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품은 공간
서소문 역사 기행

서소문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 천주교의 역사적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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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개장 이래 무수한 후기를 불러온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조용한 공원 아래 펼쳐지는 붉은 빛의 벽돌 건축으로 잘 알려진 이곳이 시리고도 숭고한 ‘성지’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조선 중기 이후 400여 년 동안 국사범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었던 서소문역사공원은 많은 교인들이 처형된 천주교 박해의 대표적 장소였습니다. 해당 역사를 기리기 위해 이곳이 한국 천주교 성지로 선정되었고 그 기념비적인 성격으로 현재의 박물관이 세워졌죠. 이번 글에서는 종교적 배경을 따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짚어보며, 맥락을 이어 근방에서 만날 수 있는 역사적 장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서소문과 천주교에 얽힌 상관관계

서소문의 조선시대 지도
이미지 출처: 서울역사 아카이브

조선 초기부터 이곳 서소문 밖 일대는 상업의 중심지이자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이곳을 공식 처형장으로 지정하면서 400여 년 동안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장소이기도 했는데요. 국사범에 대한 처형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번잡한 곳에서 거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특히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인이 처형되었고, 그 역사를 기리기 위해 오늘날 서소문 일대는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모습
이미지 출처: 서울특별시

서소문역사공원은 한국 천주교가 주축이 되어 2019년 6월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크게 지상의 공원과 지하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으로 나뉘는 이곳은 기존 장소가 가진 특성을 발휘해 이전에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지하 세계를 구현해냈는데요. 지상에 있던 기존의 서소문공원과 지하 4층 규모의 꽃시장과 지하 주차장, 재활용센터로 사용하던 곳 일부를 리모델링해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붉은 벽돌의 웅대한 건축은 땅 밑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펼쳐지는 공간이죠.


추모와 위로의 공간,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초입
이미지 출처: archipreso.com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초입
이미지 출처: 월간공간

지하로 내려와 박물관 초입에 다다르면 높은 적벽색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어딘가 머뭇거리게 되는 압박감이 느껴집니다. 공간이 주는 아우라로 방문객을 침묵하게 만들고, 내면의 갈등과 겸허히 마주 서게 만들죠. 이곳을 설계한 윤승현 교수는 설계 과정에서 동선이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다고 전했는데요. 그런만큼 박물관 내부의 동선을 따라 이동할수록 경간함과 웅장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자그마치 1km에 달하는 낮은 조도의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순례길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죠.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콘솔레이션홀
이미지 출처: 월간공간

성지의 역사와 기록을 담은 상설 전시관과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획 전시관을 지나면 거대한 입방체 구조의 콘솔레이션홀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위로, 위안을 뜻하는 콘솔레이션홀은 추모의 공간으로서 기획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대표 장소로도 손꼽히는 곳입니다. 조명을 완전히 낮춰 사방이 어둠에 내려앉은 이곳은 조선시대에 죽임을 당한 이들을 기리는 장소로 실제 천주교 박해 시기 서소문 네거리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기도 합니다. 2m 높이로 떠 있는 틈을 통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입장하는 구조와 지상으로부터 쏟아지는 한 줄기의 빛은 그 공간이 주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이끌죠.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하늘광장
이미지 출처: archipreso.com

꽉 막힌 어둠을 대변하는 콘솔레이션홀을 나서면 하늘이 담긴 광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높이 18m의 적벽돌로 사방이 둘러싸인 이곳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시선이 하늘로 향하게 되죠. 지하 3층에서 지상 공원까지 뚫려 있는 구조로 설계된 하늘광장 역시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희생당한 이들의 정신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적막만이 흐르는 이곳에서 순교 성인 44인을 상징하는 정현 작가의 ‘서 있는 사람들’ 작품 옆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며 감정이 묘하게 끓어오르기도 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토닥여보기도 합니다.

주소: 서울시 중구 칠패로 5
운영 시간: 화~일 9시30분~17시30분 (월요일 휴무)


WEBSITE :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INSTAGRAM : @ssmshrine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
약현성당

서소문의 약현성당
이미지 출처: 서울특별시

서소문역사공원에 방문했다면 한국 천주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약현성당도 꼭 방문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사적 252호이자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이곳은 잘 알려진 명동성당보다도 6년 앞선 1892년에 세워졌는데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랑스 출신의 코스트 신부는 순교한 천주교인들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서소문 순교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의도적으로 약현성당을 세웠다고 전해지죠.

서소문의 약현성당
이미지 출처: 민중의소리

국내에 고딕 양식이 도입된 최초의 건물이지만 흔히 알고 있는 하늘로 높이 솟은 유럽의 성당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요. 당시 기술과 재정 부족으로 화려한 장식 대신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을 절충한 벽돌조 건물로 세워졌지만 1990년 이전의 서양식 건축물 중 서양으로부터 직접 수용된 곳이라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서소문 일대에 오신다면 종교적으로도, 건축적으로도 의의를 지닌 이곳도 꼭 방문해보세요.

주소: 서울시 중구 청파로 447-1


WEBSITE : 약현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
성요셉아파트

서소문 성요셉아파트
이미지 출처: 머니투데이

약현성당 근방엔 이름부터도 종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성요셉아파트가 있습니다. 1971년 천주교 신도와 수사들을 위해 지은 이곳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주상 복합 아파트 중 한 곳인데요. 약현성당 신도들의 집단 거주처로 건설된 이곳의 이름 역시 준공 당시 성당에 있던 신부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전해지죠. 26개의 상가와 62세대로 이루어진 성요셉아파트는 오늘날까지도 성직자와 수도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입니다.

성요셉아파트
이미지 출처: 대통령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뉴스레터

성요셉아파트는 역사만큼 매우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급경사 비탈길에 세워진 아파트이다 보니 복도가 전부 다 이어지지 않고 건물의 한쪽 끝과 반대쪽 끝의 층수가 다르기도 하죠. 1층에선 방앗간, 쌀집, 봉제공장과 같이 예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지역의 상인들과 아파트 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진 정겨운 풍경도 만날 수도 있는데요. 서울시는 이런 특이한 구조와 1970년대 생활상을 그대로 담은 성요셉아파트를 서울 속 미래 유산으로 선정했습니다. 긴 세월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주름살이 패인 이곳의 풍경은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와는 또 다른 면면을 보여주죠.

주소: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6길 34


땅 위에서 벌어진 아픔은 땅 밑으로 스며들었고 그 땅에 기대어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슬픔 속에서도 사람들은 과거를 살아 냈고 오늘날에도 그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가고 있죠. 지하 세계에 펼쳐지는 역사적 추모 공간을 지나 묵묵히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현재의 공간을 마주해보세요. 긴 시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 저마다의 종교는 다르지만 인간에게만 허용된 숭고함이라는 감정은 분명 느껴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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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연

누군가의 관점이 담긴 모든 것이 예술이라 믿습니다.
ANTIEGG와 함께 예술을 기록하고, 세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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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L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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