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왔다. 잔뜩 추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시도 연말을 맞이할 단장으로 분주했다. 대형 백화점은 휘황찬란한 조명으로 제 몸을 감쌌고, 베란다에 트리를 내건 집이 늘었다. 뉴스는 조심스레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가능성을 점쳤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얼굴엔 완숙함과 새해의 희망이 동시에 비쳤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송년 행사는 줄었지만, 그밖의 풍경은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비 문인들의 연말도 마찬가지였다. 이맘때쯤 이들은 전화기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걸려오는 전화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혹시 자신이 기다리던 전화일까.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든다. 수화기 너머로 그토록 바라온 말이 들려오길, 마침내 오랜 꿈이 이뤄지길 고대하면서. 이들이 기다리는 전화는 신문사 문화부 담당 기자의 전화다. 그렇다.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다. 크리스마스 전후로 당선 연락이 안 오면 보통은 낙선이라는 뜻이다. 아쉬운 마음이 밀려온다. 작품들을 읽어보며 무엇이 문제였을까, 고민한다. 오탈자라도 발견하면 자신이 더없이 원망스러워진다. 하지만 크게 낙담할 필요도 없다. 신춘문예 공고는 내년에도 올라올 테니 말이다. 전통이 깊은, 튼튼한 등용문이다.
매일신보의 ‘현상모집’ 공고와 함께 탄생한 신춘문예는 올해로 110년 역사를 자랑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신춘문예는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문학계 담론을 이끄는 등단 통로로 기능해왔다. 유수한 문예지들이 생겨나고, 독립출판을 선택하는 작가가 늘어나는 와중에도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며 건재함을 드러냈다. 매년 많은 작가들을 웃게 했고, 더 많은 작가들을 울렸다. 신춘문예의 모집 대상은 소설과 시, 희곡, 평론 등이며 요즘에는 동화, 영화 시나리오 등 다양한 장르로 뻗어나가는 추세다. 상금은 100만 원에서 많게는 700만 원까지 책정된다. 하지만 상금보다 중요한 건 명예다. 등단을 하면 출판 담당자과 기성 문단 작가들, 독자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 적어도 문인에 한해서는, 시작이 반 이상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없다. 어떤 시스템이든 이게 최선이라고, 더 개선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순간 시스템은 고인다. 고인 건 반드시 썩는다. 신춘문예는 분명 장점이 많은 제도다.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부여하고, 이름을 가린 채 심사하기에 공정하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단점을 품고 있다. 그 문제점을 짚고 대안을 모색하는 건, 이 제도가 썩지 않고 유지되길 바라는 모든 작가 지망생의 숙제다. 『당선, 합격, 계급』에서 장강명은 문예지가 주관하는 장편소설 문학상에 한해 등단 제도의 문제점을 다뤘다. 그 논의를 바탕으로 신춘문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패기 넘치는 신인을 찾습니다
해마다 신문사들이 신춘문예 공고를 낼 때 반드시 넣는 문구가 있다. ‘패기 넘치는’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줄’ ‘참신한’ 신인을 찾는다는 문장이다. 애초에 신춘문예의 목적이 그런 신인을 찾기 위함이니,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신문사가 공고한대로 원하는 작품이 모이냐는 질문에는 ‘글쎄’다. 수상작이 전부 고만고만한, 판에 박힌 듯 보이는 까닭이다. 매년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작품들이 정형화돼 있다는 비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오죽하면 ‘문단문학이 따로 있다’는 말도 나올까.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당장 등단이 간절한 예비 문인들은 수상작들의 문법을 답습하며 자신의 작품을 틀 안으로 재단하려 든다. 이듬해에도 전년과 비슷한 작품들이 대거 몰리며 정형화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늘 새로움에 목말라 있는 신춘문예가 정형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선, 합격, 계급』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문학 공모전의 심사위원 중에는 ‘원로’라 불릴 만한 기성 작가들이 많다. 