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은밀한 이면
브라사이의 우연한 순간들

예술과 고독 그리고
낭만이 흐르는 파리의 초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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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살이 1년 5개월 차인 필자에게는 이맘때쯤이면 한 가지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파리의 우중충한 겨울밤입니다. 파리의 겨울은 온종일 잿빛으로 물든 하늘과 축축한 공기, 스산한 바람이 도시를 온통 흑백사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태양은 열두 시간도 채 머물지 않고, 그저 흐릿한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죠. 사계절의 순환을 겪고 나서야 파리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달콤한 파스텔톤의 낭만적인 풍경만을 파리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있다면, 한 흑백사진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축축한 도시, 안개 속에 잠긴 다리, 인적이 드문 가로등 아래, 초라한 클럽 한구석에서 파리의 밤을 시처럼 기록한 사진작가 브라사이(Brassaï)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진 중에 억지로 연출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파리의 눈’이라고도 불린 브라사이가 포착한 은밀하고 고독하지만 낭만이 흐르는 20세기 초 파리로 초대합니다.


20세기 초 예술가들의 성지,
몽파르나스

브라사이, “조각상을 들고 있는 피카소(Picasso Tenant Une De Les Sculptures)”, 1939
브라사이, “조각상을 들고 있는 피카소(Picasso Tenant Une De Les Sculptures)”, 1939

20세기 초 몽파르나스는 파리의 예술적 심장부로, 전 세계 모든 보헤미안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예술의 꽃을 피웠습니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달리, 샤갈, 헤밍웨이 등 근대 예술사의 한 획을 그었던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있었지요. 몽파르나스는 단순한 예술가들의 집결지가 아니라, 새로운 사조가 태동하고 발전하는 실험적 공간이었습니다. 브라사이 역시 몽파르나스의 흐름에 깊이 스며들었던 예술가였습니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몽파르나스의 독특한 분위기와 보헤미안적 삶을 렌즈에 담아냈습니다. 특히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눈 예술가 중 한 명은 ‘파블로 피카소’입니다. 피카소는 스페인 출생이지만 명예 프랑스인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프랑스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예술 활동을 했지요.

두 사람은 1932년에 처음 만나면서 깊은 우정을 쌓아갔습니다. 브라사이는 피카소의 작업실과 조각 작품을 처음으로 촬영한 사진작가였으며, 피카소는 브라사이가 자기 작품을 독창적으로 포착하는 능력이 있다며 높이 평가했습니다. 브라사이의 사진집 『피카소의 조각들』은 이들의 시너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서로 예술적 탐구를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우정도 이어갔습니다.

브라사이, “화가를 흉내 내는 피카소 (Picasso mime l’artiste peintre)”, 1944
브라사이, “화가를 흉내 내는 피카소 (Picasso mime l’artiste peintre)”, 1944

브라사이가 쓴 『피카소와의 대화』에서 피카소는 창의성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렇게 말합니다. 브라사이가 아이디어가 우연히 떠오르는지, 계획된 것인지 묻자,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이디어는 단지 출발점일 뿐입니다. 작업을 시작하면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르죠.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을 포착하는 것이 내 아이디어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계획한 것보다 우연을 통해 얻은 결과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피카소의 창의적 신념이 느껴집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나타났을 때 이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쉽게 말해, 우연을 마주쳤을 때 ‘오히려 좋아!’를 외칠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라고나 할까요.


몽환의 밤,
파리의 초현실적 순간들

브라사이, “안개 속의 Observatoire 거리 (Avenue de l'Observatoire dans le brouillard)”, 1937
브라사이, “안개 속의 Observatoire 거리 (Avenue de l’Observatoire dans le brouillard)”, 1937

브라사이 사진의 매력은 밤을 포착했을 때 두드러집니다. 그의 사진집 『밤의 파리(Paris de Nuit)』에서는 은은한 가로등 불빛 아래 도시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빛의 조화를 포착하며, 파리의 몽환적인 풍경을 보여줍니다. 그는 파리를 단순한 관광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도시의 고요한 순간들을 기록합니다. 가로등 불빛이 안개 속에서 부드럽게 퍼지며 도시의 고요함을 강조하고, 나뭇가지와 벤치의 실루엣이 불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차에서 비추는 헤드라이트는 어둠을 가르고 빛의 경계를 명확히 하면서도,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 전체적인 이미지에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줍니다. 브라사이의 렌즈에 담긴 파리의 겨울 밤은 낭만보다는 사뭇 스산함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듯 하죠.

