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지기 유감
전승을 위한 세습

공직 세습 논란에 선 종지기家
180년 명맥 이대로 끊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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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2,1…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푸른 용의 해인 2024년 1월 1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일대. 사회자의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신년을 맞이하러 모인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새해 인사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제야의 종’이 묵직하고 깊은 울림을 도심 속으로 뿜어냈다. 33번 종이 울릴 동안 시민들은 서로 안아주고 손을 맞잡으며 지난 기억을 털어버리고 새해 안녕을 빌었다. 타종 행사가 모두 끝난 뒤에도 여운이 남은 듯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올해도 제야의 종을 울리기 위해 18명의 시민대표가 선정됐다. 명단에 오른 이들은 각종 사건사고에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살리고, 남들 모르게 꾸준히 어려운 이웃들을 도운 의인들이었다. 이들과 서울시장 등 내빈들, 초청된 해외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5명씩 조를 편성해 번갈아가며 제야의 종을 울렸다. 종 앞에 선 대표들은 종망치(당목)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2, 3명씩 서서 종을 당겼다 놓기를 반복했다. 200kg에 달하는 무거운 당목이 앞뒤로 진동하며 일정한 간격마다 당좌(종과 당목이 부딪히는 지점)를 때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당목을 움직이는 건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뒤에 서서 온몸의 무게를 이용해 종의 밀고 당기는 종지기가 실질적으로 모든 움직임을 주관했다. 새해를 맞아 제야의 종을 33번 모두 울리는 사람은 전국을 통틀어 보신각 종지기밖에 없다.

종지기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종지기는 편의상 부르는 이름일 뿐, 역사적으로 한 번도 공식적인 직함이었던 적은 없다. 현재는 정식으로 서울시에 소속된 (8급 임기제) 공무원직으로, 타종 행사 진행, 보신각 보수 유지 등의 역할을 맡는다. 상징적인 문화재를 관리하고, 전국민에게 새해를 알리는 명예로운 자리이며, 그 명예 만큼 전통도 깊은 자리다. 이 자리는 180년 전 1대 종지기부터 현 6대 종지기에 이르는 기간 대부분을 한 가문에서 도맡아왔다. 그런데 최근 이 자리를 둘러싸고 “서울시가 특정 가문에만 공무원직인 종지기를 맡기는 등 특혜를 줬다”는 내용의 논란이 빚어졌다.

반응은 엇갈렸다. 대를 이어 종을 제 가족처럼 여기면서 관리해 온 가문에 종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과 세금으로 돈을 받는 자리이므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선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가문은 당장은 종지기직에서 밀려났지만, 4대 종지기의 손자가 다음 종지기직을 위해 이력과 실력을 쌓고 있다. 여러 논란을 딛고 종지기 가문은 대를 이을 수 있을까. 내년엔 과연 누가 종을 치게 될까.


‘종님’ 위한 180년의 헌신…
종지기의 계보

관련 문헌에 따르면 종지기의 역사는 1대 종지기 고(故) 조재복 씨가 활동했던 18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보신각 누각에서 불이 나면서 종을 둘 곳이 없어지자, 당시 종로구 관철동 인근에 있던 조재복 씨의 집 안뜰에 종을 보관하면서 종지기를 맡게 됐다는 게 조 씨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정설이다. 이후 조재복 씨 아들 조영희 씨가 2대 종지기를 맡았고, 조한이 씨가 3대 종지기직을 물려받았다. 증언에 따르면 조한이 씨는 한국사를 통틀어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고종의 아들)을 지키던 호위군관 출신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때도 끝까지 피란을 안 떠나고 종을 지켰고, 결국 부인이 한쪽 손을 잃는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종을 향한 가문의 책임감과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해방 이후엔 조한이 씨 아들 조진호 씨가 4대 종지기로서 시 공무원으로 채용됐다.

영원할 것 같았던 종지기 대물림은 5대로 넘어가면서 끊기게 된다. 2006년 4대 종지기인 조진호 씨가 일흔이 넘은 나이, 평생 종지기의 공로를 인정받아 제야의 종을 타종하기로 한 날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암으로 세상을 떴다. 하지만 이후 집안 내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처음으로 다른 성 씨를 가진 사람이 종지기를 맡게 된 것이다. 조진호 씨에 이어 신철민 씨가 서울시 8급 임기제 공무원으로 임용돼 5대 종지기가 됐다. 물론 신철민는 조 씨 가문과 완전히 무관한 사람은 아니였다. 이 둘은 과거 타종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타종법을 전수 받으며 사제의 연을 맺은 관계였다고 한다. 신철민 씨도 보신각 종을 ‘종님’이라고 부르며 조 씨 가문 만큼이나 많은 애정을 담아 종을 관리했다. 신철민 씨는 10년 넘게 종 곁을 지켰고, 이후 조진호 씨의 손자인 조재원 씨가 가업을 잇겠다고 나서면서 5대 종지기 자리에서 물러났다.

