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지 못하)는
사회

미술이 보여주는
건강한 애도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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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참 많은 사람을,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사실 모든 시절마다 제각각의 그림자는 항상 존재하는 법이지만, 팬데믹이 우리를 너무 빠른 변화의 흐름에 밀어 넣어버린 탓일까, 유달리 지난 몇 년은 가혹한 재난의 시간으로 느껴졌다. 사실 팬데믹 이전에도 우리는 이미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았다. 다만 관성에 젖은 나머지 문제의 심각성을 간과했을 뿐이다. 환경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고, 부는 점점 더 특정 계층에게만 흐르고 있었다. 새로운 과학기술은 우리에게 희망과 동시에 걱정을 심어주는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팬데믹은 우리가 가진 이 모든 걱정거리 위 살며시 얹어진 ‘익숙함’이라는 얇은 베일을 한 번에 걷어버리고 우리를 패닉에 빠트렸다. 인류가 가진 모든 문제가 이제는 너무나 심각하게 보인다. 팬데믹은 우리가 항상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 급박함을 잊어버린 여러 문제를 우리에게 또렷한 절망의 이미지로 전달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작물 생산량 감소는 팬데믹 물류 위기와 겹치며 식량 문제를 가속했고, 백신, 생체인증, AI 등의 새로운 과학기술은 검증 기간이 거의 없어진 채 빠르게 사회에 적용되어 이제 과학이 우리를 돕는 도구를 넘어서 버린 것은 아닐지 불안에 떨게 했다.

우리는 이제 팬데믹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인류. 많은 이야기가 사회 위로 올라와 부글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관없이, 어쨌든 인류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 귀를 기울이며, 오히려 이제 우리가 가까운 과거와 그곳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돌아볼 시간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긴 팬데믹의 시작을, 곧 종식될 것이라는 믿음이 사라지고, 결국 우리가 서로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 긴 시간의 시작을 되돌아볼 때 말이다. 최근 인상 깊게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가까운 과거일수록 그 과거에 대한 정보는 빠른 속도로 유실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가까운 과거의 미술을 잘, 탄탄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많은 것이 상실된 채로 시간이 흘러가 버리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는 가까운 과거의 미술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이는 우리의 모든 삶의 측면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금세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문제점도,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도. 누군가는 상실을 공적인 차원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과 무력감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우리가 상실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느껴진다. 우리는 절대 솔직하지 않다. 애써 의연하게 우리가 마주한 슬픔을 빨리, 성급하게 잊어보려고 하고 있을 뿐이다.


상실을 ‘상실의 상징’으로:
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실마리

촛불
이미지 출처: Unsplash

팬데믹 이후 사회에 만연한 상실의 감정들을 어떻게 애도하면 좋을지, 그 답을 이 글에서는 미술의 사례로 찾아보려고 한다. 언어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따르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상징으로 승화해야 한다. 승화되지 못한 상처는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가 된다. 상실을 ‘상실의 상징’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우리는 상실을 건강하게 극복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상실을 마주하고 그 상실마저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감정을 상징으로 이행시키는 것은 슬픔에 직면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처방일 뿐 아니라, 예술의 중요한 작동 기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미술사학자 핼 포스터(Hal Foster)도 자신의 저작 『소극 다음은 무엇? 결괴의 시대, 미술과 비평』에서 정치적 격변기, 문화가 분열적 비상사태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따라서 미술이 어떻게 효과적인 상실 치유의 형식이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팬데믹 이전 상실을 담담하게 직면하고 관람자들과 함께 애도하고자 했던 몇몇 미술의 사례를 소개하려고 한다.

