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알려주지 않는
지도를 그리는 작가들

새로운 목적지로 안내하는
화가들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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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이 등장하기 전, 가족 여행을 떠날 때면 자동차 조수석에 앉은 어머니께서 커다란 종이 지도를 펴고 국도 번호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길을 찾곤 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 지도 어플로 길찾기를 하죠. 목적지까지의 길을 알려주는 도구, 지도. 그런 지도의 형식을 차용해 작품 활동을 시도한 화가들이 있습니다. 다만, 이들의 지도는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가들의 지도는 어떤 용도로 그려졌고, 무엇을 담고 있을까요?


작가의 흔적과
시선을 담아낸 지도

정재철,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루트맵 드로잉 1”, 2006
정재철,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루트맵 드로잉 1”, 2006, 이미지 출처: 아르코미술관 공식 웹사이트

정재철은 사진, 영상, 여행일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여행과 이동, 여정을 기록하는 프로젝트형 작업 방식을 시도했던 작가입니다. “실크로드 프로젝트(2004-2011)”는 아시아 내륙을 횡단하는 교역 통로 실크로드를 따라 걸으며 진행한 프로젝트로, 작가는 여정 중 만난 사람들에게 폐현수막을 나눠주고 발생한 일들을 기록했죠. 그는 중국, 인도, 네팔 등의 국가를 지나며 현지인들이 어떻게 폐현수막을 활용하는지를 확인하고, 걷기와 타인 만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수행 기록을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하였고, 그중 하나가 바로 루트맵입니다. 이 루트맵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도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폐현수막 활용 방안에서 엿볼 수 있는 지역별 생활 양식에 대한 정보가 더해져 새로운 형식의 지도작품이 됩니다.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루트맵 드로잉1”에서 볼 수 있는 지리정보 외 표기들이 바로 작가의 수행 내용과 다양한 폐현수막 활용 방안들이죠.

정재철, “제주일화도”, 2019
정재철, “제주일화도”, 2019, 이미지 출처: 아르코미술관 공식 웹사이트

이와 비슷하게 국내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로 “블루오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제주도, 신안, 독도, 새만금 등의 해안지역에서 진행된 리서치 프로젝트로, 해양 쓰레기들에 대한 정보, 해양 쓰레기 수집 일지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제주일화도(2019)”는 제주도 해안가에서 발견된 해양부유물들의 이동 루트를 관찰하고 이를 기록한 지도입니다. 이렇게 그의 지도에서는 지리적 위치에 기반한 작가의 수행 기록과 그 과정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희우, “강남대로 275-310”, 2011
정희우, “강남대로 275-310”, 2011, 이미지 출처: 정희우 작가 공식 웹사이트

정희우 작가는 강남 일대를 걸어 다니며 실재하는 건물들을 기록해 ‘강남 풍경’을 지도에 고스란히 옮겼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캔버스 위에 실제 건물의 크기, 도로의 폭과 길이 등을 반영하기 위해 자신의 보폭을 기준으로 비율을 계산했죠.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바로 <강남대로> 연작입니다. 작가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 동안 강남대로를 거닐며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강남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정희우, “강남대로 557-594”, 2011
정희우, “강남대로 557-594”, 2011, 이미지 출처: 정희우 작가 공식 웹사이트

이 지도 그림에서 재밌는 점은 여러 시점(視點)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인데, 도로는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으로, 건물은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단면으로, 그리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과 도로 위 차들은 측면 또는 살짝 위쪽에서 사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시점이 적용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단에 위치한 거리에서는 사람이나 가로수, 건물이 마치 거꾸로 매달려 있듯이 뒤집혀있습니다. 이 그림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장소에서 그러진 풍경화일지 생각해봐도 특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희우 작가의 지도 프로젝트는 당시 강남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았음에도 작가만의 시점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있기에 실제와 가상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을 옮겨놓은 지도

박성환, “흩어짐의 자국 II”, 2017
박성환, “흩어짐의 자국 II”, 2017, 이미지 출처: 갤러리 도스 공식 블로그

정재철 작가와 정희우 작가는 지도 속에 작가의 흔적과 시선을 담아내며 지도의 의미를 확장했습니다. 자신만의 지도로 지역의 고유성이나 환경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기도 하고, 도시의 한 시점(時點)을 기록하기도 했죠.

이와 달리, 박성환 작가는 지도의 의미와 기능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버립니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인 이미지로서 지도를 활용합니다. 구불구불한 해안 경계선이나 반복적으로 원을 그린 등고선, 한반도 모양의 도형 등 지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작품 속에 등장하지만, 이것은 단지 지도에 활용되는 기호를 조합한 것이지 어떠한 지리정보를 나타내는 사회적 기호가 사용된 지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의 지도 이미지는 길을 찾기 위한 도구가 아닌, 작가의 의식 또는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에 더 가깝습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처럼 박성환의 지도에서 내면의 감정, 느낌 등의 추상적 요소를 가시화한 조각들은 화면을 불규칙하게 부유합니다. 지도는 본래 길을 찾기 위해 보는 이미지이지만, 박성환 작가의 지도는 작가 개인의 내면을 가시화한 것이기 때문에 목적지나 계획된 길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지도일 수 있겠죠. 어쩌면 작가의 지도는 정돈되지 않은 생각, 복잡한 마음을 가장 명확하게 시각화하고 있는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또, 자유롭게 표현된 기호들을 바탕으로 작가의 내면세계를 유추하고 각 기호가 내포하는 의미를 찾아가는 재미가 숨어 있습니다.

김봄, “하회마을”, 2022
김봄, “하회마을”, 2022, 이미지 출처: 김봄 작가 공식 웹사이트

한편, 김봄 작가는 지도를 “지리적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감각의 확장을 통해 풍경에 새로운 시각적, 공간적 차원을 부여하는 중요한 작업 도구”라고 설명합니다. 작가는 고지도(古地圖) 제작 방식을 차용해 도시의 풍경을 담아내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생활 모습, 지역의 특징, 과거 이야기까지 포함하고자 합니다. 김봄 작가의 작품은 사실적인 지형도에 기초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지역’을 담고 있습니다. 땅의 모양새를 뜻하는 지역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에서 주민들의 삶, 생활, 역사를 뜻하는 지역을 말이죠.

작가는 특정 지역을 여행하면서 직접 경험하고 본 것을 캔버스로 옮기는데, 여기서 자신의 체험이 자연스럽게 더해집니다. 지역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지도 속에 가미되는 것이죠. “경주”에서는 주요 문화유적지 외에도 새롭게 경주에서 부상하고 있는 관광명소와 콘텐츠, 한복을 입고 관광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려졌습니다. “하회마을” 속에도 다양한 관광객들의 모습이 담겨있죠. 고지도의 형식을 택하고 있지만, 동시에 현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봄 작가의 지도는 실제 지도와는 거리가 멀지만, 지금의 모습을 담고 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생생하게, 사실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네 명의 작가는 제각기 다른 표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지도를 창조하고 우리를 새로운 길, 새로운 목적지로 이끌고 있습니다. 조금은 낯선 곳에 도착하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장소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다가오기도 하죠. 때로는 작가의 발자취와 시선이 머물렀던 곳으로, 때로는 개인의 내면세계로, 가끔은 기억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안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길은 없습니다. 나만의 길, 내가 가고 싶은 목적지를 찾아 지도 형식의 작품을 감상해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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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비

막연히 마음속에 자리 잡은 예술을 나누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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