상식적인 일이다. ‘너가 뭔데 날 심사해’라는 말이 안 나오려면 어느 정도 검증된 작가여야 할 테고, 많은 작품을 꼼꼼히 읽고 심사해줄 시간적, 정신적 여유도 있어야 하겠다. 도덕적으로 결격 사유가 없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서른 개에 달하는 신문사에서 신춘문예를 주최하기에 심사위원 수요도 굉장히 높은 상황이다. 신문사는 결국 지난해 심사를 맡았던 작가에게 올해 심사도 맡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두 작가가 여러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겸임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취향과 주관의 비중이 높은 문학의 특성상, 같은 작가의 심사 아래에서 비슷한 느낌의 작품 선정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무엇이 패기 넘치는, 참신한 작품인가. 이 질문에도 모순이 담겨있다. 수십 년 동안 문단의 울타리 안에서 작품 활동을 해오던 심사위원들이 참신함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들도 한때 구태의 틀을 부수며 등단한 신인들이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그 말이, 다음 시대를 짊어질 작가를 알아볼 능력이 있다는 말과 같은 건 아니다. 참신함을 바라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이 있다. 장강명 또한 문학상 심사위원 르포에서 실험정신이 과하다며 작품 하나를 쳐냈다. 그 작품이 20년 30년 후 한국문학의 주류가 될지는 아무도, 적어도 기성 문인은 모르는 법이다. 신춘문예가 원하는 ‘패기 넘치는’ 신인이란, 참신하되 정해진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 로데오장의 황소와 같은 신인 아닐까.
유희열을 만나지 못한다면
단 한 편을 뽑는 신춘문예에 수백 편의 작품이 몰린다. 제일 노력이 많이 드는 단편소설 분야가 그 정도니 나머지 분야는 말 다했다. 한 명의 심사위원이 작품을 모두 훑을 순 없는 노릇. 심사위원들에게 작품을 배분하고, 각자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한두 편을 뽑아오는 식으로 예심을 거칠 수밖에 없다. 한겨례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장강명은 예심을 끝낸 뒤에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밝힌다. 자신이 탈락시킨 작품들 중에 더 뛰어난 작품이 있진 않았을까, 자신의 주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치진 않았을까 찜찜하다고 말한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들도 그런 마음을 쉽게 떨칠 수 없으리라 본다. 좋은 작품에 대한 합의된 기준은 없고, 작품을 선별하는 눈은 지극히 주관적인 탓이다.
K팝스타 시즌5는 괴물신인 안예은을 배출했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호평을 받았던 건 아니다. 방송 초창기에는 양현석과 박진영으로부터 “공감이 안 된다” “특별하지 않다”며 혹평을 받았다. 만약 K팝스타에도 예심 제도가 있고, 안예은이 유희열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영영 <홍연>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연을 쫓는 아이』를 쓴 할레드 호세이니는 문학성이 과대평가된 작품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꼽았다. 마찬가지로 미국에 한국식 등단 제도가 있고, 샐린저가 호세이니를 먼저 만났다면 우리는 영영 이 소설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 동안 얼마나 많은 안예은과 샐린저가 있는지 모른다. 잊힌 자들을 셀 방법은 없다.
등단도 운칠기삼의 영역일까. 장강명은 하나의 작품을 모든 공모전에 내라고 조언한다.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운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다만 더 많은 심사위원에게 작품을 내보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신춘문예는 그마저도 할 수 없다. 중복투고를 금지한 탓이다. 중복투고를 금지한 이유는 많지만 매년 신문사로 접수되는 작품의 양을 보면 금방 납득이 된다. 중복투고를 막지 않는다면 심사위원들은 수천 편의 작품을 심사해야 하고, 심사는 한 달로도 모자랄 것이다. 심사 기간을 좀 더 넉넉하게 잡고 심사위원 수를 늘리면 가능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대안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예본심을 통합하고, 작품당 최소 두 번의 심사를 받을 수 있게끔 구조를 개편한 곳도 있다고 들었다. 응모자들의 불안을 없애기에 충분한진 모르지만 말이다.