1)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무제 (로스의 초상)”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무제 (로스의 초상)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1991,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포장된 사탕, 가변크기,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무제 (로스의 초상)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1991,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포장된 사탕, 가변크기,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 작품은 79.3㎏의 사탕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에서 작품을 마주한 관람객들은 작품을 감상하고 사탕을 하나씩 집어 갈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을 만날수록, 사탕 무덤은 점점 작아지고 결국 사라지게 된다. 이 사탕 무덤은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가 먼저 떠나보낸 애인 ‘로스’의 육신을 상징한다. 사탕 무덤의 무게인 79.3kg은 로스의 에이즈 발병 전 몸무게다. 이 작품의 특징은 관람객이 직접 사탕을 집어 가고 이를 섭취함으로써 결국 언젠가 사라지도록 계획되어있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또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곤잘레스-토레스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작품으로 다시 반복한다. 그러나 이 상실은 트라우마적 반복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애도 형식이 된 상실이다. 곤잘레스-토레스가 쌓아둔 사탕은 관람자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자신의 타액과 섞여 목구멍 안으로 조금씩 녹아들어 가는 사탕을 느끼면서 누군가는 자신이 경험한 이별을, 누군가는 어린 시절 즐겨 먹던 사탕의 기억을, 누군가는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생각할 것이다. 작가에서 출발한 애도는 수많은 관람객의 머릿속에서 저마다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2) 쉬빙의 “먼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쉬빙(Xu Bing), ”먼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Where Does the Dust Itself Collect?”, 2004, 복합매체, 가변크기, Courtesy the artist © Xu Bing. 사진: Xu Bing, courtesy Xu Bing Studio.
쉬빙(Xu Bing), ”먼지는 어디에서 왔는가? Where Does the Dust Itself Collect?”, 2004, 복합매체, 가변크기, Courtesy the artist © Xu Bing. 사진: Xu Bing, courtesy Xu Bing Studio.

쉬빙(Xu Bing)은 2001년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911 테러를 직접 목도한다. 그는 테러 이후 맨해튼 거리에 남은 먼지를 수집한다. 먼지를 수집할 당시 쉬빙은 어떤 계획도 없었다고 하지만, 후에 그는 수집한 먼지를 후에 전시장 바닥에 고르게 흩뿌리고 거기에 스텐실로 “As there is nothing from the first, Where does the dust itself collect? 태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되, 먼지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8세기 혜능선사의 말을 영어로 적어 놓는다. 맨해튼의 먼지 위에 적힌 하나의 질문을 통해 관람자는 존재와 존재의 소멸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아직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테러가 먼 과거, 다른 문화권에서부터 불러온 하나의 질문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소멸에 대한 더 거대한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쉬빙은 혜능의 말마저도 무에서 소환된 먼지와 같다는 의미를 작품에 심어둔다. 쉬빙이 혜능의 말을 적어둔 방식이 스텐실이기 때문이다. 전시가 진행되며 작품에는 점점 전시장의 새로운 먼지가 쌓여간다. 그에 따라 혜능의 물음도 점점 새로운 먼지로 덧씌워져 모습을 잃게 된다. 결국 우리의 모든 상실은 애도하는 사유와 새로운 의미의 획득이라는 과정을 따른다는 사실이 쉬빙의 작품을 통해 암시된다.

3) 최선의 “나비”

최선, “나비”, 2014, 캔버스에 잉크, 160x914cm. 최선, <나비>, 2018, 캔버스에 잉크, 160x920cm. 최선, <나비>, 2022, 캔버스에 잉크, 160x914cm. 세 작품 연속으로 설치
최선, “나비”, 2014, 캔버스에 잉크, 160x914cm. 최선, <나비>, 2018, 캔버스에 잉크, 160x920cm. 최선, <나비>, 2022, 캔버스에 잉크, 160x914cm. 세 작품 연속으로 설치. 이미지 출처: 제주비엔날레 공식 홈페이지.

