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하고도 아름다운 우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익숙함에 숨은 부조리를
건져 올리는 기괴한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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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된 무대가 좁을수록 이야기는 심도 있어진다”는 말을 남긴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그의 영화에는 송곳니가 빠지기 전까진 절대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세 남매, 45일 동안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버리는 호텔 등 허무맹랑한 규칙이 존재하는 공간에 갇힌 인간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덕분에 이야기는 심도 있어졌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란티모스로부터 탄생한 영화 속 극단적인 소재와 억압된 환경이 우리 사회 곳곳에 숨은 부조리를 우연치 않게 직시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부조리는 보통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나 선택을 무력화하는 거대하고도 불합리한 힘으로 작용하는데요. 오랜 기간 회피와 묵인으로 굳어진 부조리를 건져 올린 란티모스는 극단적인 연출과 파격적인 소재로 질문을 던집니다. 최근 국내 개봉한 <가여운 것들>이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4관왕에 올라 더욱 화제가 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 세계로 초대합니다.


그리스의 기괴한 물결
요르고스 란티모스

요르고스 란티모스
이미지 출처: IMDb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TV 광고, 뮤직비디오, 연극 연출 등 커리어를 쌓다가 2001년에 첫 장편 영화 <내 가장 친한 친구>로 영화계에 데뷔했습니다. 그러다 2009년 연출한 <송곳니>가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상’을 받으며 세계적 인지도를 쌓아나갑니다. 독특한 촬영 기법과 부조리극을 연상시키는 대사 등이 특징인 란티모스 감독은 동시대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들과 함께 ‘Greek Weird Wave(그리스의 기괴한 물결)’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란티모스만의 개성은 주제와 더불어 카메라 앵글에서도 강하게 드러나는데요. 와이드 앵글을 사용하거나 프레임 상단 부분에 의도적으로 여백을 많이 두고 촬영해 긴장감과 불안정한 느낌을 주고, 둥글고 볼록하게 왜곡되어 보이도록 어안 렌즈를 활용하는 연출도 즐겨 사용합니다. 이는 인물이 더욱 나약한 존재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죠. 마치 절대적 존재가 되어 주인공을 관찰하는 시선을 던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란티모스 영화
이미지 출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부조리를 꼬집어가며 기괴하고 독창적인 소재를 제시하는 란티모스 영화에는 항상 아이디어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 따라붙습니다. 그는 실험실에 특정 인물을 가두고 특수한 상황을 부여한 뒤,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듯 소재를 구상한다고 답합니다. 그리스 부조리극에서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는 행위처럼 말이죠. 인간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탐구하는 영화감독이자, 실제로 신화적 소재를 모티브로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퍽 어울리는 소재 선정 방식인 것 같습니다. 란티모스의 영화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서사는 사실 우리 사회의 만연한 문제들에서 가져옵니다. 현실에서도 불합리하고 폭력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규칙과 규제를 고수하며, 교육하고 방관하는 현실이 그의 영화 속 불안하고 불쾌한 우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공통분모
<더 랍스터>

<더 랍스터>
이미지 출처: 영화사 오원

모든 사람이 완벽한 짝을 이뤄야 하는 사회에서 홀로 남겨진 이들은 수상한 호텔로 보내집니다. 호텔에서도 45일 동안 자신의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고 말죠.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주인공 데이비드는 호텔에서 성적 취향, 신발 사이즈, 그리고 체류 기간을 넘겼을 때 변하고 싶은 동물을 선택합니다. 이때 주어지는 옵션은 모두 규격화되어 있습니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허락되지만 양성애는 금지되며, 10단위로 제공되는 신발 사이즈에 발을 맞춰야 합니다. 누군가에겐 하나도 맞지 않는 기준일지도 모르지만 예외란 없습니다. 호텔 매니저는 동물로 변했을 때도 짝을 찾을 수 있지만 늑대와 펭귄이 함께할 수 없듯 서로 간의 공통점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남깁니다. 이는 곧 영화의 주요 맥락이기도 합니다.

<더 랍스터>
이미지 출처: 영화사 오원

호텔에서 짝을 찾기 위해 상대방이 가진 특성을 따라하며 공통분모를 만들려 노력하던 데이비드는 끝내 호텔에서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호텔에서 도망친 자들로 구성된 숲이라는 공간은 커플 지옥으로, 절대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키스를 하다 적발되면 입술을 베어버리는 무시무시한 규율이 존재하는 숲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데이비드는 근시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운명의 상대를 만나며 새로운 위기와 마주합니다.