1988년 김용래 당시 서울시장이 타종 행사에 참여한 모습
1988년 김용래 당시 서울시장이 타종 행사에 참여한 모습. 이미지 출처: 서울기록원

안타깝게도 조 씨 가문 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뒷받침해주는 문헌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됐다고 한다. 하지만 조 씨 가문이 긴 세월 걸쳐 종을 관리해왔으며, 종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다는 점까지 의심하긴 어렵다. 종지기의 역사를 접한 이들은 대를 거듭하며 쌓인 지식과 애정이 누구보다 큰 조 씨 가문에게 앞으로도 종지기를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납득할수 잇을 테다.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 역시 무형의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는 입장도 있다. 보신각을 찾는 관광객들과 먼 미래 후손들에게 더 많은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모든 걸 고려했을 때 한 가문이 꾸준히 종지기를 맡아온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판 음서제일까…
역린이 된 ‘공정성’

문제는 특정 가문 안에서 세습되고 있는 종지기직이 단순 명예직이 아닌 정식으로 봉급을 받고 일하는 공무원직이라는 점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채용 시 경력에 따라 2년 간 4000만~5000만 원에 달하는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비난 여론에 불이 붙고 말았다. 서울시는 조 씨 가문의 구술 등을 토대로 종지기를 맡긴 점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에 일각에선 검증 없이 세습을 방치한 서울시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반응도 싸늘했다. “정말 종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면 보수를 받지 않고, 봉사 차원에서 맡는 게 맞지 않냐” “연봉 5000만 원에 달하는 일자리를 그냥 얻는 건 말이 안 된다”는 등 비난이 댓글창에 빗발쳤다.

종지기직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의 역린과도 같은 공정성의 가치와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다. 이번 논란뿐 아니라 전에도 ‘현대판 음서제’란 딱지가 붙은 비슷한 논란들이 잊을 만하면 반복돼왔다. 가령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골 우체국장직은 배우자나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고 한다. 별정직이긴 하나 국장 급여를 포함한 인건비와 운영비 전액을 정부에서 부담했다. 가족이 아닌 이에게 국장직을 넘길 수도 있어 매관매직도 흔했다. 이것은 1960년대 나라가 어려웠던 시기 민간 우체국 사업을 허용했다가 시대 변화를 반영한 법 개정이 늦어지면서 생긴 문제였다. 그때는 맞았을지 몰라도 박탈감을 안고 사는 이들이 많은 오늘날에는 틀린 일이 됐다. 우체국장 세습 외에도 선관위 특혜 채용, 노조원 고용 세습, 민주 유공자 예우법 등이 큰 비난에 부딪혔다. 종지기직이 그 다음 타깃이 된 것이다.

1960년 영등포우체국 청사 신축 낙성 및 자동전화 개통식
1960년 영등포우체국 청사 신축 낙성 및 자동전화 개통식. 이미지 출처: 서울기록원

장유승 성균관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조 씨 가문이 주장하는 역사가 사실에 비해 부풀려졌으며, 이를 근거로 세습을 허용하는 건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장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종각을 관리하는 이들은 ‘종각 습독관’이라고 불렸다. 종을 제때 울리지 못하거나 다른 누군가 함부로 종을 건드리면 책임을 져야 했다고 한다. 종각 습독관은 세습이 아닌 임명되는 자리였으며, 임기도 그리 길지 않았다. 이후 1800년대 후반 종각 습독관의 명칭은 ‘종감’으로 바뀌는데, 앞서 2대 종기지로 언급했던 조영희 씨 이외에도 종감으로 임명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역사를 통틀어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건 아니라는 뜻이다. 또 장 교수는 조영희, 조한이, 조진호 씨가 인터뷰에서 한 증언이 서로 다르다는 점 등을 토대로 조 씨 가문이 뚜렷한 근거 없이 세습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판소리·탈춤·줄타기는
국가문화재…”전승 지원”

한 가문이 공무원직을 대물림하며 봉급을 받는 건 분명 시대정신과 맞지 않다. 그렇지만 100년 넘게 종을 지켜오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노하우와 얽힌 이야기를 완전히 버리는 건 아쉽다. 현대판 음서제라는 비판을 피하면서 전통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판소리나 탈춤처럼 국가무형문화재로 편입시키는 건 어떨까. 우리나라는 2016년부터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지원금 지급·운영에 관한 규정’을 시행해 전수장학생의 장학금과 전수교육에 필요한 경비, 수당을 지원해왔다. 매년 10억 원 안팎의 예산을 들여 100명이 넘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보유단체 종사자를 지원하고 있다. 또 3년마다 줄타기, 북제작 같은 전승취약종목 30여 개를 선정해 추가지원금을 제공하고 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올해부터 전승활동을 열심히 한 우수 이수자를 대상으로 연 600만 원씩 새롭게 지원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 bdnegin (Brian Negin), CC BY-SA 3.0

종지기에게도 복잡하고 심오한, 전승돼야만 하는 기술과 노하우가 있을 줄 안다. 관리법, 타종법, 하다 못해 종을 보러 온 시민들에게 잘 설명하는 능력도 대를 거듭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영역 아닌가. 5대 종지기로서 10년 넘게 종을 지켜온 신철민 씨의 인터뷰에서는 ‘추운 겨울 종이 얼어붙지 않도록 마사지하는 법’도 나온다. (종을 약하게 진동시켜 얼어있는 종을 깨워야 맑은 사운드를 들을 수 있다고) 종지기를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해 전승을 지원한다면 애정과 전문성을 지닌 이들이 오래오래 맑은 종소리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1~2년이면 며칠 인수인계하고 떠나버리는 공무원직으로 종을 맡기는 것보단 더 안정적이리라 생각한다.


연말이면 종지기는 반짝 관심을 받지만, 제야의 종 타종 행사가 끝나면 곧장 잊히고 만다.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완벽한 타종을 위해 1년 동안 정성껏 관리하고 연습하지만 정작 행사는 5분 안팎이면 끝난다. 행사 중에도 시민 대표들을 소개하기 바빠 종지기는 별 관심을 받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희생을 마다 않고 전통을 계승해온 종지기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에도 아름다운 종소리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정성 논란으로 그동안의 노력이 폄하됐지만, 오히려 공정성과 전통을 모두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볼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전승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 없이 맑은 종소리로 새해를 맞이했으면 한다.

이미지 출처: Richard Mortel from Riyadh, Saudi Arabia, CC B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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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주

흑백의 세상에서 회색지대를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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