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을 배제한 세계
고지영 인터뷰

무거운 의미에 기대지 않고
회화가 회화로 존재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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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시작과 새로운 다짐이 이어지는 요즘입니다. 그러나 스산한 기운에 어깨는 움츠러들고 결심은 자꾸 수그러들죠. 온도를 높여 찬 공기를 깨트리듯 창의적 선택으로 고정된 생각에 균열을 내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ANTIEGG 기획 인터뷰 시리즈, 첫 번째 주인공은 화가 ‘고지영’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과잉을 배제합니다. 무거운 서사와 시적인 표현에 기대지 않습니다. 제목이 없는 이곳은 최소한의 형식으로 아름다움을 제안하고 작품과 오롯이 대면할 용기를 요청하죠. 형태만 남긴 집과 동물, 정물은 군더더기 같은 수식어를 덜어냅니다. 그림은 그림으로, 조형은 조형으로써 존재하기에 작품 앞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납니다. 한해가 바뀌기 전, 한옥이 즐비한 가회동 ‘이목화랑’에서 고지영 작가를 만났습니다.

인터뷰어 원윤지
인터뷰이 고지영(@koji._.young)
이미지 제공 이목화랑(@yeemockgallery)


2022, oil on canvas, 50x72.7cm
2022, oil on canvas, 50×72.7cm

지난 ‘키아프 서울’에서 작가님의 작품을 봤어요. 작품이 판매됐다는 뜻의 빨간 스티커도 붙어 있었고요. 아트 페어에서 작품을 떠나보내면 어떤 마음이 들어요?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거나 자식 같은 존재를 내보내는 느낌은 아니에요. 아직 그리지 않은 다음 그림, 아직 없는 그림이 오히려 자식 같죠. 온갖 머리와 몸을 쥐어짜면서 종일 그림만 그리거든요. 다 그린 그림에 대해선 ‘구상한 대로 잘 됐냐 안 됐냐’만 판단해요.

잘 됐다고 느낀 지점이 궁금해요. 작업할 때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요?

첫 번째는 조형적 가치. 누군가는 제 그림을 보면서 조용한 무엇, 무채색 무엇이라며 문학적 해석을 할 거고, 누군가는 조형적 리듬을 즐길 거예요. 후자는 자기 스스로 알아내기 쉽지 않아요. 모두가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아주 단순한 소재와 구조물로 ‘네가 좋아하던 형태가 이거야. 머릿속에 있는 아름다운 모양이 이거야’라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림으로 조형을 눈앞에 제시하는군요.

그렇죠. 제안해 보는 거예요. 만약에 못 보여준다면 그 작업은 망한 거죠.

2022, oil on canvas, 60.6x50cm
2022, oil on canvas, 60.6x50cm

하하. ‘망했다’의 기준이 있어요? 관객에게 공개됐을 때만 실제로 아름다움이 가닿았는지 아닌지 알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공개되면 진짜 거둘 수가 없고요. 저는 시작할 때가 힘들어요. 빈 캔버스를 한 일주일은 보면서 정말 마지막 붓질까지 머릿속으로 계획해요. 막상 완성했는데 군더더기를 한 스푼 더했거나 유행하는 아기자기한 사진 정도로 표현되면 망한 거죠. ‘조형적으로 보고 싶었을 법한 예쁨’을 구현하지 못한 거라서 생각해 둔 그림의 효과도 발생하지 않아요. 그럼 화나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버리기도 했어요. 어릴 때 비하면 이제 그 빈도가 줄었죠.

버리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아요.

기준이 명확하면 쉽죠. 완성했을 때 ‘100’이 안되면 다 버려요.

정말요? 저는 미련이 많아서 무엇이든 버리는 게 일이에요. 글도 풀어서 쓸 때보다 덜어낼 때 시간이 더 오래 걸려요.

어렵지 않아요. 저 진짜 잘 버려요. 요즘 그리는 사이즈보다 훨씬 더 큰 캔버스도 버려봤어요. 아이를 막 낳고 키우던 때였는데 문득 손목을 못 쓸 수도 있겠다 싶은 거예요. 그대로 큰 작업물을 모아둔 방에 들어가서 캔버스를 40개 정도 정리했어요. 북북 찢지 않고 차분하게 뜯어서 종량제 봉투에 넣었어요. 여유를 갖고 작업 스타일을 바꾸고 싶었죠.