<더 랍스터>에 등장하는 호텔과 숲, 심지어 짝을 이루지 못하면 추방당하는 도시는 모두 황당한 규칙이 난무합니다. 자유롭게 영화를 관람하던 사람들은 이런 생경한 규칙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최근 인기 있는 연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속에서 출연진들이 데이트권을 획득하기 위해 내달리는 모습이나, 서로 공통점을 열거하며 사랑을 확인하는 모습에 격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현실과 <더 랍스터>의 거리감은 얼마나 될까요?


피로 물든 균형
<킬링 디어>

<킬링 디어>
이미지 출처: A24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심장전문의 스티븐의 수술이 실패해 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스티븐은 죄책감에 사망한 환자의 아들인 마틴에게 시계를 선물하며 챙겨주려는 모습을 보이죠. 그런데 어느날 스티븐의 아들이 걸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마틴은 자신의 가족을 죽였으니, 스티븐도 가족 중 한 명을 선택해 죽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철저히 균형을 강조하며 등가교환의 법칙을 내세우는 마틴은 마치 신처럼 묘사되는데요. 스티븐의 원죄로 인해 그의 가족은 희생양이 되어야만 합니다. 끝내 스티븐이 내리는 결정은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나는 한 편의 부조리극 같습니다.

<킬링 디어>
이미지 출처: A24

<킬링 디어>에서 마틴의 저주는 눈에 보이는 초능력이 아닙니다. 영화는 스티븐이 처한 현실에 대한 논리나 근거 없이 복종할 수밖에 없는 스티븐의 가족을 비추고 있습니다. 불합리한 상황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누가 본인 대신 죽느냐 하는 문제밖에 없습니다. 마틴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문을 품기보다 스티븐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현실 사회 속 만연한 불균형과 불합리한 문제들을 비춰볼 수도 있겠습니다.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던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는 실수로 아르테미스 신의 신성한 사슴을 죽여,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자식을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 왕의 이야기가 그려지는데요. 부조리한 상황 속 스티븐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사랑이란 이름의 억압과 통제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
이미지 출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강으로 투신했지만 천재 해부학자의 손에 의해 되살아난 주인공 벨라는 육체와 달리 유아기 수준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벨라는 빠르게 성장하며 점차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이 들끓지만, 실험체를 보호하고 연구 경과를 관찰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집 밖을 나갈 수 없도록 감금됩니다. 어느날 불손한 의도를 가진 변호사 덩컨이 벨라에게 세계를 탐험하자는 제안을 하며 접근하는데요. 벨라는 결국 그를 따라나서 대륙을 횡단하며 세상을 경험합니다. 그 과정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벨라를 성적으로 소유하려는 포장된 폭력과 억압, 새로운 형태의 통제가 존재하죠. 벨라를 성적으로 소유하려는 덩컨의 우스꽝스러운 악의는 여성과 책, 지적 대화에 가로막혀 바닥을 나뒹굽니다. 세상을 깨우치며 성장하는 벨라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가여운 것들>
이미지 출처: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스 모션 픽처스

란티모스 감독은 10여 년 전, <가여운 것들>의 원작 소설을 읽고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전 작품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엠마 스톤과 <가여운 것들>의 세계와 주인공 벨라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 나누며 영화 제작 및 연출을 도모했다고 하죠. 결과적으로 영화 <가여운 것들>은 2023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을 시작으로 최근 2024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4관왕에 올랐습니다. 부조리를 통해 현실 사회를 들여다보는 란티모스 감독의 기괴한 영화 세계가 호불호가 극명하다고 해도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적 세계관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파격적인 연출, 극단적이거나 또는 허무맹랑한 부조리가 드러날 때죠. 만약 영화가 끝난 뒤에서야 현실 속에 숨어 있던 부조리가 느껴진다면 그의 영화가 어느정도 통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선정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거나 기괴한 분위기가 느껴져도 어느정도 면역이 있다면, 란티모스의 불쾌하고도 아름다운 우화를 감상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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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조

좋아하는 마음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걸 조합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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