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자격은 누가 정하는가
‘작가’는 어떤 존재인가? 국어 사전은 아주 건조하게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라 말할 따름이다. 사전적 의미대로라면 무언가 창작하는 사람은 작가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각본가, 사진사, 만화가, 화가 등.. 결이 조금씩 다른 말들이 있지만 모두는 작가다. 결국 작가란 만드는 사람이다.
만드는 이 모두를 작가라 부른다면, ‘작가의 자격’은 누가 정하는가? 단행본을 내는 것? 전시를 여는 것? 입상을 하고 ‘등단’한 사람? 그렇게 해낸 이를 응당 자격을 갖춘 ‘작가’라 부른다면 나머지는 ‘작가다운 작가’가 되지 못한 것인가?
나는 꽤 오랜 기간동안 스스로 ‘작가’라 부르기를 부끄럽다고 느꼈다. 그때는 스스로 ‘작가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단행본을 내거나 등단하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틈틈이 글을 쓰다 운이 닿아 출간 기회를 만나게 되었지만, 책을 쓰면서도 여전히 스스로 ‘작가라 참칭’하기는 부끄러웠다. 그때 스스로 ‘아직 작가에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로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짭가’라 부르고는 했다. 물론 운이 닿아 나는 단행본 하나를 끝냈다. 이제 나는 작가가 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짭가’라 부르던 시절에도 작가였고, 지금도 작가라고 생각한다. 단지 예전에는 그 이유를 자각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나는 아직 스스로 느끼기에 ‘좋은 작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아무튼 나는 작가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이 만든 창작물을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자뭇 진정성을 갖추려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작가란 객관적인 지표만으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믿는다. 작가를 따지는 최소 기준은 (다시 사전 상 의미로 돌아가) 무엇을 만드는 이는 누구나 작가라는 것이고, ‘자신이 짭가인지 작가인지’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은 진정성에 대한 주관적 판단일 따름이다.
구태여 작가의 자격에 대해 논하는 까닭은 ‘작가의 자격’을 객관적으로 따지려는 사고의 위험성 때문이다. 특히 ‘등단할만한 문장력’이 작가의 자격을 따지는 기준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물론 누군가는 문장력이 모자랄 수 있고 그 실력의 차이는 분명히 있겠다. 하지만 그 차이가 새롭게 등장한 작가들이 위계상 ‘못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작가의 자격을 따지려는 사고는 (과거 나처럼) 시대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아무나 작가일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새로운 창작환경에서 작가의 자격은 객관적 지표에 따른 비교가 아니어야 하며, 그로 인해 만들어진 위계상 우열이어서도 안될 것이다. 과거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 시대가 되었기에 그러한가?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없던 시대의
작가가 된다는 것
물리적인 종이 매체가 유일한 읽을 거리인 시절이 있었다. 지면은 한정되어 있기에 이곳에 실을 텍스트는 아무에게나 허락될 수 없었다. 지면에 글을 쓰는 이들은 응당 탁월한 문장력과 사유가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작가의 자격’을 갖춘 이로 모자람이 없어야 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을 찾아야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그들을 찾을 가장 좋은 방법은 정례적이고 공식화된 ‘시험’이었다. 등단 시스템의 탄생이었다. 이러한 등단 시스템은 근대 이전 공개적인 글쓰기 시험인 과거 시험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자격은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시험과 평가를 통해 발견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평가자도 ‘급’이 되어야 했다. 등단 시스템에서 평가자들은 ‘소중한 지면’에 속한 관계자들, 그 평가를 통과하고 ‘급제한’ 선배 문인들, 지면이 모셔온 명망가들이었다. 지면을 읽는 대부분의 이들은 지면을 사고, 읽는 존재일 뿐 평가자도 쓰는 이도 아니었다. 지면은 그만큼 숭고하고 쓰는 이에게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아무나 작가를 참칭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과거 급제의 꿈처럼 등단 입상은 지면과 종이에 자신의 글을 싣고자 하는 이들, 작가 지망생들이 마땅히 지나야 할 관문이었다. 등단만이 작가가 되는 유일한 길은 아니었지만 다른 길도 쉽지 않았다. 