2022, oil on canvas, 15x15cm
2022, oil on canvas, 15x15cm
2022, oil on canvas, 27.3×34.8cm
2022, oil on canvas, 24.2×33.4cm

그리고 작품 사이즈에 변화가 있었어요?

다른 계기도 있긴 했어요. 그렇지만 필요에 의해서 크기를 작게 했어요. 지금처럼 집중할 수 있는 연속적인 시간이 담보되던 때가 아니었으니까요. 도저히 안 그릴 수는 없고. 사유하는 형태를 정리하니까 큰 작업을 했을 때도 표현하려던 건 지금의 것이더라고요.

작업 방식을 바꾸기 전의 이야기도 궁금해요. 큰 캔버스를 고를 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대학원 다닐 때까지는 100호, 200호 사이즈를 주로 그렸어요. 머릿속이 되게 복잡했거든요.

그러면 표현할 내용이 많을 때 작품 크기도 같이 커지는 거예요?

음… 말하려는 내용이 많고 적은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 같아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원하는 거리감과 공간감에 따라 캔버스를 선택해요. 크기는 진짜 물리적인 문제. 작가는 작품에서 발생할 효과와 감정의 크기를 알아요. 학생 때의 저는 격양된 감정을 전달하고 싶어서 큰 사이즈의 실내 모습을 그렸죠. 관객 입장에서는 6~7미터 정도의 거리감이 발생하면서 그곳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거예요. 또다른 예로 이런 게 있겠네요. 아름다운 풍경화가 있다고 치면 20~30미터 앞에서 보는 거리감이 만들어지고 보는 사람은 그 앞에서 편안하게 걷는 기분을 느낄 테죠.

2022, oil on canvas, 33.4×24.2cm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작업은 고민의 연속 그 자체 같아요. 그때는 어떤 생각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어요?

남과 비교를 많이 했어요. 그림을 비교적 늦게 시작한 편인데도 대학교를 준비하면서 곧잘 그렸어요. 뭐랄까. 잘 그려졌어요. 그 상태로 대학에 왔더니 왜 그런 그림 있죠? 기술이 뛰어나지 않아도 감정이 확 덮쳐오는. 작업을 보는데 ‘내가 했던 건 재주고, 저게 재능이네’ 싶더라고요. 참 힘들었어요.

재주와 재능의 차이라니! 너무 와닿는 말이에요.

아마 몰랐으면 기분 좋게 졸업했겠죠. 안타깝게도 자존감이 낮았고 자존심이 뭔지도 몰랐어요. 많이 울고 나서 ‘나는 재주는 있지만 재능은 없다. 그러니 재능 없는 그림을 그리면 되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 다음부턴 편했죠. 눈 뜨면 그림이 하고 싶어서 학교에 막 뛰어갔어요. 포장지나 메모지에도 그리고 그림은 무진장 그렸어요.

oil on canvas, 10x40cm
2022, oil on canvas, 10x40cm

작가님의 SNS 피드를 내리다 보면 동물 그림도 자주 보여요.

화가 나서요. 시작점은 작업하다가 나는 ‘화’였어요… 글 쓰다가 망치면 어떻게 해요?

버리는 글을 씁니다. 공개되지 않을 글이나 메모를 엄청나게 해요. 감정은 빼고 사실을 나열하는 식으로요.

그렇죠. 저도 화내지 않으려고 화나지 않을 그림을 그려요. 동물 그림은 시작한지 얼마 안 됐는데 그리다 보니까 좋더라고요. 무엇을 그리든 예뻐야지. 어쨌든 작가라면 조형미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예쁘다’가 흔히 쓰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2022, oil on canvas, 45x45cm
2022, oil on canvas, 45x45cm

맞아요.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표현이 한 마디로 압축돼서 그렇지 가볍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 ‘동물’을 고르는 기준은 뭐예요? 주로 곰이나 토끼처럼 둥그런 형태가 많이 보여요.