등단한 곳에 낙원은 없다
문단 미아라는 말이 있다. 신춘 고아라는 말도 있다. 등단은 했지만 원고 청탁도 못 받고 한때만 빛났던 샛별로 사그라든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장편소설로 등단을 했다면 그나마 제 이름의 단행본이라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한다. 뛰어난 작가들이 꾸준히 문단에 유입되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작가들이 문단을 떠난다. 등단 작가 중 글쓰기로 밥벌이하는 작가가 절반도 안 된다(한국일보, 2014)고 하니, 등단의 낭만이 지나치게 과장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입사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을 웃도는데 퇴사율이 절반에 달한다면 채용 제도가 아닌 회사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혹은 입사에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로도 충분하다는 뜻이거나. 많은 사람들이 등단을 시작이 아닌 끝으로 일부가 아닌 전부로 인식하는 건, 그래서 등단이 이토록 과분한 지위를 누리게 된 건 문학장이 신인들을 제대로 배양해낼 수 없는 불모지가 돼버린 까닭 아닐까.
불모지가 됐다는 말은 장강명의 말을 빌리면 ‘내부 사다리’가 부실하다는 말이다. 등단을 한 뒤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독자들의 인정을 받고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나는 경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등단을 해도 반짝 주목을 받고 끝나거나, 그마저의 관심도 못 받으니 등단 작가들은 다시 공모전으로 눈을 돌린다. 그렇게 지망생과 작가, 등단과 재등단이 어지럽게 맞물리며 등용문은 더욱 좁아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등단 제도의 권위는 커지고 신인들이 설자리는 줄어들게 된다. 내부 사다리가 부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층이 얇기 때문이다. 출판 시장의 파이 자체가 너무 적다. 몇 안 되는 독자를 붙잡기 위해 눈에 띄는 등단 타이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 현재 문학시장은 극소수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총판매량의 대부분을 독차지하는 구조라고 한다. 등단한 곳에도 낙원은 없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등단 제도는 독창적인 작품을 모으고 참신한 신인을 발굴하기엔 다소 부족한 제도였다. 문단이 무풍지대에 빠지고, 문학시장에 새로운 흐름이 유입되지 않으면 독서인구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다. 오늘날 특정 장르의 문학이 서점 매대를 독점하는 건 독자들이 그런 걸 원해서일까 혹은 그런 걸 원하는 독자들만이 남아서일까. 신춘문예가 다시 새로운 문학 트렌드를 선도하는 연례 행사로, 진정한 신인들의 축제로 거듭나기 위할 방법은 없을까.
독자들의 문예운동
뚜렷한 해결책은 없다. 있긴 한데 상투적이다. 너무 상투적이어서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무의미하게 들릴 정도다. 그 방법이란 독자를 늘려, 출판시장의 파이를 늘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독서보다 재밌는 건 꾸준히 세상에 나올 테고, 독서인구는 더 줄어들 게 분명하다. 장강명은 대신 독자들에게 문예운동을 벌일 것을 주문한다. 거창한 건 아니고, 읽은 책에 대해 솔직한 평을 남겨달라는 부탁이다. 독자들은 정보가 부족해 베스트셀러에 의존하게 되고, 작가들은 단행본을 내도 반응해주는 이들이 없어서 다시 등단을 노린다. 서평을 올리는 독자들이 많아진다면 그런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로써 작가 지망생들의 축제로부터 출발한 논의는 또다시 독자들의 숙제에 닿았다. 오늘 무슨 책을 읽었는가. 그 책은 읽을 만한가, 전혀 그렇지 않은가. 그런 생각들을 다른 사람 앞에 내어보이는 건 어떤가. 독자들을 위해, 작가들을 위해 말이다.
-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민음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