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가 조용히 분전했습니다. 따듯한 색감과 잔잔한 드라마만큼이나 극장가에도 은은한 파문을 일으켰는데요. 필자가 영화를 보고 처음 든 감상은 ‘극장 나가면서 마음이 심란해진 사람도 있겠다’였습니다. 좋았건, 나빴건 각별했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였으니까요. 필자는 어땠냐면, 올라가는 스텝 롤을 보며 다른 의미로 심란해졌습니다. ‘저렇게 그리워할 만한 사랑을 했었나?’. 애꿎은 생수통만 들었다 놨다 하다가 벌컥벌컥 마셔버렸습니다.
크게 보자면 <패스트 라이브즈>는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맺지 못한 첫사랑에 김처럼 껴 있는 운명에 대해 더듬어보는 씁쓸한 영화지요. 첫사랑만큼 지나간 운명이라 생각하기 좋은 소재가 있을까요? 설레는 계절인 봄, 지나간 운명을 마주하는 콘텐츠들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니 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티클 같네요.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필자의 감상도 포함되어 있으니 스포일러 주의해주세요.
강렬한 첫만남과 뒤엉키는 운명
히라노 게이치로,
『마티네의 끝에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배경은 크게 두 곳으로 나누어집니다. 두 사람이 유년 시절을 보낸 한국, 운명의 분기점이 된 미국. 필자는 공간을 나누어 진행되는 것을 보자마자, 히라노 게이치로의 로맨스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가 떠올랐습니다. 이 소설도 두 인물을 여기저기로 보내 만나지 못하도록 지독히 괴롭히거든요.
『마티네의 끝에서』는 지적인 중년의 로맨스를 그린, 4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소설인데요. 작품 속 주인공인 두 남녀, 기타리스트 마키노 사토시는 38살, 저널리스트 고미네 요코는 40살로, 절대 어리지 않은 나이입니다. 둘은 프랑스에서 열린 사토시의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에서 만나 서로 강하게 이끌리게 되지만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프랑스에서 헤어지게 되는데요, 각자의 업에 닥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엇갈리게 됩니다.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탄탄대로를 걸어온 사토시는 슬럼프에 빠지고, 요코는 이라크 파견 중 자살 테러를 경험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되죠. 사랑이란 감정을 살뜰히 보살피기엔 두 사람에게 지어진 삶과 업의 무게가 무거웠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강렬히 그리워합니다. 먼 타지에서도 화상 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그 이후 두 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사랑을 키워 가기로 다짐하죠. 하지만 물리적인 거리와 시간은 둘의 만남을 더욱 어렵게 합니다. 게다가 마냥 미래를 기약하기엔 그들은 중년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었고요. 둘의 운명 사이에 수많은 변수가 개입하기 시작했고, 둘은 결국 각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다 서로의 삶이 안정된 지점에서 5년 만에 재회하게 됩니다. 첫 만남 때처럼, 사토시의 낮 공연(마티네, matinée)에서요.
『마티네의 끝에서』는 지나간 운명을 바라보는 시점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작품 곳곳에서 ‘과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라 말하고 있죠. 두 남녀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지금, 이 순간’에 닻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패스트 라이브즈> 속 나영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운명을 지나간 하나의 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건, 단단한 어른이 됐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래된 약속은 아직도 유효할까
에쿠니 가오리/츠지 히토나리,
『냉정과 열정 사이』
사랑은 감정의 형태고, 연애는 그걸 영위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총합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패스트 라이브즈>의 해성과 나영은 사랑을 했지만, 연애를 한 건 아닙니다. 사랑과 연애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겠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냉정과 열정 사이』을 두고 봤을 때는 구분해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품 속 인물들은 각자의 애인들과 연애를 하고 있지만, 과거의 사랑을 그리워하거든요.
『냉정과 열정 사이』는 남자의 시점(Blu)과 여자의 시점(Rosso)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집필한 작가도 각각 남자와 여자이고요. 작가까지 성별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마는, 그만큼 사랑에 얽힌 남녀의 생각은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겠죠. 덕분에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 간의 서로 다른 감상을 엿볼 수 있는 느낌도 들게 하고요.
