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꾸는 작은 도약
만화가 바스티앙 비베스

매일 한계를 뛰어넘는
우리에게 건네는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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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연말연시, 한 만화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의 인생에서 스쳐 지나갈 짧은 시절을 다룬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책 바깥세상과 동떨어진 작은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내심 의문이 들었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말마다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 사람의 어느 시절을 집요하게 담은 이야기가 새로이 다가왔습니다. 책 속에서도, 책 바깥에서도 우리는 살면서 매일 저마다의 크고 작은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화 속 인물들은 성장통을 겪으며 새로운 시절로 나아갑니다. 날마다 알게 모르게 한계를 뛰어넘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프랑스 만화가 바스티앙 비베스의 작품은 아프지만 끝내 삶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는 이야기였죠.

바스티앙 비베스는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 만화 비평가협회 대상 등을 수상하며 유럽을 대표하는 그래픽 노블 작가가 되었습니다. 국내에도 그의 책 대부분이 번역 출판되었을 정도이죠. 특히 청춘의 단면을 아름답게 포착하는 작품들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표작 3권을 소개합니다.


『폴리나』

이미지 출처: 미메시스
이미지 출처: 미메시스

6살 꼬마 아이 폴리나는 아파도 절대 내색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에 이끌려 유명 선생님이 운영하는 발레 스튜디오에 입학시험을 봅니다. 유연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재능이 있던 폴리나의 발레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죠. 보진스키는 제자들에게 엄격하고 혹독한 스승이었습니다. 춤에 흥미를 잃고 낙오되는 친구들을 보면서도 폴리나는 그럭저럭 훈련을 이어갑니다. 발레단에 발탁되어 유명 발레단에 입단하지만 지금까지 배운 발레는 쓰레기라고 말하는 새로운 스승은 그녀를 혼란에 빠지게 합니다. 이제까지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춤을 췄던 폴리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순식간에 뒤처지는 문제아가 되어버리죠.

하지만 이를 계기로 폴리나는 조금씩 자신만의 춤을 찾아갑니다.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과 다른 춤을 추는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죠. 오디션장에 데려다주는 엄마도, 공연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줄 선생님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폴리나는 결국 어떤 예술가로 성장 했을까요? 분명한 건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춘다는 것과 자신만의 예술을 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술가의 성장을 그린 이 만화는 한 사람의 인생을 압축해 놓은 듯합니다. 우리는 모두 처음엔 부모와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살다가 서서히 자아가 커지며 어느덧 스스로 미래를 그려가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하죠. 끝내 자신의 예술에 도달한 폴리나를 보며, 치열한 몸짓 끝에 우리가 만나게 될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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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맛』

이미지 출처: 미메시스
이미지 출처: 미메시스

인물의 말보다 물속에서의 몸짓이 대부분인 이 만화는 수영과 한 여자에게 푹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척추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 수영장에 다니기로 한 남자는 그곳에서 첫눈에 반한 여자를 만납니다. 배영도 겨우 해내는 자신에 비해 그녀의 수영 실력은 선수처럼 대단했죠. 하는 수 없이 다니던 수영장은 그녀를 만날 기대로 설레는 장소가 되고, 의무감에 하던 수영에도 욕심이 생깁니다. 배영 이외에 자유형도 해보면서 언젠가 잠영으로 수영장 레인을 쉬지 않고 완주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기죠. 지금까지 있는 힘껏 노력해야 할 때 한 번도 최선을 다해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할 수 있다며 용기를 줍니다.

그녀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그의 마음과 다르게 그녀는 갑자기 수영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숨을 참고 잠영 연습을 합니다. 실패 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녀를 따라가 붙잡고 싶은 마음에 더 크게 팔을 뻗는 순간, 숨이 딸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끝까지 숨을 참고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요?