브라사이, "안개 속의 모리스 기둥 (La Colonne Morris dans le Brouillard)”, 1932
브라사이, “안개 속의 모리스 기둥 (La Colonne Morris dans le Brouillard)”, 1932

“안개 속의 모리스 기둥 (La Colonne Morris dans le Brouillard)”은 1930년대 파리의 밤거리를 포착한 대표적인 사진 중 하나로, 어둠이 내린 도시의 고독함이 잘 드러납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퍼지며, 인적이 드문 거리에 서있는 광고 키오스크와 한 남자가 고독해 보입니다. 브라사이가 포착한 안개 낀 파리의 밤은 서정적이면서도 유난히 고독합니다. 어두운 거리, 불길한 듯한 조명, 그리고 도시의 공허함이 조화를 이루며 파리의 낭만적이면서도 쓸쓸한 밤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리의 은밀한 밤,
예술과 기록의 경계를 허물다

브라사이, "셰 수지, 소개 (Chez Suzy, La Presentation)",1932
브라사이, “셰 수지, 소개 (Chez Suzy, La Presentation)”,1932

브라사이는 특히 파리의 은밀한 밤의 순간들을 자주 포착했습니다. 파리의 아름다운 이중성이 그의 사진에서 잘 드러나곤 합니다. ‘셰 수지 (Chez Suzy)’는 1930년대 파리 ‘생 제르맹 데 프레’ 지역에 위치한 유명한 성매매업소로, 당시 파리의 은밀하고 사치스러운 밤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브라사이의 사진에도 자주 등장하며, 파리의 낮과는 이중적인 모습의 밤 문화를 기록하는 중요한 배경이었지요. “셰 수지, 소개 (Chez Suzy, La Presentation)”는 성 노동자들이 손님에게 소개되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으로, 파리의 은밀한 일상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셰 수지’는 단순한 매춘업소를 넘어, 당시 파리의 하층민과 보헤미안들이 모여들던 장소로, 파리의 다채로운 문화적 풍경을 담아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곳은 브라사이가 파리의 어두운 면모를 탐구하고 예술적 기록을 남기며, 그가 파리의 밤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포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브라사이, 르 모노클 (Le Monocle)”,1932
브라사이, 르 모노클 (Le Monocle)”,1932

‘르 모노클 (Le Monocle)’는 1930년대 파리 몽파르나스 지역에 위치한 레즈비언 클럽으로, 성 소수자들이 모이던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파리는 다양한 성적 정체성과 문화를 탐구하는 보헤미안과 예술가들의 중심지였고, 르 모노클이 바로 파리의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지요. 이곳은 특히 여성들이 모노클을 착용하고 중성적인 스타일을 선보이며 기존 성 역할에 도전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며, 이곳을 파리의 자유로움과 개방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브라사이의 사진 “르 모노클 (Le Monocle)”은 이러한 분위기를 완벽히 포착한 작품입니다. 사진 속 여성들은 전통적 규범을 초월하며, 시대를 앞선 패션과 태도를 보여줍니다. 브라사이는 그들의 모습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적 해방에 대한 예술적 담론을 시각적으로 확장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자유를 갈망하는 시대적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자신만의 언어로 파리의 밤을 이야기하며, 그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듯 브라사이의 렌즈는 당시 파리의 숨겨진 이면을 조명함으로써 예술적 기록과 사회적 기록의 경계를 허물며, 당시 논의되지 않던 성적 다양성과 자유를 탐구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사이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 본 파리는 누구나 꿈꾸는 밝고 낭만적인 도시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만 드러나는 은밀한 속살 같은 도시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시를 읽어내고, 그 속에서 인간의 고독과 자유, 그리고 또 다른 얼굴의 낭만을 찾아내곤 했지요. 사진 속 파리의 밤 문화는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파리가 예술과 낭만의 도시로 기억되고 사랑받는 도시일 수 있게 해주었던 시절이지요. 그렇기에, 브라사이가 포착하고 기록한 순간들이 더욱 특별하고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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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크리에이터 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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