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를 감상한 뒤,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필자는 종종 엔딩 크레딧을 보며 영화 촬영 현장을 상상하곤 합니다. ‘영화 중간에 나오던 그 화려한 액션씬, 정말 찍기 어려웠겠지? 미술 감독이 소품 구하느라 정말 어려웠을 것 같아. 의상은 또 어떻고. 감독이 조명에 신경을 정말 많이 썼던 것 같아.’ 영화에서 한 발짝 뒤로 떨어져서 생각해 보는 거죠. 우리는 영화 속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실제, 이 영화를 찍는 촬영 현장은 어땠을까?’ 하고 말이죠.
이렇게 관객은 알기 어려운, 카메라 뒤의 이야기들을 담아내서 ‘영화를 찍는 과정과 그 촬영 현장’을 담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아주 솔직할 수도, 반대로 현실을 포장했을 수도 있지만, ‘영화 제작기’를 영화로 담아냈죠. 왜냐하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영화를 너무 사랑하거든요. 영화를 애정하기 때문에 영화를 찍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합니다.
본문을 읽기 전, 한 편의 글 먼저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 속 애정의 깊이를 솔직하게 전달하기 위해 약간의 스포일러가 섞여 있어 ‘스포 주의’하셔야 하거든요. 하지만, 스포일러를 접했음에도 재밌게 영화 감상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ANTIEGG 한나 에디터의 ’스포 주의를 주의하기’를 읽으신다면, 더욱 즐겁게 영화를 만나 보실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기까지
<거미집>, 2023
사실, 영화 촬영 현장을 배경으로 보여주거나 소재로 활용하는 작품은 꽤 많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직업이 영화배우나 촬영장 스태프라서 잠시 촬영에 임하는 장면이 나온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1970년대 한국 영화 촬영장을 배경으로 한 <거미집>은 조금 다릅니다. 영화 촬영장과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이 만드는 영화 자체가 주인공이기 때문이죠.
김 감독은 영화 ‘거미집’의 촬영을 모두 마친 뒤, 새로운 결말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는 영화의 결말만 살짝 바꾸면 걸작이 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죠. 사실 김 감독은 성공적인 데뷔작을 선보인 후,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해 날 선 대중의 비판과 악평에 마음고생하고 있던 터였죠. 약간의 추가 촬영을 결심한 감독은 주연과 조연 배우들, 촬영장 스태프들, 제작자, 모두를 불러 모으기 시작합니다. 갑작스럽게 생긴 추가 촬영 스케줄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검열 담당자까지 현장에 들이닥치게 되죠.
이렇게 어지럽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영화인들은 각자의 상황과 사정에 맞춰 여러 행동을 취합니다. 완벽한 결말을 위해 질주하는 감독, 대본이 심의에 걸려 추가 촬영을 반대하는 제작사 대표, 유일하게 감독을 믿고 지지해주는 제작사 대표의 조카, 까다로운 배우들의 요구를 맞추느라 진이 빠지는 스태프들, 다른 촬영과 스케줄이 겹쳐 추가 촬영이 어려운 출연자, 자신의 사생활로 인해 곤경에 처하고 마는 배우들까지. 모두가 영화인임에도 각자의 사정과 욕심, 관계가 뒤얽힌 곳이 ‘거미집’의 촬영 현장입니다. 연이어 발생하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김 감독은 결국 자신의 완벽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 하나로 새로운 결말을 완성시킵니다. 그리고 <거미집>을 관람하는 관객들에게도 ‘거미집’이 상영됩니다. 거미가 얇은 실을 한 올 한 올 엮어 가는 것처럼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하나의 영화가 탄생하게 됨을, 관객 모두가 목격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미래에 닿기를
<썸머 필름을 타고!>, 2021
사무라이가 나오는 시대극 영화의 광팬인 ‘맨발’은 영화감독을 꿈꾸는 여고생입니다. 맨발은 영화 동아리에서 사무라이 영화를 찍기를 원했지만, 또래 친구들은 청춘 로맨스 영화에 푹 빠져있어 그의 시나리오는 청춘 로맨스 시나리오에 밀리기 일쑤였죠. 무엇보다 맨발의 마음에 쏙 드는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린타로를 만난 맨발은 그가 출연해 주지 않으면 영화를 찍지 않겠다며 강경하게 밀어붙여 학교 친구들과 함께 여름 방학 동안 영화 ‘무사의 청춘’을 찍기로 합니다.
