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의 유행을
어떻게 봐야할까

핑크로 보는
여성성의 새로운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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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비>가 개봉했다. 핑크색 투성이다. 이 영화 덕분인지 ‘바비코어(Barbie-core)’라는 패션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런웨이에서도 핑크색이 대거 등장했다. 팬톤에서도 올해의 트렌드 컬러로 ‘비바 마젠타(Viva Magenta)’라는 강렬하고 짙은 핑크색을 선정했다. “관습을 벗어난 시대에 적합하다”고 설명을 덧붙였다는데, 왜 핑크가 이 시대와 어울리는 색으로 여겨진 걸까? 핑크가 이렇게도 관습을 벗어난 도전적인 색깔이었나?


핑크의 역사

사진작가 윤정미
사진작가 윤정미, 이미지 출처: Waybackmachine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핑크란 여성에게 고정된 색이다. 핑크색 옷을 입고 바비인형을 갖고 노는 여아를 연상시킨다. 언제부터 핑크가 여성성을 상징하게 되었던 걸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핑크는 여성성과 강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아동복의 변천을 연구한 조 B. 파올레티는 『Pink and Blue: Telling Boys from Girls in America』에서 핑크와 파랑의 성별 구분이 20세기를 지나며 정반대로 바뀌었음을 주장한다. 1905년 이유식 광고에서는 옷차림으로 남아와 여아를 구분할 수 없었고, 당시엔 남아에게 핑크색 옷을, 여아에게 파란색 옷을 입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1918년의 한 기사에서는 “핑크는 단호하고 강렬하므로 남자아이에게, 파랑은 섬세함을 의미하므로 여자아이에게 어울린다”는 문구도 있었다.

핑크색이 여성을 상징한다는 의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해 1950년대에 널리 퍼졌다. 특히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영부인 매미 아이젠하워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의복과 액세서리 모두 핑크색을 선호했고, 백악관도 핑크색으로 꾸몄다. 이러한 유명인의 취향은 곧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이후 1960년대에는 유니섹스 패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운동이 제2의 물결로 접어들면서 여성해방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이에 맞춰 젠더 중립적인 패션이 주목받은 것이다. 아동복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 시어스 백화점의 카탈로그에서는 핑크색 옷을 입은 아동이 2년 동안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1985년경까지 유지되었다.

다시 핑크가 여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굳어진 것은 1980년대였다. 1960년대에 젠더 중립적인 옷을 입고 자란 세대가 부모가 되었다. 이들은 옷으로 아이의 성별을 구분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어렸을 때 입었던 유니섹스룩을 자녀에게 입히고 싶지 않아 했고, 여자아이가 자라서 의사가 된다고 해도 ‘여성스러운’ 의사가 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 즈음, 태아 성별 검사가 도입된 이후에는 아동복의 성별 구분이 빠르게 확산됐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성별을 파악해서 유아용품을 쇼핑하는 부모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이에 발맞춰 성별을 구분한 제품들을 적극적으로 내놓았다. 의복에서부터 장난감, 침구 세트까지 핑크와 파랑으로 나뉘어진 다양한 유아용품이 쏟아져나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아는 핑크, 남아는 파랑이라는 고정관념이 선명하게 형성되었다. 즉, 핑크와 여성성은 오랫동안 강하게 부착된 개념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상징성이 확산되고 굳어진 것은 상업적 전략의 영향이 컸다.


여성성에 대한 편견

영화 <금발이 너무해>의 한 장면
영화 <금발이 너무해>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IndieWire

2001년 영화 <금발이 너무해(Legally Blonde)>는 금발 머리의 여성은 멍청하다는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이때 주인공은 진한 메이크업, 네일 아트, 반짝이, 리본 장식과 함께 온몸에 핑크를 두르고 등장한다. 소녀의 전유물을 누구보다 잘 수용한 인물이라는 의미다. 이 영화는 핑크를 좋아하고 귀엽고 화려하게 꾸미는 여성이 어떻게 배척되는지를 보여준다. 지나치게 어리고 유치하며 무지한 존재로 여겨지고, 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소녀스러운(girly)’ 여성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다.

