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참 이상합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싱그러움을 품고 찾아와서는, 자신을 얕봤다는 듯 뜨겁게 작열해 초여름의 오만을 반성하게 합니다. 한바탕 비를 쏟아낸 다음에는 축축한 여운과 함께 마지막을 알리죠. 얼른 지나가 버렸으면 싶었는데, 미묘하게 생기를 잃은 이파리들이 눈에 띄면 아쉬움에 이 계절을 붙잡아두고 싶어집니다. 꼭 우리의 성장통과 닮아있는 것 같아요. 이 때문일까요? 여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에는 누군가의 성장이 담겨있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올여름을 이대로 보내기 아쉽다면, 짙은 녹음 아래서 뜨거운 성장통을 앓고 있는 이들을 만나보세요.
<남색대문>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이 선명해질까?”
포스터 속에 낯익은 두 얼굴이 보입니다. 대만 배우 계륜미와 진백림의 데뷔작이기도 한 <남색대문>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세 청춘의 엇갈린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 남학생 시하오를 짝사랑하는 위에전에게는 둘도 없는 단짝 커로우가 있습니다. 시하오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위에전은 커로우에게 자신의 큐피드가 되어달라고 하죠. 위에전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커로우는, 내키진 않지만 그 부탁을 들어줍니다. 작전은 순조로웠습니다. 문제는 시하오의 마음에 위에전이 아닌 커로우가 들어서 버린 거죠. 이보다 지독한 삼각관계가 또 있을까요?
영화는 순수해서 일렁이는 그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화면으로부터 전해지는 습기와 온도는 대만 여름의 한 가운데 와있는 듯한 느낌을 주지요. 열일곱, 나조차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어 물음표만 가득했던 그 여름으로 돌아가 보세요.
<보희와 녹양>
“그냥 찾고 싶으니까 찾는 거지. 꼭 뭘 해야 돼요?”
포스터만 보고 소녀가 보희, 소년이 녹양이라 생각했다면 선입견의 덫에 걸린 겁니다. 영화는 당차고 저돌적인 소녀 녹양과, 여리고 소심한 소년 보희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날한시에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 다른 두 아이는,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하지만 누구보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지요. 이들의 모험은 보희가 어릴 적 떠난 아빠를 찾겠다고 가출을 하면서 시작됩니다. 고작 열다섯인 소년소녀는 낯선 어른들과 더 큰 세상을 마주하며 아빠에 대한 힌트를 얻어가는데요. 이 여정에서 나와 가족, 그리고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그들만의 답을 만들어갑니다.
보희와 녹양이라는 주인공들의 이름은 <A Boy and Sungreen>이라는 영제를 먼저 구상하고, 어감과 뜻에 어울리게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장하는 둘의 관계를 중심으로, ‘Sungreen’이 가득한 일상도 근사하게 그려냈지요. 초목의 푸르름과 햇살의 반짝거림을 머금은 이 영화를 통해 마음 한구석이 투명해지는 걸 느껴보세요.
<기쿠지로의 여름>
“엄마는 언제 찾아요? 쫌만 더 놀고 찾자!”
<보희와 녹양>이 아빠를 찾는 여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엄마 찾아 삼만 리입니다. 무료한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던 9살 마사오는, 멀리 돈 벌러 갔다는 엄마의 주소를 발견하고 무작정 여행길에 오릅니다. 어린 마사오가 걱정된 이웃집 아주머니는 자신의 한량 남편을 보호자로 동행시키는데요. 전직 야쿠자, 현직 백수인 이웃집 아저씨는 어쩐지 마사오보다 철이 덜 든 것 같습니다. 엄마 찾기는 뒷전이고 사고만 치는 아저씨는 마사오의 여행길에 방해만 되는 것 같지요. 과연 마사오는 무사히 엄마를 찾아갈 수 있을까요? 제목의 기쿠지로는 또 누구일까요?
9살 아이와 52살 어른의 유대를 코믹하지만 따뜻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OST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영화 전반에 흐르는 히사이시 조의 ‘Summer’는 두 사람의 유쾌한 여행에 싱그러움을 더합니다. 이들의 여정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웃다 보면, 그 끝에는 뭉근한 울림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여름’, ‘초록’, ‘청춘’, ‘성장’. 이들은 모두 풋풋하게 생동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태어나면 누구나 당연하게 경험하는 것들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여름에는 유난히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투영되는 것 같습니다. 올여름도 언젠가 돌아보면 그리운 한 계절이 될 테지요. 소개해 드린 영화에 지금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놓고, 시린 겨울에 다시금 꺼내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