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소설 속에서 탐정들은 수많은 난제를 마주합니다. 잘 맞지 않는 배우자나 상사와 부딪히는 와중에도 테러 범죄나 살인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야 하죠. 때로는 자신의 인생의 가장 큰 난제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끊임없이 고뇌와 성찰을 반복하는 탐정들에게서 현실 속에서 발버둥 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고는 합니다. 이런 내적 친밀감 때문인지 그들이 의연하게 최악을 대하고 태연하게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나도 앞으로 이렇게 살고 싶다.’라는 열망이 불쑥 솟아오르곤 하죠. 성장하는 탐정 홀리 기브니부터 긍정의 힘을 보여주는 캐드펠 수사, 위대한 꾸준함의 대명사 마르틴 베크 형사까지. 추구미 리스트에 추가하고 싶은 탐정들을 모아봤습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홀리 기브니
홀리 기브니는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 빌 호지스를 돕는 조력자로 처음 등장합니다. 처음 소설 속에 등장한 홀리는 어딘가 기묘한 인상을 풍깁니다.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듯 말을 해 상대방을 답답하게 하죠. 게다가 자기 뜻대로 홀리를 좌지우지하려는 엄마의 통제 아래 자라 어딘가 모르게 무기력해 보입니다. 사실 홀리는 어려서부터 계속된 불안 장애, 수면 장애, 우울 장애 등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중얼대며 이야기하는 습관 때문에 ‘옹알옹알이’라고 불리며 또래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죠.
이런 유년기의 우울한 그림자 아래, 처음 등장했을 무렵의 홀리는 ‘반짝이는 재치 한 조각, 은근한 분위기 한 자락 없는’ 사람으로 묘시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홀리는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으로 짜릿한 반전 매력을 보여주죠. 그리고 점차 자기주장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며 자신의 의견을 존중할 줄 모르는 엄마에게 일침을 날립니다.
“그래서 뭐요.”
홀리는 이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올리비아의 차고 내가 훔친 것도 아니잖아요. 오늘 중으로 돌아갈게요, 엄마. 그때까지 그냥 좀 내버려둬요!”
_스티븐 킹, 『미스터 메르세데스』
홀리가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는 장면에서는 범인을 때려눕힐 때보다 오히려 더한 전율을 느낄 수 있는데요. 조연에서 시작해 점차 없어서는 안 될 주연으로. 그녀는 홀린듯한 매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자신에게 끌어당깁니다. 빌 호지스는 지난날 자신이 홀리에게 가졌던 편견을 후회하며 함께 일하게 된 그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작년에 소버스 사건을 통해서 터득했다시피 홀리의 말을 귀담아들으면 그만 한 보람이 있다. 그녀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가끔은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 생각을 하고 묘한 직감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겁이 많은데도 불구하고(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 용감해질 때가 있다.”
_스티븐 킹, 『엔드 오브 왓치』
내성적인 성격과 강박적인 습관에도 불구하고, 홀리는 언제나 자신의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차분히 자신을 관찰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용기도 보여주죠. 그녀가 언제나 지니고 있는 ‘홀리식 희망’ 또한 이유 없는 무분별한 긍정이 아닌 치밀한 관찰과 분석 아래 철저하게 계산된 현실적인 긍정입니다. 이러한 이유 있는 긍정에 그녀의 삶의 태도를 더욱 본받고 싶게 되죠.
“그녀는 벌써부터 페니 달과 만나는 동안 담배가 얼마나 간절해질까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의뢰인과 만나면 항상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그녀는 훌륭한 탐정이고 그것은 천직이라는, 소명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최초 면담은 가능한 한 피트에게 맡기는 편이다. 내일은 그럴 수가 없다. 제롬 로빈슨에게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할까 싶지만 그는 현재 상당히 특이했던 자기 증조부를 다룬 책의 저자 교정을 보는 중이다. 부탁하면 와 줄 테지만 방해하고 싶지 않다. 이번만큼은 참고 견뎌야 한다.”
_스티븐 킹, 『홀리』
홀리는 스티븐 킹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중 하나인데요. 필자도 소설에서 홀리를 마주칠 때마다 그녀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하게 됩니다. 이런 홀리의 성장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싶다면 『빌 호지스 3부작』을, 홀리의 탐정으로서의 활약을 먼저 보고 싶다면 최근 출간된 『홀리』의 일독을 권합니다. 아마 어떤 모습의 홀리를 처음 접하든 홀리라는 캐릭터에 반하게 되실 겁니다.
냉소적인 세상에 한없는 긍정을,
캐드펠 수사
비판과 칭찬 중 더 쉬운 일을 고르라면 아마 비판일 겁니다. 칭찬은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관찰이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어떤 대상을 싫어하는 일은 참 쉽죠. 우리와 조금 다른 주파수를 가진 사람들은 쉽게 혐오와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따뜻한 시선의 힘을 알려주는 탐정이 있습니다. 바로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캐드펠 수사입니다.