2011년부터 방영한 드라마 <New Girl>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나는 (…) 도트 무늬 옷을 즐겨 입고, 반짝이를 하루 종일 만지고, (…) 그 정장 바지에 리본을 달고 조금 더 귀엽게 꾸며주고 싶어요. 그러나 이 사실은 제가 똑똑하지 않고, 터프하지 않고, 강인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여성스러운’ 여성은 보통 멍청하고, 소심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위 작품들은 핑크를 즐기는 여성, ‘소녀스러운’ 여성성을 수용하는 여성은 지성과 힘을 지니지 않았을 거라는 편견을 비판한다. 또 이 편견이 매우 강력하게 퍼져 있어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도 짚어낸다. 이처럼 2000년대에는 핑크를 다른 관점으로 풀어내며 여성성에 대한 편견을 지적하고 부수는 시도가 있었다. 핑크는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꼬집는 강력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새롭게 유행하는 핑크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장된 여성성

틱톡에 ‘hyperfemininity’를 검색한 결과
틱톡에 ‘hyperfemininity’를 검색한 결과
틱톡에 ‘hyperfemininity’를 검색한 결과, 이미지 출처: 틱톡

2020년대에 핑크는 더욱 과장된다. ‘hyperfemininity’, 즉 과한 여성성, 초여성성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용어는 일부 틱톡커들이 이끄는 운동이다. 이들은 핑크색 옷을 입고 공주 드레스를 입으며, 메이크업과 리본 장식, 하트 무늬, 레이스, 네일아트와 반짝이는 액세서리에 열광한다. 유치한 여성성을 온몸에 과하게 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핑크로 대표되는 ‘소녀스러움’의 과잉은 여성성에 얽힌 편견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일부러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반대의 뜻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첫째, 이성애적 관점에서 벗어난 자기 긍정을 추구한다. 이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당당히 핑크를 추구한다. 이성애적 관점에서 남성에게 ‘여성스러움’을 어필하려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개인의 취향과 만족을 위한 것이다. ‘여성스러운’ 여성이 되는 것에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외치고, 자아존중감을 추구한다. 이들이 핑크를 입는 것은 성별의 상징성으로 인한 주입된 선택이 아닌, 스스로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는 주체적 선택이다.

둘째, 특정한 취향과 정체성을 지닌 여성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핑크를 즐기는 여성들은 슈트를 입고 카리스마 있는 커리어우먼처럼 개인의 성장을 중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며 공생하는 관계다. 이들은 서로의 취향을 지지하고 옹호한다. 스스로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을 응원하며, 여성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낸다. 여성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답습한다는 비난에서 벗어나, 여성의 협력과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다.

셋째, 다양한 형태의 사람이 추구하는 여성성을 보여준다. 틱톡에서 핑크를 즐기는 여성은 금발에 날씬한 백인 여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흑인 여성, 퀴어 여성, 뚱뚱한 여성, 또는 여성이 아닌 성이 핑크색 옷과 네일아트와 반짝거리는 액세서리를 사랑하고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핑크의 새로운 유행은 협소한 미적 기준과 인종, 젠더 구분에서 벗어나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통로다. 핑크는 다양한 여성성을 포용하고 경계를 확장하는 담론의 중심에 있다.


핑크를 즐기는 여성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다. 물론 이러한 여성의 모습이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선망하고 애정하는 어떤 여성성을 무조건 배척해야 하는가? 탈코르셋을 추구하는 사람도 모든 여성이 기존의 전통적 여성성을 잃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탈코르셋의 목적이 여성의 외모를 또 다른 방식으로 한정하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다.

핑크의 과잉으로 표현되는 여성성의 확장과 옹호는 중요한 메시지다. 핑크는 여성성에 대한 중요한 지점을 짚고, 다양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핑크도, 탈코르셋도, 여성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이며, 중요한 것은 주체적인 선택이다. 여성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 Empoword Journalism, The #Hyperfeminine Tiktok Movement As A Response To Toxic Masculiity(2023. 5. 26)
  • 보그 코리아, ‘바비’는 어떻게 디자이너를 매혹시켰는가(2023. 4. 12)
  • Nylon, Hyperfemininity Isn’t a Trend – It’s a Movement(2022. 6. 30)
  • Yahoo! finance, Gen Z is reclaiming a once-derogatory word to challenge how society treats women: ‘Become everything men want’ (2021. 3. 18)
  • Wayback Machine, Girls Art Taught To ‘Think Pink’, But That Wasn’t Always So(2014. 4. 1)
  • The Atlantic, Pink Wasn’t Always Girly(2013. 8. 12)
  • Smithsonian Magazine, When Did Girls Start Wearing Pink?(2011.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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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량

패션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보였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포용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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