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9일, 한글날이 576돌을 맞았다. 세계의 어떤 글자와 견주어도 그 우수성을 빛내는 한글은 우리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한글이 세기의 발명품으로 평가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스물네 글자만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해낼 수 있는 소리글자¹라는 점이 가장 특징적이다. 처음 접하는 언어도 들리는 그대로 받아 적을 수 있고, 이를 제삼자가 읽었을 때 원음에 가깝게 발음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 글자의 특성이 오히려 우리말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 소리글자: 글자 하나하나에 뜻이 들어있는 뜻글자(표의문자)와는 달리, 어떠한 음의 실체를 표현해 주는 문자를 말한다. 표음문자라고도 한다.
한글의 탈을 쓴 외국어
“롱한 기장감으로 레그라인이 돋보이는 팬츠예요. 아더 컬러도 리오더 예정이니 굿 초이스하세요.”
한글로 쓰였을 뿐 영어 표현으로 가득한 이 문장은 인터넷쇼핑을 즐겨 하는 사람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더 컬러’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직관적으로 뜻이 와닿지도 않고, 한국어 표현인 ‘다른 색깔’과 음절 차이도 나지 않아 굳이 바꾸어 쓸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도 어긋나 있어 한층 더 괴이하다.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어나더 컬러(another color)’나 ‘아더 컬러즈(other colors)’라고 해야 맞다. 패션업계에서는 ‘아더 컬러’가 이전부터 널리 쓰여 온 업계 용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비자의 눈에 잘 띄지 않다가 최근 1~2년 새 부쩍 존재감을 드러낸 것을 보면, 외국어가 만연해진 사회적 분위기와 맞닿은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비단 패션업계만의 동향은 아니다. 요즘 신축 아파트의 이름을 보면 각종 영단어가 혼재되어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학군이 좋으면 ‘에듀’, 주변에 강이나 호수가 있으면 ‘리버’와 ‘레이크’, 숲 근처면 ‘포레’ 등 해당 단지의 가치를 내세우기 위한 이름 짓기가 대세다. 건설사들 또한 고급화 전략으로 ‘써밋’, ‘아크로’, ‘오티에르’와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담아내려다 보니 아파트 이름만 열 글자가 훌쩍 넘어서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도 애를 쓰지 않고는 기억하기 어렵다. 택시에 탄 노년의 손님이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설명한다고 상상해 보면 그 심각성이 와닿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어떻게 외국어가 이토록 깊숙이 우리 삶에 들어왔을까. 서문에서 언급했듯 소리글자라는 한글의 특성이 주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의 한자는 한글과 달리 뜻글자이기 때문에 외국어를 온전히 자국의 글자로 표현하기 어렵다. 대신 비슷한 소리나 뜻을 가진 글자를 조합하여 새로운 단어를 창조한다. 스타벅스는 별 성(星)자를 따서 ‘싱바커(星巴克)’, 버거킹은 햄버거 왕이라는 뜻의 ‘한바오왕(汉堡王)’으로 탈바꿈된다. 이렇게 바뀐 이름은 현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들의 언어와 글자를 지키는 데에 유의미한 도구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어에 투영된 욕망과 환상
한글로 쓰였거나 한국어 병행 표기가 있다면 양호한 편이다. 요즘 소위 ‘핫플’로 불리는 거리의 이국 음식점에는 외국어로만 쓰인 메뉴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유명 카페에서는 미숫가루를 ‘M.S.G.R’로 표기해 대중의 뭇매를 맞았다. 패스트푸드점에 우후죽순 등장한 키오스크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beverage’, ‘take out’과 같은 영어를 모르면 주문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국립국어원이 성인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0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외래어와 외국어를 사용하는 이유로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서’(41.2%),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능력 있어 보여서’(22.9%), ‘우리말보다 세련된 느낌이 있기 때문’(15.7%)이 각각 1, 2, 3위를 차지했다. 결국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다.
낯선 말에 대한 신선함은 고급스러움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소수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높은 지적 수준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도 일부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있어 보여야’ 잘 팔리는 제품군이라면 외국어 표현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타당하다.