캐드펠 수사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퇴역 군인으로 말년에 수도원에 들어와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인데요.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으며 쌓아온 남다른 지혜와 통찰력을 숨기고 있죠. 캐드펠 수사의 따뜻한 시선과 긍정적인 마음을 이야기하기 전 꼭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의 취미인데요. 캐드펠 수사는 허브 밭 가꾸기를 좋아해 소설 속에서 종종 유랑 생활을 하며 수집한 이국적인 식물들을 정성껏 기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바로 긍정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캐드펠 수사만의 마음 챙김 방법인 셈이죠.
“캐드펠 수사는 아침기도가 시작되기 한참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흙이 마를세라 양배추 모종을 옮겨 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온통 식물의 탄생과 성장과 번식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무덤이나 유골함이나 참혹한 죽음에 대한 것은 떠올리지도 않았으니, 그 주인공이 성자든 죄인이든, 아니면 그 자신처럼 결점 있는 평범한 사람이든 그에겐 아무 상관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무엇도 그의 마음의 평화를 뒤흔들 수 없었다.“
_엘리스 피터스,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현재까지 중세 유럽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수도원의 기상 시간이 새벽 3시 15분인 것을 감안하면 캐드펠 수사는 한밤중에 일어나 부지런히 일상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엄청난 자기관리의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역시 타인에 대한 다정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 같기도 합니다.
거짓말, 배신 그리고 살인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캐드펠 수사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도 죽음과 전쟁보다는 삶과 생장 쪽에 마음을 쓰려고 늘 노력하죠. 사람에게 늘 실망하는 우리에게 인간은 오류투성이고 실수를 범하는 존재이니, 생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위로를 건넵니다.
“내가 받드는 분은 스티븐 왕도 모드 황후도 아니란다. 평생토록 나는 오직 한 분의 왕을 위해서만 싸워왔어. 하지만 헌신과 충성의 자세는 늘 높게 평가하지. 그 헌신과 충성의 대상이 기대에 부응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지. 너의 충성심도 나의 충성심만큼이나 성스럽단다.“
_엘리스 피터스, 『시체 한 구가 더 있다』
캐드펠 수사는 사랑이란 어떤 용서나 변명도 필요 없는 감정이자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힘이라고 말하죠. 십자군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중세 영국처럼 매일이 전쟁터인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가호만큼이나 인간들의 작은 도움의 손길도 중요하다고 믿었던 캐드펠 수사의 태도를 살펴보고 싶다면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추천합니다.
꾸역꾸역 살아내는
평범한 삶의 위대함이란,
마르틴 베크 형사
새해 다짐을 적은 노트를 뒤적거리다 꾸준함의 중요성을 떠올렸습니다. 싫어도 그냥 하는 것에 숨어있는 위대함에 대해서요. 꾸준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마르틴 베크 형사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틴 베크 형사는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인 해준의 롤 모델이기도 한데요.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잠복하고 인내하며 범인을 잡으려 노력하는 해준의 모습에서 마르틴 베크 형사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뒤틀리고 늘어진 시체들이 버스 전체에 널려 있었고, 온 데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마르틴 베크는 그럴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시선을 뗴고 뒤로 돌아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에 스스로를 다그쳐 세부 사항을 빠짐없이 머리에 저장했다.”
_마이 셰발, 페르 발뢰, 『웃는 경관』
마르틴 베크 형사는 자리를 뜨고 싶어도 몸을 가눌 수 없는 기침이 나와도 자세를 고쳐잡고 수사에 임합니다. 그의 아내의 말처럼 그는 ‘경찰이 그 혼자인 듯’ 스테이플러로 묶인 보고서를 밤을 꼬박 새워 살펴보기도 하죠. 쌓인 서류 더미 뒤에서 스톡홀름의 좁은 골목에서 그는 끊임없이 경찰관으로서의 삶과 개인의 삶 사이에서 고뇌합니다. 하지만 마르틴 베크 형사는 위대한 영웅이나 비현실적인 천재에 가까운 인물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곁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인물에 가깝죠. 그래서인지 그가 보여주는 꾸준함에 더욱 경외심을 갖고 귀 기울이게 됩니다.
“더이상 사생활이 없었다. 쉬는 시간도 없었다. 임무와 책임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살인범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이상, 날이 밝은 이상, 공원이 존재하는 이상, 공원에서 노는 아이가 있는 이상, 오로지 수사만이 중요했다.”
_마이 셰발, 페르 발뢰, 『발코니에 선 남자』
마르틴 베크 형사가 자신의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삶. 그런 삶의 방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기에 우리는 매일 자기 계발서를 코너를 기웃거리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자기 계발서보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마르틴 베크 형사의 평범한 위대함은 물론 탄탄한 스토리의 재미까지 모두 챙겨가실 수 있을 겁니다.
추구미와 도달 가능미는 다르다고 했던가요. 그래도 필자는 홀리 기브니처럼 성장하며, 캐드펠 수사처럼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리고 마르틴 베크 형사처럼 미련스럽도록 꾸준하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탐정들이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하듯 제 인생의 사건들도 잘 해결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삶이라는 미스터리에 부딪혔을 때 탐정들에게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