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매혹의 덫
『가정교사들』

현실을 비켜 가며
파고드는 잔혹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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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면의 욕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안에는 사회적인 규율과 타인의 시선 아래 결코 발현되지 못하는 욕망도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가감 없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낯선 불편함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점차 나와 작중인물이 연결되고, 그의 거침없는 행동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순간 묘한 쾌감과 해방감에 사로잡히죠. 여기 지독하게 매혹적인 덫을 던지는 가정교사들이 있습니다.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 안에서 세 여인은 세이렌이 되었다가, 숲의 정령이 되었다가, 어머니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의 욕망과 기행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까요?


흐린 경계 속 선명한 색채

안 세르
안 세르, 이미지 출처: New Directions

『가정교사들』은 1992년에 출간된 프랑스 작가 안 세르(Anne Serr)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한국에는 처음 이름을 알리지만, 30여 년 동안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며 현대 프랑스 문단에서 두터운 입지를 다져온 작가지요. 그의 최근작들은 페미나상, 아카데미프랑세즈 소설 대상 등의 후보에 오르며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세르의 작품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장르적 특성은 물론이거니와 고전과 현대, 환상과 현실처럼 정반대의 개념으로 인식되는 것들도 세련된 솜씨로 버무려 버리죠.

앙리 마티스, “La Conversation (The Conversation)”, 1938
앙리 마티스, “La Conversation (The Conversation)”, 1938, 이미지 출처: SFMOMA

세르의 작품은 환상성이 짙으면서도 현실성이 느껴지는 ‘마술적 사실주의’ 경향을 띠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문학 기법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가정교사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이 용어가 단숨에 이해되고 맙니다. 중세 유럽의 저택을 배경으로 하는 흔한 고전의 틀을 따르는 듯하지만, 담겨 있는 이야기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어지럽히는 환상에 가깝기 때문이죠. 공간과 인물, 사건 모두 어느 것 하나 뚜렷하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의 저택’이라는 배경조차 ‘정원’, ‘가정교사’, ‘하녀’ 등의 단어들로부터 연상된 하나의 추측일 뿐입니다. 희뿌연 안개 같은 모호함 속에서, 정교한 묘사와 상식을 깨뜨리는 이야기는 책 띠지의 앙리 마티스 그림처럼 선명한 색채로 살아납니다.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들

이야기는 엘레오노로, 이네스, 로라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 가정교사들을 관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금빛 철문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정원에서 어린 남자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이들의 임무지요. 하지만 세 가정교사의 행동은 교육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파티 준비에 목숨을 걸고, 아이들 앞에서 나체로 산책을 즐기는 일도 서슴지 않죠. 해가 저물고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으면 가정교사들은 더한 광기에 사로잡힙니다. 몸이 단 나비들처럼 철문을 주시하다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온 낯선 남자를 사냥하기 시작하죠.

“그들이 그 남자가 그렇게 가버리도록 둘 리가 없다. 그는 그들이 쳐놓은 광대하고 황량하고 내밀한 덫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그물을 꺼내어 그를 잡으러, 가두러 간다. (…) 저 남자는 몸이 꽉 잡힌 채로 핥아지고 깨물리고 잡아먹힐 것이다.”

_『가정교사들』 29-30p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영화 <작은 아씨들> 스틸컷, 이미지 출처: IGN

이들의 사냥은 남자의 생명을 앗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냥이니까요. 세 여인은 현실에서 남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본능을 마음껏 드러냅니다. 소설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잡아먹는’이라는 동사로 표현하는데요. 직설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먹는다’는 표현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할 때 쓰이는 속어기도 하죠. 소설은 주체와 대상을 전복시켜 생경한 페미니즘 판타지의 정체성을 갖춥니다. 가정교사들의 욕망은 언제나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요? 소설은 두 남성 인물들을 통해 지난한 현실 또한 놓치지 않습니다.


촘촘히 쌓인 이야기의 레이어

그러나 『가정교사들』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만 바라보기에는 아쉬움이 따릅니다. 145페이지의 중편임에도 인간과 삶, 사회에 대한 다양한 주제 의식이 녹아 있기 때문이죠. 가정교사들의 주변 인물은 밀도 있는 이야기를 담는 데 좋은 장치가 되어줍니다. 가부장적 질서 유지를 위해 감시라는 방법을 택한 집주인 오스퇴르 씨와 권태를 느끼는 그의 부인, 가정교사들을 관음하는 건너편 집의 노인, 어린 남자아이들과 하녀들까지. 이들의 내밀한 감정은 자연 예찬과 계급 문제로도 뻗어 나갑니다.

『가정교사들』 초판본 표지
『가정교사들』 초판본 표지, 이미지 출처: anneserre

그중에서도 비중 있게 그려지는 관음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일깨움을 주는데요. 가정교사들의 저택 건너편에 사는 노인은 창 너머로 오랜 시간 이 여인들을 지켜봅니다. 망원경을 이용해 은밀한 곳까지 샅샅이 탐하기에 이르죠. 놀라운 사실은, 가정교사들이 노인의 관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관찰자인 노인을 의식하고 더 과감하고 발칙하게 행동하기도 하죠. 가정교사들과 노인의 독특한 관계성, 그리고 이들이 맞이하는 변화는 극을 뒤흔들 만큼 역동적이기도 하면서 독자에게 심오한 생각거리를 던집니다. 책 마지막에 실린 옮긴이의 말은 생각에 불씨를 지필 거예요.


『가정교사들』은 배우 정호연과 릴리로즈 뎁, 레나테 레인스베를 주연으로 할리우드 영화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들이 표현하는 가정교사들은 어떤 모습일지,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가 어떤 영화적 상상으로 그려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불볕더위만큼 뜨거운 『가정교사들』과 함께 올여름을 마무리해 보는 건 어떨까요? 매혹적인 가정교사들이 쳐놓은 그물에 여지없이 걸려들고 말 겁니다.

해당 아티클은 은행나무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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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유림

아무래도 좋을 것들을 찾아 모으는 사람.
고이고 싶지 않아 잔물결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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