주인공인 두 남녀, 준세이와 아오이는 한 때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은 옆에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애인으로 두고 있습니다. 준세이는 피렌체, 아오이는 밀라노. 둘 다 이탈리아에 있다는 사실 모른 채, 서로 사랑했던 시절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지요. 비록 애인과 함께 있으나, 열렬히 사랑했던 한때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계기로 둘의 존재를 알아차린 준세이와 아오이는 10년 전, 흘러가듯이 얘기했던 약속을 떠올리는데요. 아오이의 30번째 생일날, 피렌체 두오모에 오르자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피렌체에서 10년 만에 재회합니다만, 이 부분은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합니다. 남녀가 다시 만나기 이전까지, 왜 서로를 그리워하는지, 헤어짐에 엮인 오해는 무엇이었는지 준세이와 아오이의 시점으로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인물들이 10년 전의 연애를 냉정히 바라지 못하고, 스치듯 얘기한 오래전 약속을 지키는 이유를 밝혀 나가면서 준세이와 아오이는 피렌체로 향합니다.
피렌체에서의 재회가 어땠고, 둘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여기에 따로 적어두지 않고, 소설의 제목인 <냉정과 열정 사이>은 과거를 바라보는 태도의 온도를 일컫는 것 같다는 감상만 남기겠습니다. 두 작가는 어떤 태도를 옹호하지도, 지향하지도 않습니다. 중간도 아닌 그 사이의 태도를 묘사하지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해성이 딱 그렇지 않나요? 과거에 머물러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모호한 태도처럼 보입니다.
서툰 마음으로 맞이한 인연
마크 웹, <500일의 썸머>
서툰 마음으로 맞이했던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꺼내 볼까요. 조셉 고든레빗과 조이 데이셔넬이 주연을 맡은 마크 웹 감독의 로맨스 영화 <500일의 썸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톰이 잘못한 거야’. ‘아니, 썸머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미쳐버릴걸’ 하고 열 띈 토론을 나눴던 게 기억이 나네요. 그만큼 <500일의 썸머>는 구질구질한 연애의 한 면모를 잘 보여주면서도, 우리가 놓쳤던 운명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남자 주인공 톰의 관점에서 썸머를 만나고, 헤어지는 500일의 과정을 그립니다. 톰은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남자인데요, 썸머를 보자마자 운명의 상대라고 굳게 믿게 되지만, 숫기가 없기 때문에 우물쭈물합니다. 반면, 썸머는 운명과 사랑 모두 믿지 않는 여자입니다. 사랑으로 규정되는 관계에도 회의적인 태도입니다.
톰은 썸머에게 애걸복걸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운명인데, 썸머는 어쩐지 미적지근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썸만 타는 사이는 아니고, 이제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어떤 관계야?’라는 질문에는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도 못하고요. 그러다가 둘의 관계는 흐지부지 끝나고 마는데요, 그 이후로 톰은 썸머가 그랬던 것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됩니다.
필자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톰처럼 ‘썸머는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부호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몇 번이고 돌려봤었는데요, 그때야 영화가 견지한 태도가 보였습니다. 영화는 운명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은 없고, 선택만이 있다’라는 메시지를 누구나 거친 미숙한 연애 경험에 녹인 것이지요.
‘운명’이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즉, ‘운명=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지나간 연인이 아련하고 그리워지는 건, 그 사람이 ‘나의 유일한 운명이지 않았을까?’ 싶은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현재는 과거의 선택이 만든 결과입니다. 운명이란 후광에 비추어 상대와 과거를 보는 건, 상대의 감정을 호도하는 행위인 건 아닐까요? <패스트 라이브즈>의 해성, <500일의 썸머>의 톰이 ‘혹시나?’하고 기대를 걸었던 건, ‘상대방’이 아닌 ‘운명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키워드는 ‘인연’입니다. 제목은 전생(Past-Lives)이고요. 그렇다면, 운명과 인연은 동의어일까요? 적어도 해성이는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아련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상상으로 채워야 하는 전생과 지금이 아닌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막연함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전생과 과거, 그리고 현재 사이에 운명의 개입을 허용하는 건, 나와 상대방을 처량하게 만드는 일은 아닐까요?
오늘의 작품들을 하나씩 돌아보면, 결국 운명이 아닌 선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운명의 낭만성 속 포진해 있는 미련이라는 덫을 피해 소신껏 선택을 해보면, 멋진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진심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