최선은 세월호 참사 등 사회적으로 개인의 존재가 쉽게 폄훼되는 일련의 사건을 경험한 후 사회 참여형 미술 작업인 “나비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최선은 숨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이지만, 동시에 숨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는 캔버스 위에 잉크 붓고, 이를 불어서 여러 사람의 숨의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고안한다. 최선의 프로젝트의 참여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숨을 눈으로 보고, 그 숨이 저마다 어떤 형상을 가졌는지를 확인한다. 널따란 캔버스 위에 제각각의 모습으로 날아다니는 여러 마리 푸른 나비는 그 숨을 불어넣은 모든 개인의 저마다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푸른색으로 펄럭이는 수많은 생명의 지표가 우리에게 메멘토 비베레(Memento vivere)의 감각을 일깨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살아가며 죽음이 언제나 다가옴을 기억하라는 강령이라면, “나비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멘토 비비레의 메세지는 상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결국 지금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게 한다.


무엇이 건강한 애도의 미술인가?

애도
이미지 출처: Unsplash

이 글에서 예시로 든 작품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은 상실과 상실에 동반하는 슬픔을 작품과 전시라는 공적인 이야기의 장으로 이동시킨다. 둘째, 이들은 상실(그것이 개인적인 상실이든, 사회적인 상실이든, 혹은 둘 다이든)의 이미지를 직접 제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셋째, 이들의 작품은 애도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것을 관람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위에 소개한 작품을 통해 관람자들은 애도에 대한 저마다의 의미를 만들고, 저마다의 신념을 형성할 자유를 가진다.

이 작품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을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많은 정치적, 이념적 선전이 예술의 모습으로 둔갑해 우리의 건강한 애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당장 광화문 광장 근처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현수막과 플래카드만 떠올려보아도 우리는 쉽게 재난에 대한 어떤 하나의 격양된 감정만을 요구하는, 그 격양이 마치 정당한 애도의 수단인 것처럼 둔갑하는 사례를 쉽게 생각해낼 수 있다. 이러한 눈 가리기는 거리 플래카드가 아닌 미술에서 더욱 교묘하게 나타나고는 한다. 비극에 대한 슬픔과 애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례는 최근과 먼 과거 미술을 가리지 않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선전으로 전락한 미술은 사회적인 재난에 아주 손쉽게 교조적인 목소리를 입혀, 하나의 이념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재난을 당한 여성의 모습을 가부장제와 종교에 순응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모범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재현한 조셉 노엘 페이톤(Sir Joseph Noel Paton)의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이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셉 노엘 페이튼(Sir Joseph Noel Paton), <인 메모리엄 In Memoriam>, 1858, 패널에 유채, 개인소장.
조셉 노엘 페이튼(Sir Joseph Noel Paton), <인 메모리엄 In Memoriam>, 1858, 패널에 유채, 개인소장.

우리에게 하나의 감정(대체로 분노나 지극한 슬픔)과 그 감정에 대한 단일한 대응만을 요구하는 미술이 과연 우리를 어떻게 잘 애도하게 하고. 재난에서 나아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좋은 애도의 미술이 무엇인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우리의 감정적인 부분을 얼마나 자극하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지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정적이기 쉬운 문제일수록 우리는 그 감정의 범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상실을 잘 애도한다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곡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2020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고고학 연구팀이 네안데르탈인도 장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의 장례 문화가 그들의 ‘추상적 사고 능력’을 증명한다고 발표했다. 인류학에서 ‘장례’는 이처럼 인간적인 문화의 발현으로 간주되어왔다. 어쩌면 문화를 향유하는 인류의 다른 이름은 ‘장례를 치르는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까마득한 우리의 선조들로부터 시작한 상실을 극복하는 의식은 수많은 지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또 각자만의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 팬데믹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현시점, 우리가 앞으로 어떤 또 다른 사회적 작별 의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를 세 미술작품을 통해 가늠해 보았다. 미술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애도의 여러 방식을 통해 우리가 팬데믹 이후 더 건강하게 서로를 지탱하는 애도의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슬퍼하지 못하는 사회보다는 함께 슬퍼하는 사회가 더 건강할 수 있는 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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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예술과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보고 기록하고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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