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보다 냉소를
선택하는 시대

친절이 경시된 사회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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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예진 에디터의 오리지널 에세이 ‘냉소보다 친절을 선택한 당신에게’를 읽었는가? 이 글은 친절과 연결을 일깨우는 글이다. 우리는 친절로 연결되며, 연결로써 생존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 그리고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시간적 여유, 공간적 여유가 부족한 도시의 삶에서 친절이란 가장 잃기 쉬운 가치다. 만원 지하철에서는 아주 작은 불쾌감이 분노로 점화되는 순간을 여럿 겪고, 오늘 마주한 일들이 무거워 타인의 어려움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일깨운다. 친절이 어떻게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는지. 우리는 왜 개인과 개인 사이에 선명한 금을 그었는가.


친절이 경시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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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친절함은 금기다. 자유로운 경쟁 시장에서 친절함이란 곧 손해이며, 낙오로 연결될 수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고 스스로를 계발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일에 더 집중한다. 인간관계에서는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일이 팽배하고, 호의와 신의보다는 거리감과 건조함 속에서 편안해 한다. 우리 사이에는 친절 대신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가 자리잡았고, 이는 암묵적으로 개인의 성장과 발전의 동력으로 여겨져 왔다.

역사적으로도 친절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과 합리에서 산업혁명 시대의 효율과 생산성,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 성장과 부의 극대화까지. 현대 사회가 발전해온 이 과정에 친절이 개입할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친절의 여부는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 중요하게 논의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친절이 젠더화된 까닭도 있다. 친절은 여성의 것으로 규정되어 왔고, 카리스마는 남성의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여성화된다는 것은 그 사회적 중요성이 경시됨을 뜻한다. 남성은 물론, 경쟁 시장에 진입한 여성 또한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여성적인’ 모습과 분리되고자 노력한다. 이 역시, 성장과 성공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친절의 가치가 폄하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이는 친절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친절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친절의 결여는
어디로 이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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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교수 Morna Laing은 친절이 결여된 사회를 착취에 기반한 패션 시스템으로 연결한다. 패션 산업이 의류 공장의 노동자들을 대하는 방식, 패션 산업이 자연을 착취하는 방식 이면에는 친절에 대한 소외가 있다고 본다. 패션 산업뿐일까? 현대 사회는 사람과 자연의 착취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왔다. 공존의 중요성에 대한 무지, 지속가능성에 대한 경시는 친절이라는 일상적인 태도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절의 결여는 단순히 옆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지에 따라서, 즉 가치관으로부터 태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옆 사람과 호의를 나누고 연결됨을 중시하는 사람이 먼 나라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삶에도 관심을 둘 수 있다. 친절의 개념은 개인, 사회, 국가, 세계로 확대되며, 각 주체가 사람과 자연을 대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즉, 친절의 부족은 거시적인 사회 문제로 연결된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생산에 초점을 맞춰 친절의 개념을 확장한다. 타인의 삶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활동을 모두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버스를 운행하는 기사, 곡물과 과일을 재배하는 농부, 물건의 생산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의 노동는 모두 누군가의 편리를 위한 친절한 행위다. 이 관점에서 보면, 친절을 경시하는 사회가 곧 착취하는 사회로 연결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바쁜 일상에 매몰되어 친절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회와,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되어 ‘생산’하는 직업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회는 서로 이어져 있다.


친절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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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은 기본적인 욕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다. 우리는 친절과 호의에 기대어 살고 있다. 이미 친절과 연결, 공존의 가치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책이 많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인류가 성공적으로 번식한 이유로 상호작용과 협력을 꼽았고, <따뜻한 인간의 탄생>에서는 생존과 번식의 관점에서 따뜻함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우린 다정함을 바탕으로 공생해왔고, 우리에겐 체온 유지를 위해서도, 심리적·사회적 안정을 위해서도 따뜻함이 중요하다.

생물학적 관점뿐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도 친절은 전략적인 행위다. 친절은 우리가 온전히 혼자일 수 없다는 취약성과 의존성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에서 나아가 우리의 취약함을 약점으로 인식하지 않고 서로 연결하고 공존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 우리가 타인과의 연결과 공존으로 생존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인지한 행동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얕보는 친절이 사실은 전략적으로 탁월한 생존 전략이라는 점이.

친절의 부족이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설명했듯, 친절의 확산을 통해서도 사회의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일상과 정치를 구분하는 경계를 무너뜨렸던 것처럼, 개인적인 친절 행위는 공공의 연대로 확대될 수 있다. 일상의 친절과 일상의 연결이 모이면 거대한 연결이 이루어진다.

개인을 점이라고 보았을 때, 사회는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에 존재한다. 즉 개개인이 연결되어야 비로소 사회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때 친절은 타인과의 연결을 매개한다. 친절은 개개인을 연결할 수 있으며, 나아가 공동체를 결속할 수 있다. 사회는 친절로써 연결되고 기능한다. 어떤가? 냉소보다 친절을 택할 이유로 충분한가?


한국의 저출산 문제에 대해 한 외국인이 ‘마을’의 상실을 근본적 원인으로 꼽는 영상을 보았다. 그 말의 타당성을 떠나, 그가 짚는 문제는 명백하다. <응답하라 1988>에서 보았던 ‘함께 키우는 모습’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린 서로 친절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지 않기에 힘들다. 파편화된 개인이 되었기에, 생존이 피로해졌음은 분명하다. 한 번의 친절이 모이고 멀리 확산되어 작은 변화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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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량

패션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보였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포용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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