<썸머 필름을 타고!>는 이렇게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고등학생들이 모여 즐겁게 영화를 찍는 청춘물…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무사의 청춘’ 속 주인공인 린타로가 사실은 미래에서 온 ‘맨발 감독’의 팬이기 때문이죠.
아주 먼 미래,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시대에서 맨발이 만든 영화를 본 린타로는 크게 감명을 받고 맨발의 첫 작품인 ‘무사의 청춘’을 감상하기 위해 과거로 여행을 온 것이었죠. 어찌해서 린타로는 시간여행까지 하며 영화를 보러 와야 했나 하는 의문에 그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미래에는 영화가 없다고 말이죠. 짧은 영상, 숏폼에 익숙해진 인류는 더 이상 10초 이상의 영상을 보지 않게 되었고, 영화 또한 10초 길이에 불과하다고 말이죠. 그래서 먼 미래, 영화의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맨발의 영화 또한 남지 않게 된 것이죠. 영화가 사라진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된 맨발과 그의 친구들은, 과연 끝까지 ‘무사의 청춘’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맨발의 대사 중, ‘영화는 스크린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미래에 닿을 수 있을지, 영화를 향한 주인공들의 애정이 지금, 영화를 소비하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잠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썸머’를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아주 솔직한 러브레터 한 편
<어둔 밤>, 2018
앞서 소개한 <썸머 필름을 타고!>는 사실 린타로의 정체 외에도 상당히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죠. 그보다 조금 더 리얼하고 솔직하게 ‘영화 광팬’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어둔 밤>입니다. 이 영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무엇보다도 실감 나는 배우들의 연기와 현실적인 대사, 어디선가 만나본 듯한 캐릭터들의 조화가 사실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어느 한 대학의 영화 감상 동아리 ‘리그 오브 쉐도우’의 영화 제작기를 다룹니다. 한 동아리원이 갑작스럽게 영화 제작을 제안하게 되고, 친구들은 ‘우리는 영화 보는 동아리다’라며 잠시 망설이죠.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영화 제목을 듣고 달라집니다.
“일단, 제목은… ‘어둔 밤’.
“어둔 밤. 이상해. 뭐야, 그게.”
“어둔 밤이 영어로 뭐냐?”
“다크 나이트? 어? 영어로 하니까 뭔가 달라지네?”
“그래. 이거라니까? 이걸로 그냥 바로 찍어가지고 할리우드 갈 수 있는 거야. 그래, 우리, 이거 바로 찍자. 바로 들어가자. 야, 카메라. 야, 너도, 우리 이거, 그냥 하는 거, 만드는 거 이거 계속 찍어. 그래, 메이킹 필름처럼.”
_<어둔 밤>
영화의 영어 제목이 꽤 멋져 보여서, 할리우드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시작하게 된 슈퍼 히어로 영화. 동아리원 모두가 힘을 모아 시나리오 제작부터 배우 캐스팅, 촬영, 하나하나 준비해 가지만 뭐든 쉽게 진행되지가 않습니다. 하나 확실한 건, 이들이 영화가 좋아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주요 멤버들의 입대로 인해 영화 촬영은 잠정 중단됩니다. 이후, 영화는 2부로 넘어가 ‘어둔 밤 리턴즈’를 제작하는 후배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주인공들이 맞닥뜨린 현실로 인해 무산되었던 영화는 우여곡절을 넘어 3부에서 완성되고 빛을 보게 되죠.
<어둔 밤>은 영화 제작기를 앞세워 청춘이 가장 빛나는 순간의 민낯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 감독과 심 피디는 후배들에게 영화를 향한 진정성을 강조하며 ‘버섯이 자라는 소리’까지 녹음해 오라 하고, 배우를 맡은 요한은 액션씬을 대비해 “L.O.V.E”를 외치며 펀치를 날리는 훈련에 진지하게 임합니다. ‘어둔 밤’을 이어가겠다는 결심으로 선배들의 궂은소리를 참던 상미넴은 담배를 태우다가 구역질하기도 하죠. 우스꽝스러운 이들의 모습은 영화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가진 청춘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어딘가 반짝거리는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둔 밤 리턴즈’는 순수하게 영화가 좋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완성됐고, 그래서 <어둔 밤>은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이 영화에게 쓴 연애편지가 됩니다.
영화로 만들어진 영화의 뒷이야기들이 모두 다 100%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까지도 영화니까요. 하지만, 조금은 꾸며진 뒷이야기들임에도 영화를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아마도 감독이, 영화인들이 스크린에 담아낸 영화를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 가득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애정을 조금이라도 전달받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영화 속으로 조금 더 깊이 빠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