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ANTIEGG 예진입니다.
이 글은 어느 일요일 밤, 노랗게 번뜩이는 조명 아래 쓰여졌습니다. 여름은 아직이지만, 귀뚜라미가 희미하게 우는 밤. 물기 머금은 미지근한 공기, 작게 움직이는 선풍기 날개, 창밖의 바스락거리는 소음. 내 시선은 깜빡이는 직선 앞에 잠시간 머물다, 곧 다음 글자를 따라 움직입니다. 완전하고도 소박한 밤입니다. 아마 당신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불분명한 잔상들과 살갗에 닿았던 온도 정도를 기억할 거예요. 별것 아닌 순간들도 기억에 묻히면 그럴싸한 추억이 되기 마련이니까요. 당신에게 ‘어제’라는 시차는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나요. 더 예전으로 돌아가, 지난 봄은 어떤지요. 무르익지 않은 그리움이 속속 고개를 듭니다.
당신도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껴본 적 있나요? 무엇이 그리운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그리운 순간이요. 파도 같은 그리움은 대범하게 나아가는 사람도 우뚝 멈춰 서게 하죠. 생경한 감각이라면, 당장 그리운 대상을 상기해 보세요. 먼지 쌓인 액자를 북북 문질러 형상을 가늠하듯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입니다. 어떤 표정이, 어떤 풍경이,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지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코어 메모리’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삶을 통틀어 잊기 힘든 강렬한 순간으로, 기억 저장소의 원동력이 되는 기억이지요. 가족과 함께 빙판 위를 누비던 한때, 상심에 빠져 있던 순간 찾아온 친구들의 위로. 코어 메모리로 자리한 순간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코어 메모리는 주인공 ‘라일리’처럼 어린 시절에 형성되기도 하겠지만, 누적되는 기억만큼 그 부피를 키워가지 않을까요. 불명의 그리움은 비대해진 코어 메모리들의 아우성일 테고요.
그리움에 짓눌릴 때면, 재빠르게 과거가 되어버릴 현재를 더 단단히 붙잡습니다. 오늘의 미지근함 조차 언젠가 그리워지겠죠. 시절은 지나갑니다. 슬픈 날도, 힘에 부쳤던 날도 망각에 힘 입어 간단히 미화됩니다. 매 순간 솟구치는 기쁨과 슬픔이 적절히 엇갈리고 때론 겹쳐져서 기억에 새겨지고요. 먼 미래 추억으로만 살아가게 된다면, 어떤 코어 메모리를 천장 위에 투영하고 싶나요. 시절을 풍부히 채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생각보다 시시한 모양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어제와 곧 과거가 될 오늘이 그랬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순간 마저 그리워하길 바랍니다. 활자 사이 머뭇거림을, 인식과 의미의 불협화음을, 행간 사이 슬픔을. 오늘따라 흩날리는 문장 사이를 배회한 기분을 느꼈다면, 당신이 맞습니다. 글을 맺음 짓고 싶지 않아서 문장을 늘였다가, 의미를 숨겼다가, 부수길 반복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언제나 겸연쩍고, 먹먹하고, 무엇보다 아쉽잖아요. 이 글은 ANTIEGG 예진이 발신하는 마지막 에세이입니다.
나는 그리워하겠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당신에게 편지를 쓰던 1년 8개월을요. 20편의 엉성한 외침에 사랑으로 화답해 준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저 묵묵히 읽어준 당신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관심이 없었다면 이 지면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당신과 나에게 주고 싶은 문장들만 진솔하게 모을 수 있었어요. 온 마음 다해 당신의 안녕을 바랍니다. 건조함에 길들지 않길, 불안함에 뒤척이지 않길, 성장하라는 압박에 굴하지 말길. 동시에 힘껏 응원합니다. 타인의 평가에 위축되지 않길, 새로운 도전을 미루지 않길, 아무도 읽지 않는 데도 계속 쓰길. 고작 몇 편의 글일 뿐이래도 곁에 머물길 바라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