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떼창’ 담론
이대로 괜찮은가

떼창 현상을 읽는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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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자주 언급되곤 하는 ‘떼창’은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행위 자체는 다양한 집회나 행사에서 보이는 활동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적 가창의 목적은 대체로 같은 정서를 공유하며 연대감을 느끼는 데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행위가 최근 한국에서 떼창이라는 단어로 특별히 구분되어 공연 문화의 주요한 현상으로 조명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떼창은 국내 미디어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떼창에 대한 기술 1
: ‘자랑스러운’ 한국 문화

이미지 출처: Unsplash

미디어가 떼창의 의미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최혜경은 1990년대 중반부터 떼창이 은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됐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떼창은 ‘목적을 가진 특정 집단이 일정한 규칙과 형식에 의해 큰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이르고 넓게는 이 노래에 춤이나 도구 등을 더해 목적성을 이를 증폭시키는 행위’a)까지를 이른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노래를 감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청중의 다양한 행위가 모두 포함된다.

떼창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한국 문화의 우수함을 설명하기 위해 떼창을 근거로 삼는 것이다. 한국 관객들의 떼창이 내한했던 뮤지션들 – 대표적으로는 에미넴, 오아시스, 뮤즈, 콜드플레이 등 – 을 감동하게 했다거나, 케이팝 아이돌의 무대가 해외에서 떼창을 끌어냈다는 이야기가 이에 해당한다. 전자는 한국의 감상 문화가 발전했다는 점, 후자는 케이팝의 탁월함을 강조한다. 어떤 경우든, 기사를 읽는 독자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끔 한다. 이처럼 떼창 현상을 표현하는 현재 우리 미디어의 어법은 자문화에 대한 긍지, 나아가 민족주의적 태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한국만의 특별한 문화로 떼창을 설명하는 기사나 연구에서는 전통이 소환된다. 판소리와 같은 한국 전통 음악 장르에 떼창의 기원이 있다는 것이다. 판소리에서 소리꾼의 공연에 반응하는 관객의 ‘추임새’가 하나의 음악적 행동이며 떼창의 기원이라는 추측은 일면 유효하지만 그것만으로 떼창의 특수성이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한편, 떼창을 ‘한국적인’ 현상으로 읽어내는 과정에서 타 문화권의 문화와 한국 문화를 비교하기도 한다. 가령, 문화심리학자 한민은 일본인들은 선을 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인들은 타인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떼창을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떼창이 판소리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거나, 한국인의 보편적 성향과 연관되어 있다는 해석은 불가능한 설명은 아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떼창이 지금 한국 음악 문화를 대표한다고 여겨질 만큼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해석이 떼창을 ‘민족성’이라는 한정된 개념을 통해서만 보게 한다는 것이다.


떼창에 대한 기술 2
: 공연의 일부일까, 방해 요소일까

이미지 출처: Unsplash

떼창이 얼마나 대단한 현상인지 강조함으로써 소위 ‘국뽕’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미디어에 대한 의문은 간접적으로 공유되어 왔다. 이는 ‘공연장에서의 떼창이 적절한지’를 묻는 일부 기사들에서 드러나곤 한다. 가령, 샘 스미스 내한 공연에서의 떼창을 보도한 한 기사 아래 댓글창에는 관객 일부가 외국 뮤지션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떼창 부심’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남겼다. 이러한 비판은 또 다른 기사에서 ‘떼창 반대론자’들의 입장으로 소개되었다. 미디어에서 ‘한국은 역시 떼창’이라고 강조하는 탓에 내한 공연에 방문하는 청중이 불필요한 의무감을 갖게 되었다는 게 반대의 전제였다.

이는 ‘민족성’에 기댄 떼창 담론의 한계를 지적하는 동시에, 떼창을 논하는 미디어의 두 번째 방식을 드러낸다. 바로 떼창이 과연 애초에 적절한 공연 예절인지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기사들에서는 ‘공연이란 무엇인지’, ‘청중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소개하고 대치시킨다. 기사 내의 떼창 찬성론자들은 ‘떼창은 공연자와 관객의 소통을 위한 행위’라고 보는 반면, 반대론자들은 한국인의 ‘떼창 부심’을 경계하는 것을 넘어, 근본적으로는 ‘공연이란 조용히 봐야 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떼창이 공연을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인지, 방해하는 요소인지 고민해 보게 하는 글은 공연과 청중, 노래와 관련된 여러 입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던져지는 질문은 떼창이 감상의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상정한다. 즉 떼창을 공연의 일부로 존중하기보다 그것이 ‘소음’일 가능성을 내포하는 셈이다. 청중 또한 능동적으로 공연을 만들어가는 주체라고 보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현재 미디어가 떼창을 기술하는 두 번째 방식은 다소 협소한 논의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청중의 반응을 원곡 음원 또는 무대 위 공연자의 권위를 해치는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은, 음악을 이해하는 방식 중 가장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입장, 즉 연주자와 작품 중심의 사고에 기반하기에, 그 너머에 존재하는 공연 현장의 다양한 맥락들과 주체들을 배제하기 쉽다.


