발을 중간에 멈춰도 금세 방향을 잃고 무너지고 말더라고요. 문득 인생도 자전거를 타는 일처럼 흔들리고 휘어지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가끔 휴식이 필요할 땐 망설이지 않고 좋아하는 것들 사이에 숨기도 하면서요. 처음 이 책들을 발견했을 때의 설레는 마음과 가만히 창가에 앉아 책들을 읽던 충만한 마음을 담아 독자분들에게 보냅니다. 이 책들에서 기대고 싶은 문장을 발견하신다면 마음껏 쉬어가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