소설가 김훈처럼 이미 입사 시험을 통과하고 현장에서 검증된 기자 출신들이나, ‘항소 사유서’의 작가 유시민처럼 시국 선언문에서 강력한 대중적 인상을 남긴 극히 소수들만이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생원들이 스승이 세운 서원에 모이듯, 작가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배우고 익히기 위해 기성 작가의 문하생이 되는 것이었다. 아직 작가가 되지 못한 이들, ‘문청’이었다. (문청은 ‘문학을 좋아하고 문학 작품의 창작에 뜻이 있는 청년. 또는 문학적 분위기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청년’을 의미한다. 우리말샘 참조.) 문청들은 무림의 문파 마냥 누구 아래에서 배운 누구, 어디에서 등단한 누구라는 출신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지극히 낮은 등단 가능성을 통과한 문청들은 작가로 거듭났고, 그들은 특별한 이들이 모인(그러나 좁고 폐쇄적인) ‘문단’을 형성했다. 작가들, 쓰는 이들은 읽는 이와는 구분되는 이들이었다. 그렇다. 아무나 감히 작가를 참칭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종이 매체에 대한 영향력이 더 크던, 인터넷 이전 시대에도 간행물의 절대량은 2010년대에 비하면 확연히 적었다. (한국의 경우, 전체 정기 간행물 발행부수 통계 수집이 시작된 시기는 1997년부터다.) 매년 갱신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정기간행물 현황 등록일람표」에 따르면 등록된 정기 간행물은 1997년에는 7,468건이었고, 2019년에는 21,781건이었다. 인터넷에만 발행되는 전자간행물을 빼도 지금 발행되는 지면이 더 많다. (매년 대한출판문화 협회가 제공하는 「출판산업 정기 동향」에 따르면 정기 간행물 뿐만 아니라 단행본의 절대 발행량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97년이 이러할진대, 90년대 이전에는 지면이 더욱 적었을 것이다. 그 시절엔 교수나 학위를 보유한 학자 정도는 되어야 전문서적을 썼고, 정치인이나 기업인 등 어느 영역의 명망가들만이 책을 냈고 지면에 글을 썼다. 그것도 아니라면 오직 ‘자격을 갖춘 작가’만이 글을 쓰고 발표할 권능이 주어졌다.
‘아무나 쓸 수 없는 시대’인 80년대초 상고 나온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배우지 않고도’ 잘 쓸 수 있었다. 노동자인 그가 쓴 시는 어떤 시인의 시보다도 당사자의 삶을 가장 잘 투영해냈다. 그렇기에 84년 박노해가 내놓은 시집 『노동의 새벽』은 출간되자마자 당대 문제작이자 금지작이 되었다.
하지만 작가로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안으로부터 열지 않으면’ 작가의 문은 밖에서 쉽사리 열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노해가 83년에 데뷔한 책 『시외 경제』 는 같은 이름의 동인으로부터 출발했고, 그들은 ‘작가의 자격을 갖춘 배운 사람’들이었다. (해당 동인의 탄생은 이른바 “시와 삶의 거리를 없애자”는 시인들의 현실참여적인 문학 운동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시인 박노해의 등장이 가진 의의는 적지 않다. 자신의 정체성을 잘 담아낸 이가 좋은 작가가 될 가능성은 그 시대에도 있었으니까.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없는 시대에도, 누구나 작가가 될 가능성은 태동하고 있었다.
화면의 시대 개막,
기성 출판 구조 밖 새로운 작가들
통신기술이 발달하며 물리적 지면이 텍스트(및 콘텐츠)를 보는 유일한 창구였던 시대는 종언을 맞이했다. 이어서 인터넷이 연결되고 상호간 소통하는 ‘화면’의 시대가 열렸다. 화면의 시대에는 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창구가 늘었다. 이는 지면 발행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는데, 등단 시스템말고도 좋은 작가를 찾아낼 새로운 루트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상업성을 갖춘 작품의 다양성이 증가했음은 물론이다. 90년대 후반 PC 통신 시절에는 한국 판타지 소설의 명인 이영도가 등장했다. 그는 대단한 실력을 갖춘 이였지만, 신춘문예에는 지원한 적도 없었다. 그의 작품은 단행본이 되었지만, 작가로서 데뷔는 명백히 지면이 아닌 화면(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그 무렵 이영도를 필두로 대체할 수 없는 개성을 가진 여러 작가들이 웹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2000년대 초에는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 <조아라>가 태동했다. 등단만이 작가가 되는 유일한 길은 아니게 된 것이다. 또한 웹에서 발표된 글들은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고, 드물지만 영상화되기도 했다. 30대 중반에 웹소설을 쓰기 시작한 윤이수 작가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윤이수의 2013년 작 ‘구르미 그린 달빛’은 웹소설로도 드라마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제 영상은 콘텐츠의 상수가 됐다. 오늘날 작가의 글은 ‘IP’(Intellectual Property : 지적재산, 여기에서는 다른 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는 원천 이야기를 의미)로 인식되고 있다.