보이는 그대로가 맞아요. 동물을 사랑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는 건 아니고요. 서술, 설명, 묘사가 보이지 않는 형태를 그려요. 감정은 제외하고요. 기린처럼 문학적인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할 듯한 대상은 빼고 골라요. 토끼는 몇 점 그렸던 적 있어요. 너무 다정하게 생겼는데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가 좋더라고요. 일종의 정물처럼 보고, 실사도 아닌 머릿속에 잡히는 형태만큼 그려요.

동물을 그릴 때의 감정선도 주로 그리는 ‘집’과 비슷한 거예요?

그렇죠. ‘집’에 전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처럼요. ‘집’이라는 코드는 나무처럼 심리 테스트나 일상에서 자주 등장하고 흔하니까 선택했어요. 오히려 아주 단순한 소재이기 때문에 특별히 시적인, 음악적인 맥락을 요구하지 않아요. 문학적으로 해석할 수 없고 해석할 필요도 없죠.

2022, oil on canvas, 24.2x33.4cm
2022, oil on canvas, 24.2×33.4cm
2022, oil on canvas, 37x33cm
2022, oil on canvas, 37x33cm

작가님이 SNS에 올리는 농담도 재밌어요. 업로드하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 관련이 없어서 흥미롭고요.

실은 의도한 거예요. SNS는 고민을 많이 하고 시작했어요. 지금도 썼다가 업로드 전에 지우는 경우가 많아요. 작품과 상관 없는 텍스트를 몇 줄 쓰는데 그림은 그림대로, 농담은 농담대로 보시라고 분리하는 거예요. ‘그림에 대한 해석을 첨부하지 않는다’라는 저만의 룰도 있어요. 나름대로 보는 사람이 그림에 집중할 때까지 시간을 좀 버는 거죠.

그렇네요. 글은 어딘가 남아서 계속 떠돌기 때문에 그림과 함께 쓰면 작품이 갇힐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봐요. 작업할 때 주로 생각하는 키워드 세 가지만 꼽아본다면요?

질문, 제목 없음, 거리감. 아까 이야기 나누었던 것처럼 ‘질문’은 ‘조형적 가치’ 대 ‘리얼리티’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물으며 매일 붙드는 거고요. ‘제목 없음’은 ‘무제’가 아니라 정말로 없음을 의미해요. 제목이 있으면 서사가 생기니까 제목 붙이는 문화를 예전부터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다른 장르에서 생기는 영향을 따라가지 않고 그림은 오직 그림이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거리감’은 완성된 그림에서 발생할 효과를 가늠한 부분이에요.

2022, oil on canvas, 72.7×60.6cm

자기 자신에게 하는 질문 말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았던 질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아이를 키우면서 작업을 어떻게 했는지 묻는 분들이 있었어요. 저는 시간이 부족하면 잠을 안 자고 새벽까지 그렸어요. 물론 질문의 의도는 어떤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죠. 그러나 무엇도 그리지 않고 몇 년을 보냈다면 그리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너무 답답하고 안 되겠으니까 계속 그렸어요.

왠지 비장한 선언이나 결심과 거리를 두실 거 같아요.

맞아요(웃음). 결의를 발표하고 대단히 결심하는 거 다 안 좋아해요. 그냥 그리면 돼요. 그냥 하는 거죠.

이목화랑에서 열린 ≪고지영 개인전≫ 전경
이목화랑에서 열린 ≪고지영 개인전≫ 전경

INSTAGRAM : @koji._.young


고지영 작가의 회화는 긴 설명 대신 ‘보여주기’의 자세를 취합니다. 감정과 자아, 작가와 주체를 덜어내고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 만들어요. 이미 많이 쓰여 낡은 장식이 된 표현을 걷어내니 날 것의 아름다움이 바짝 일어납니다. 얇은 천 뒤로 비칠 듯 안 비칠 듯한 형태가 담백합니다. 보편적이고 정확한 언어 대신에 가벼운 언어가 있습니다. 제목도 이름도 없는 세계는 그 자체로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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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윤지

미술 에디터.
작은 것에서도 의외성을 찾아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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