하지만 과도한 외국어 남발은 오히려 그 이면에 감춰진 초라함이 무엇일지 궁금하게 만든다. 외국어라는 장막을 걷어내고도 실재하는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어쭙잖게 영어를 섞어 말하는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외국어 남용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는 만큼, 의식 없이 외국어를 사용했다가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잃은 소중함
외국어가 몸집을 부풀려 가면서 한국어와 한글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한글이 적힌 옷은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찾기 어렵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오락 소재에 그친다. 거리 또한 외국어로 도배되어 있다. 영어는 기본이요, 중국어와 일본어로만 쓰인 간판도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한글명은 그 옆에 각주만큼 작은 크기로 쓰여있다. 독자적인 언어와 글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자국의 글자로 먼저 적고, 외국인을 위해 다른 글자를 병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른 글자를 크게 적고 우리 글자는 곁들이듯 작게 적어 놓는 것은 외국인이 보기에도 이상할 일이다.
한글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해 기피하는 점은 한국인의 이상한 모순 같다. 종로구의 한글 간판들이 우리에게 생경한 울림을 가져다준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외국어 명칭을 한글로 표기한 것에 그쳤지만, 이조차도 아름답고 새롭다는 반응이 많았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최후의 방어선, 공공언어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어를 앞다투어 배웠으며, 한자보다 영어를 친숙하게 느끼는 세대다. 위 세대가 한자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듯, 이들이 영어나 제2외국어를 혼용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언어와 글자의 존재 의의는 ‘소통’의 목적에 있다. 아무리 떠들어도 청자가 이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면 언어가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1%에 그치지만, 외국어 능력에 따라 정보 격차가 벌어진다면 또 다른 문맹이 생기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잘 사용하는 것은, 다른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글문화연대가 국민 1만107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외국어 표현에 대한 일반 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총 3500개의 단어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이해도는 100점 만점에 평균 61.8점으로 집계됐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10개 중 6개 정도만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코로나 시대의 필수 도구로 자리 잡은 ‘QR코드’에 대한 70대 이상의 이해도가 0.0%였던 것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한글날을 맞아 정부가 공공언어²에서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을 줄이고,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나가겠다고 공언한 것은 응원할만하다. 이미 범람해 온 외국어를 다시 걷어내기는 어렵더라도, 공공의 영역에서는 소외되는 이 없이 누구나 평등한 정보를 누릴 수 있도록 울타리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는 보건 복지 서비스의 주요 대상이 고령자나 저소득, 저학력자라는 점에서 그 필요성이 두드러진다.
- 공공언어: 국가 경영과 사회 복리, 국민 생활 등 공익과 관련된 일을 다루면서 많은 이에게 두루 전해질 것을 전제하고 공개적으로 쓰는 말이다. 언론은 대체로 소유주가 민간이지만 공공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을 민간에게 전달하는 일을 맡으므로 공공언어를 많이 사용한다.
비영리 사단법인 ‘피치마켓’에서는 느린 학습자를 위한 책과 문서를 만든다. 발달장애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장과 어휘, 삽화와 보조 자료를 활용해 선거공약집이나 코로나19 예방 책자, 소설 등을 재편집하여 발간하고 있다. 정보 격차를 줄이는 것이 참정과 안전, 나아가 인권과도 직결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글문화연대’에서도 ‘쉬운 우리말을 쓰자’라는 누리집을 통해 공공언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외국어 대신 우리말을 사용하고 싶은데 마땅한 대응 언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참고하면 좋을 곳이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사회에 자연스레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를 유난스럽게 여기거나 조롱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필자도 이 글을 쓰는데 의식적으로 한자와 영어 표현을 삼가고자 했으나,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만 깨닫고 지키지 못했다. 일정 시간 동안 외국어와 외래어를 쓰지 않는 ‘훈민정음 게임’이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들은 인간의 지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습득했을 때 타인과 구별되는 경쟁력이 된다. 그러나 이를 쉬운 언어로 나누고 대화할 때 생겨나는 파장은, 혼자 간직해 온 것보다 단단하고 풍부할 것이다. ‘아더 컬러’의 등장에 자취를 감추고 있는 ‘다른 색깔’이 만인의 언어로 오래 살아남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문화체육관광부/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외국어 표현에 대한 일반 국민 인식조사, 2020
- 국립국어원,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 2020
-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쉬운 우리말을 쓰자-공공언어란?, 2021
- 매일경제, MSGR이 미숫가루라고?…핫플 징표인듯 메뉴판에 온통 영어 ‘심각’,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