빳빳한 엽서, 벽에 붙일 수 있는 포스터, 멋들어진 로고가 박힌 에코백까지. 전시를 보고 나오다 들린 기프트샵은 별천지 같다.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쁘네. 이건 선물하기 참 좋겠다.’ 하나 둘 손에 잡히는 상품들이 늘어나고, 결국 미술관 입장료 가격의 배가 넘는 전시 굿즈¹를 사고 나온 경험이 비단 필자만의 것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굿즈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더 소유욕을 자극하는 디자인과 패키지로 무장하고 있다.
방금 전시장에서 본 그림이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내 손 안에 들려있다. 원본의 아우라에 압도되었던 경험은 이미 반쯤 휘발되었다. 그리고 그 휘발된 공간 사이로 내가 소유하게 된 이 상품, 이 물건을 우리 집 어디에 두어야 가장 어울릴지에 대한 고민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다. 아우라가 제거된 예술이 개인의 질서에 맞추어 하나의 물신(fetish)이 된다. 그리고 그 물신은 개인의 인식 체계 안에서 또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다. 자본주의적 자아, 그 소우주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 굿즈: 특정 브랜드나 인물 등이 출시하는 기획 상품을 의미한다. 어원은 불명확하나, 과거 일본 아이돌 팬 문화를 지칭하던 단어가 명사로 굳어진 것이라 추정된다. ‘MD’라 칭하기도 하지만 본 글에서는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굿즈’를 사용했다.
굿즈 수집으로 시작하는 예술 애호
1) 도시인의 정체성, 수집가
그리고 이미 한 세기 전에 물신이 곧 개인의 정체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이 현상을 날카롭게 통찰해낸 철학자가 있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작품의 ‘아우라(aura)’ 개념을 제시했던 20세기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바로 그다.
발터 벤야민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저작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수집가(Der sammler)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대도시 파리와 파리지앵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는 당대의 수많은 자료를 집대성한 저작으로,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모더니티의 기원을 19세기 파리의 모습을 통해 찾고자 했다.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19세기 파리는 아케이드와 박람회로 가득한 자본주의의 환등상이었다.
번쩍거리며 군중을 물신으로 현혹하는 근대 도시를 파악하기 위해 벤야민은 파리의 모습이 담긴 다양한 사료를 수집하여 주제에 맞게 분류한다. 발터 벤야민이 파리라는 도시를 파악하기 위해 그러했던 것처럼 수집가는 적극적으로 도시와 그 도시가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환경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수집가는 이미 도시의 물신에 덮쳐진 인물이다. 수집가에게는 도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없다. 수집가는 파리의 끝없는 아케이드 속에서 헤매다 특정한 사물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사물을 소유함으로 전율을 느끼고,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시 수집품을 정리한다. 수집된 물건은 원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수집가의 체계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의미를 형성한다. 이것이 수집의 본질이다. 복잡한 대도시 환등상에서 개인적인 소우주를 창조하는 것, 더 깊숙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 상실된 자아를 상품의 백과사전으로 회복하는 것이 바로 수집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집의 체험은 벤야민이 바라본 19세기보다 21세기에 더욱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2) 새로운 예술 경험, 수집
이제 수집의 행위는 이제 예술 향유 방식에도 깊게 스며들었다. 기술 복제 시대가 도래하기 전 예술의 수집이 단순히 예술작품을 소유하는 것에서 그쳤다면, 21세기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 수집은 이제 원본 구매하는 것을 넘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가공, 재생산된 굿즈를 통해 대중화되고 있다. 원본이란 일종의 제의적 존재다. 원본이 가진 희소성과 현장성은 작품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개인적 수집 체계의 일부로 승화되는 데 장애가 된다.
예컨대, 지금 필자의 방에 붙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원무” 복제품은 살바도르 달리 엽서와 함께 콜라주 일부가 되었다. 만약 필자에게 마티스의 “원무” 원본이 있었다면 그 작품은 필자의 방이 아니라 방탄유리 안에 갇혀 어딘가 안전하게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곳에 넣어져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 그림을 전시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라는 주제로 다닥다닥 붙어있기보다는 어떤 그럴싸한 기준(현대 미술작품 모음이라든지 프랑스 작가선 같은 남들 보기 부끄럽지 않은 주제)을 가지고 전시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예술 작품의 원본은 단순한 상품을 넘어서는 강렬한 힘과 가치(그것이 진실한지를 차치하더라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원본의 복제품인 굿즈는 훨씬 가볍다. 굿즈는 신성하지 않다. 굿즈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의 기준에 맞추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을 덮쳤던 물신은 자본주의적 신격을 벗어던지고 개인 취향의 일부가 된다.
3) 복제 기술이 만들어 낸 예술 민주주의
굿즈 내에서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된다. 원본이 가진 정신성이나 의의는 현격히 옅어진다. 우리가 원본이 내포하는 심오한 가치를 전시 이후에도 즐기고자 한다면 아마 굿즈를 사는 것 보다는 도록이나 관련 서적을 구매하는 것이 아마 적절한 행보가 될 것이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액션페인팅이 인쇄된 머그컵 보다는 아마도 잭슨 폴록의 작품 세계를 다룬 서적 하나가 폴록의 작품 세계를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전시 굿즈를 사는 이유는 그 굿즈가 불러일으키는 미적 만족감과 전시회를 다녀온 추억의 매개물로서의 기능 때문일 것이다. 이는 예술이 우리의 삶과 개인적 취향의 일부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굿즈 안에서 예술은 더 이상 어렵지 않다. 사상과 정신성이라는 예술의 무거운 중심은 침전하고 그 위로 떠 오른 아름다운 이미지가 굿즈 위에 얹혀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이 그 이미지를 통해 예술이 지루하거나 어렵지만은 않다는 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최근 예술 거래 시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예술 작품이 가진 가치가 이제 하나의 투자 대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고가의 유명 작품일수록 더 판매시장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고가일수록 재판매가 가능한, 장차 가격이 더욱 오를 투자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 원본을 소장하는 것이 점점 예술 애호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시대가 오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한 번 굿즈로 예술 수집의 소우주를 창조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예술계의 현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장 자본주의적이라고 생각했던 전시 굿즈 시장이 오히려 자본에 소외된 자아를 회복하는 예술 애호의 길이 될 수도 있겠다.
- 김지윤-오현경, 도심형 세계유산도시에서의 도시 경험 연구: 종로의 사례를 중심으로, 세계유산도시온라인유스포럼, 2022
-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1, 새물결,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