90년대말 PC통신의 이영도와 2010년대초 웹소설의 윤이수 데뷔에는 10년의 시차가 있다. 다만 그들의 등장과 그들이 남긴 성취의 의의는 크게 다르지 않은듯 하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화면’의 시대에는 등단 시스템 밖에서도 ‘누구나’ 작가가 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등단 밖에서도 등단과 결은 다르지만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한편 이영도와 윤이수의 길에는 함께 달리는 무수한 작가들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물론 등단의 등용문이 닫힌 것이 아니었다. 그저 등단 밖 다른 길이 열렸을 따름이었다. 격이 다르지 않은, 그저 결이 다른 길이.
한편 2010년대 이전까지 인터넷 환경은 텍스트를 넘어 개인 단위의 사진과 영상 정보를 수용/연결할만한 플랫폼을 구현하기에는 무리였다. 데이터가 오가는 길이 좁았고(회선의 대역폭이 작았고), 속도는 느렸다. 많은 데이터를 선별하고 알맞게 처리하는 알고리즘 기술도 모자랐다. 때문에 지면이 유일한 정보의 매개였던 시대에 비해 나아졌지만, 여전히 화면 내 콘텐츠의 공급은 ‘파레토 법칙’(‘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을 따랐다. 보다 쉽게 말해 잘팔리고 주목받는 소수 콘텐츠 20%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주목받는 콘텐츠가 되지 못한 것이다. 콘텐츠가 동일하게 일괄공급된다는 점에서 지면이나 포털의 메인이나 한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술 발달이 촉발한 개인의 시대,
작가의 정체성과 캐릭터가 주목받다.
2010년대 SNS 플랫폼과 유튜브와 같은 뉴미디어의 대두는 더 많은 ‘개인’들이 자신을 자각하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지면과 화면의 스포트라이트 밖 간과되던 ‘나머지’에도 불빛이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기술 발달의 덕이었다. 데이터가 오가는 길이 넓어지고 속도는 빨라졌으며, AI 기술의 발달은 개별 선호와 취향에 대응하는 맞춤형 알고리즘을 구현해냈다. 플랫폼 위에서 텍스트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그 무엇으로든 개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이제서야 우리는 개인 단위의 정체성과 그 이야기에 도달가능하게 됐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양성과 시장성이 양립할 수 있는 최초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이 대두한 화면의 시대에 지면(간행물)은 보다 풍성해졌다. 웹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개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과 대상에 기꺼이 돈을 썼다. 필요해서 산다기보다는 그것을 원해서 사는 것이 아니었을까. 앞서 인용한 「2019 출판산업 정기 동향」에 따르면 발행 실적이 있는 전체 출판사 중 1~5종 이내를 발행한 출판사가 75.2%이며, 1종을 발행한 출판사는 40.3%에 달한다. 이러한 변화는 2015년 이래 거의 변화하지 않는 비율이다. 사실상 ISBN(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 국제표준도서번호) 코드를 담은 독립출간물이 아닐까 한다.
이 시대에는 그 작품 못지 않게 ‘그 작품을 쓴 이가 어떠한 존재인가?’ 라는 물음이 중요해졌다. ‘그 사람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냐’는 것이다. 에세이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에서 백세희 작가는 그저 담담히 정신과 진료를 받는 자신의 이야기를 적었다. 『경찰관 속으로』에서 젊은 여자 경찰관 원도는 자신이 마주한 사건과 그 감상을 적었다. 등단할 만한 문장력은 작가의 본질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글씨를 잘 적지 못해도 괜찮았다. 『할머니의 레시피』에서 최윤건 할머니는 30가지 레시피를 적었고 손녀는 그림을 그렸다. 언급한 작품들은 처음에는 개인이 출간한 독립출간이었지만 이내 정식 출판이 되고 출판시장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SNS와 뉴미디어 상에서 스스로 두각을 드러낸 작가 이슬아는 특유의 캐릭터, 꾸준히 발행한 좋은 글로 사랑받았고, ‘주류 미디어’에도 진출한 인사가 됐다. 북튜버 김겨울은 작가로, 라디오 DJ로 활동하고, 특유의 감성과 이미지를 가진 작가 유지혜는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좋은 글들을 썼다. 그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팬덤과 씬(어떤 영역의 사람들)은 텍스트와 사진, 영상이 결합된 그들의 캐릭터를 분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개인들에게 그들은 작가이전에 우리가 자신을 투영하고 사랑할만한 ‘개인’이기도 했다.