청중의 주체적 음악 실천,
떼창

떼창 관객
이미지 출처: 문화체육관광부

떼창 문화가 기본값으로 존재하는 ‘케이팝 팬덤’에 관한 일부 연구는 대안적 관점을 제공한다. 애초에 케이팝 팬덤의 떼창을 분석할 때는 기존의 기술 방식을 적용하기 어렵다. 케이팝 팬덤의 떼창에 전통이 있다면 그것은 먼 과거가 아니라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이돌 팬덤 문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이미 이 실천은 공연의 방해요소가 아니라 빠질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그 중 최혜경과 김정원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떼창을 실제 하는 사람들, 팬덤의 입장에서 그러한 행위를 왜 하고, 어떤 목적에서 하는지를 조명한다. 언론이 팬덤의 떼창을 단순히 무대의 성패를 결정짓는 하나의 요소로 환원하는 데 비해 두 연구자는 공연 현장에서 발생하는 청중의 반응이 사회문화적으로 갖는 의미를 논한다. 떼창을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한 뒤, 팬덤이 이를 공동체적이고 ‘창조적 놀이’로서 수행한다고 분석하는 최혜경은 “대중음악가가 무대 위의 연출자, 예술가라면 한국 관객은 무대 아래의 연출자, 예술가”b)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김정원의 연구는 실제 아이돌 팬덤의 일원으로서 경험한 떼창을 서술한다. 그는 떼창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과정의 기쁨과 더불어 떼창을 통해 이루어지는 타 팬 및 공연자와의 교감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팬덤은 단순한 청취자가 아니라 또다른 공연자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는 음악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서로를 결속시키는지,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커뮤니티가 공연자와 산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새로운 관심사가 된다. 풍선이나 응원봉을 흔들거나, 곡의 특정 구간에서 멤버의 이름을 외치거나, 뛰고 춤추는 것. 이를 위해 연습하고 학습하는 모든 과정. 사소해 보일지도 모르는 무대 아래의 움직임은 청중 간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음악 산업을 지탱하고 있다고 과언이 아닌 케이팝 팬덤의 실천은 이러한 연대에 기반하며, 오늘날 대중음악의 생산 과정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동영상 출처: aespa 공식 유튜브

예를 들어, 2000년대 중반 케이팝 팬덤 내에서 떼창이 보편화된 이후, 기획사들은 발매하는 곡마다 떼창에 용이한 ‘응원법’을 만들어 보급한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공식 팬카페에 ‘글’의 형태로 공유되었다면, 최근에는 가수가 직접 등장해 이를 설명하는 가이드 영상이 업로드된다. 덕분에 팬덤은 이전보다 순조롭게, 글로벌 팬들과도 함께 떼창 참여를 위해 준비할 수 있다. 이처럼 떼창은 산업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 팬덤의 능동적 행위라고도 의미화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떼창을 통해 창조적 예술가, “공연의 연주자이자 기획자,” 그리고 “제작자”의 역할c)까지 해내는 청중에게 눈을 돌릴 때 가능하다. 동일한 현상도 이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기술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에, 수용자인 청중 중심으로 떼창을 주목한 연구들처럼 더 풍성한 맥락에서 이 문화를 읽어내는 미디어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케이팝 팬덤의 떼창은 어떤 떼창보다도 가장 다채롭고, 기획된 음악적 행동으로서 특수한 성격을 띤다. 하지만 어떤 공연장에서의 떼창이든지 케이팝 팬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문화의 우수함을 드러내는 현상으로만 표현되거나, 공연 외적인 요소로 여겨질 수 없다. 지금껏 미디어가 그린 떼창은 떼창을 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제는 과거의 시각에서 벗어나 능동적 청중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진정 우리 공연 문화를 이해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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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

진실한 것들을 찾아 오래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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