이 만화는 인물에 대한 많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초반과는 다르게 헤엄치는 주인공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더욱 역동적으로 변한 움직임이 수영을 통해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하는 수영은 누군가의 주말 달리기, 자기 전 일기 쓰기, 아침 독서가 될 수도 있겠죠. 더 나은 삶을 위해 스스로 시작한 일들, 그 작은 도전을 통해 때론 실패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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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이미지 출처: 미메시스
이미지 출처: 미메시스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 기념일입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만화는 앞선 작품들과 다르게 정치적 소재를 통해 낯선 존재에 대한 차별과 증오에 대해 말합니다. 테러로 아내이자 엄마를 잃은 뱅상과 리자 부녀가 프랑스의 작은 마을로 휴양을 옵니다. 주인공 지미는 동료들에게도 마음을 잘 열지 않는 군인이지만 이 새로운 이웃에게만은 다릅니다. 얼마 전 아버지를 잃은 지미는 그들의 상실에 공감하며 유난히 부녀에게 마음을 씁니다. 지미는 사제 폭탄을 만들어 아랍계 이민자들이 사는 곳에 테러를 저지르려 한 뱅상을 저지합니다.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지 말라며 사냥용 소총을 건네 짐승을 사냥하게 하고,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보라고도 하죠. 시간이 지나 뱅상은 평화로운 마을로 이주를 결심할 정도로 안정을 찾아갑니다.

7월 14일, 마을 축제가 한창이던 때에 수상한 차량이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고, 지미는 소총을 쏴 테러를 막습니다. 부녀의 즐거운 모습과 훈장을 받고 영웅이 된 지미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듯싶던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지미가 축제 이전에 범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목격되었다는 진술이 나오자 그는 한순간에 영웅에서 선동가라 불리게 됩니다. 사실 뱅상이 만든 폭탄을 회수하기 위해 간 것이었지만 그가 비밀을 털어놓을지 알 수 없는 채로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만화는 명쾌한 결말 대신 우리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던 지미조차도 이민자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의 연민과 공감은 부녀의 삶을 구하는 치료제였지만 모두에게 제공되지는 않는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었죠. 만화가 분명히 말하는 건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와 차별은 끝없는 재앙을 만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운을 남기는 메시지 뿐만 아니라 지미, 뱅상, 리자 그리고 마을 사람들까지 각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곱씹을수록 더 많은 것들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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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앙 비베스는 만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개인의 내면을 깊게 파고듭니다. 배경과 인물 묘사의 강약 조절, 컷과 컷 사이의 리듬,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의 미묘한 표정 등 독자는 여러 단서로 만화의 여백을 채웁니다. 무엇보다 그의 만화는 작은 존재의 작은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부터 인물의 상황과 내면에 대한 공감을 끌어냅니다. 작가의 만화를 읽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이 만화들을 읽으며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은 셀 수 없이 많은 도전과 실패를 통해 얻어낸 결과라는 것을요. 언제나 성공적이지도 않고,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 기다린다 해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배우고 성장합니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한계를 넘어온 것이죠. 매일 학교에 가는 것도,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일터에서 일을 하는 것도, 절망에 빠졌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당연하다는 듯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아등바등 달리다 어느 순간 멈춰서 돌아보면 무사히 지나간 시절이 남았던 것이죠. 이토록 치열하고 아름답게 삶을 꾸려온 스스로를 긍정하고 대견히 여기게 됩니다. 서로 다른 각자의 투쟁 속에서 살아왔을 사람들을 소중히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만화 속에서 중력을 거슬러 공중으로 뛰고, 물길을 이기려 발을 차고, 위험을 막으려 기꺼이 앞장서는 인물을 통해 절대 만만하지 않은 삶의 무거움과 숭고함을 느낍니다.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깃발을 흔들고,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을 보며 책 속의 이야기와 책 바깥의 현실이 이토록 닿아 있음을 느꼈던 적이 또 있나 싶습니다.


Picture of 김자현

김자현

그림과 글, 잡다한 취향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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