누구나 작가의 시대,
죽지 않는 좋은 창작과 되묻는 작가의 자격
만드는 이와 소비하는 이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을 프로슈머(prosumer)라 한다. 이러한 경향은 전 산업에 확산되고 있다. 창작도 예외일 수 없다. 지면의 시대, 창작과 소비 사이에는 절단면이 있었다. 화면의 시대, 이제 경계는 무너지다 못해 흐릿한 그러데이션이 되었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라면, 아무나 작가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혹자는 ‘작가다운 작가’가 사라지는 게 아닌지 우려할 것이다. 또 이러한 환경에서 작가주의¹⁾는 빛을 잃는다며 개탄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누구나 작가가 되는 시대는 작가다운 작가의 위기도, 작가주의의 위기도 아니다. 단언하건대 무언가를 만들어본 사람은 만든 이의 노고와 성취를 더 잘 알게 된다. 취미로 요리를 해 본 사람은 자신 앞에 높인 요리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어떠한 맛인지 먹어보기만 한 이보다 잘 알고 있다. 부족한 글일지언정 써본 사람은 더 좋은 글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런 이가 탁월한 작품을 만난다면, 작가의 노고와 성취에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창작이 많아지는 것이 좋은 창작이 적어지는 것도, 그 수요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쉽게 책을 내는 시대, 책이 비싼 명함이 된 시대, 자조적으로는 아무나 책을 내고 글을 쓰는 시대에도 좋은 글은 보다 생명력을 가진다고 믿는다. 인스타그램, 브런치에서 아직 미숙한 글을 쓰는 이들이 ‘작가’를 참칭하는 것이 불편한가? 그들은 언제든 좋은 창작을 기꺼이 소비할 이들이다. 진정성있는 창작자에게 그들은 고마운 사람들이다. 시장성을 떠나서 문화 민주주의에도 좋은 일이다. 대중 예술의 시작이 메세나(창작자에 대한 지원)의 특권을 귀족으로부터 대중에게로 분산시킨 것이라면, 그 궁극은 만드는 것의 기쁨이 모두의 권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묻는다. ‘작가’는 어떤 존재인가?
작가의 한자(作家)를 직역하면 작가란 ‘집을 짓는 사람’이다. 문장을 짓든, 무엇을 짓든 구상을 하고 재료를 고르고 쌓고 만드는 사람들이다. 어느 영역에서 일가를 일구어 가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나는 작가였다. 물론 ‘짭가’이던 시절이든 작가를 참칭하는 지금이든, 아직 나는 좋은 작가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른 누구의 평가가 아닌 나 자신의 양심을 따른 것이다.
그저 계속 써볼 일이다. 누군가 당신은 좋은 작가인가 물었을 때, 언젠가 “나는 좋은 작가입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믿는다. 그래서 지금은 ‘자랑할 것은 없지만 부끄럽고 싶지 않은 나의 길’²⁾ 위에 서있다 말할 따름이다.
- 작가주의作家主義 :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들 때, 그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특성이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데에 중점을 두는 창작 태도. 본래 영화 비평에서 가장 먼저 쓰이기 시작한용어로 최근에는 문학 등의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종종 사용된다. _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 중, 2021.03.09
- 신해철의 1991년 솔로 1집 <Myself> ‘길 위에서’ 가사 중
- 김필균, 『문학하는 마음』, 제철소(2019), p. 198 – p. 223
- 대한출판문화 협회, 「2019 출판산업 정기 동향」,(2020), p. 24
- 대한출판문화 협회, 「2019 출판산업 정기 동향」,(2020) p. 71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KIPIPA 출판산업 동향(2018 하반기)』 , p. 54
- E-나라지표 중 2019년까지 문화체육관광부의 「정기간행물 현황 등록일람표」,(202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