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노출은
선진화된 문화인가

신체 노출의 진보와 보수는
어떻게 구분되었는가
Edited by

개인적으로 2025 SS 파리 패션위크를 보고 기억에 남는 건 엉덩이다. 소셜 미디어에 바퀘라(Vaquera) 런웨이를 걷고 있는 모델들의 엉덩이 영상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바퀘라의 런웨이 사진은 앞이 아니라 뒤에서 찍어야 했다. 새삼스럽진 않다. 브랜드의 런웨이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몸의 이쪽저쪽 부위를 보여주며 시선을 끄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점점 그 드러냄의 방식이 농밀해지고 있지 않은가? 분명 우리는 반신반의하며 언더붑의 유행을 지나쳤고, ‘노팬츠룩’이라는 이름으로 팬티만 입고 나온 미우미우의 모델을 목격했으며, 제니가 <만트라>에서 입고 나온 아주 짧은 ‘마이크로 미니스커트’도 보았다. 실제로 점점 포르노가 주류화되는 문화적 추세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기도 한다(Choi & DeLong, 2019). 섹슈얼리티가 더 과감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아마도 도파민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높은 역치 때문이거나, 수많은 시선이 교차되는 소셜 미디어에서 주목을 이끌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그렇다면 섹슈얼리티의 지나친 강조, 괜찮을까? 이 질문이 오히려 지나친 불편함처럼 느껴진다면, 유교걸의 괜한 기우처럼 느껴진다면, 섹슈얼리티의 ‘자유로운’ 표현을 왜 옹호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섹슈얼리티의 농도가 높은 시대에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건 신체의 노출에 얽힌 관념을 깊숙이 뜯어볼 시기라는 뜻이다.

Miu Miu 2023 F/W. 이미지 출처: Grazia
제니 만트라 뮤직비디오 중에서. 이미지 출처: Vogue hk

노출은 진보적인가

신체의 노출이 진보적인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진보가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뜻할 때 그 방향은 정의하기 나름이겠지만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제약으로부터의 탈피에 주목해보자면, 분명 노출은 진보였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10년대에는 장옷 벗기 운동으로 얼굴을 노출했고, 1920년대 여학생을 중심으로 여성복을 개량해 편안한 통치마를 입기 시작하면서 발목과 종아리를 드러냈다. 이 맥락은 봉건적 가부장제에 저항하거나, 여성의 사회 활동을 위한 것이었다. 서구의 문물을 수용하는 것은 저항과 해방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유교 가부장 사회가 여성을 억압하는 관행에 대한 저항으로서,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진 곳들을 드러낸 것이다.

이후 20세기를 관통하는 한국의 복식사를 살펴보면, 서양의 양복과 양장이 보편화되고 서양의 트렌드를 따르는 흐름이 주도적이었다. 몸을 드러내는 맥락에서 보면 196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미니스커트와 핫팬츠가 대표적인 사례다. 1960-70년대 청년 문화는 서양, 그중에서도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이는 기성세대에 반하는 저항 정신을 내포하기도 했다. 특히 미니스커트는 단속의 대상이기도 하였으니, 맨다리의 노출은 집단의 (가부장적) 규율과 개인의 주체적 표현 사이 팽팽한 갈등 위에 놓여 있던 셈이었다.

이처럼 여성의 신체 노출이 주체성의 표현이자,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선구적인 위치를 나타냈던 시절이 있었던 것도 맞다. 서구의 영향을 받아온 비서구 국가로서,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것은 진보로 여겨진 오랜 역사가 있다. 그러나 이미 서구화, 현대화된 지금은 어떨까. 지금도 서구의 트렌드는 우리가 뒤쳐지지 않기 위해 쫓아가야 하는 중요한 흐름일까? 우리가 서구의 스타일을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것이라 여기고 수용하는 것은 100년여의 시간 동안 고착화된 관성의 행동이 아닐까? 게다가 우리에게는 여전히 몸을 드러내기 쉽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이 분위기는 여전히 ‘보수적인’ 것일까?

1970년대 거리 모습. 이미지 출처: 조선일보

여성의 몸은
언제부터 섹슈얼해졌는가

노출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문화는 보통 ‘보수적’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노출은 진보적인 것인가? 물론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몸을 감싸는 것을 ‘보수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일을 터부(taboo, 금기)시하고 공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몸을 제한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여성의 몸을 가리는 것은 기존의 방식을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 관점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호한 부분이 있다. 우리가 지금 몸을 인식하는 방식은 서구의 시각을 수용한 부분이 많은데, 노출 자체를 섹슈얼하게 여긴 것은 서구의 시각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1900년대 말 이루어졌던 한복 개량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주도하였는데, 그 이유는 조선 후기에는 한복 저고리가 짧아 물동이를 이거나 하면 가슴이 드러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는 서술을 보면 근대 이전의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의 가슴을 노출하는 것이 지금과 같은 성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았던 듯하다. 물론 양반 여성은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쉽지 않아 장옷을 쓰고 다녔던 것을 생각하면, 이 부분엔 아마 계급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역시 성적인 맥락은 아니었다. 즉 서양의 시각을 수용하게 되면서 여성의 몸이 섹슈얼한 ‘대상’으로 변모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1900년대 말 이루어졌던 한복의 개량은 여성의 가슴을 감추어야 하는 성적인 대상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저고리의 길이가 조금 길어졌고 가슴을 꽁꽁 동여매서 치마를 입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근대화와 성적 대상화가 연결되는 다른 기록도 있다. 1930년대부터 개화기 신소설의 삽화에서 여성 몸에 대한 관음증적인 시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 이때 ‘미인’의 표준과 전형에 대한 글이 번역되면서 비례와 발육을 강조하는 여성 신체미의 근대적 기준, 즉 서구적 기준이 확산되었다는 점 등이다. 그러니까 서양의 손을 거쳐 한복이 몸을 가리게 된 아이러니한 역사가 있으면서도, 서양의 눈을 수용해 여성의 몸을 더 굴곡지게 인식하기 시작한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몸의 은폐는 보수적이고 노출은 진보적이라는 가치 판단은 역사를 거슬러갈수록 모호해진다.

(물론 이것이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성적으로 소비한 적이 없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신윤복의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 여성 신체의 관능성을 재현해온 역사는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시각이 반영된 이후 여성의 신체에서 섹슈얼리티가 더욱 강조되는 것은 분명한 경향으로 보이고, 현대인으로서 우리의 시각 역시 서구화된 측면을 부인할 수 없으므로 본 글에서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1940년대 길이가 긴 저고리의 모습. 이미지 출처: 우리역사넷

섹시와 외설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렇다면 왜 서구 문화는 ‘개방적’이라고 여겨지는가? 현대에 몸을 드러내는 옷차림은 왜 ‘개방적’이라고 표현되는가? 이 개방이라는 단어에는 몸의 개방뿐만 아니라 외부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는 어떤 적응의 능력, 앞서있는 진보의 상태를 포함하지 않는가? 이 앞서고 뒤선 순서의 감각을 돌이켜보자.

우선 섹시와 외설의 개념을 구분해보고자 한다. 전자는 다소 긍정적인 뉘앙스를, 후자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내포한다. 외설적이란 것은 문란함을 뜻하고, 섹시함은 주체적인 당당함, 자기애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럼 누가 섹시할 수 있는가? 백인 여성의 기준을 잘 체화한 모습이야말로 섹시의 기준이 아닌가?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아시안 여성의 신체 노출보다 백인 여성의 신체 노출에서 더 ‘주체성’이 인정되는 경향을 설명할 수 있다. 서구의 성적 표현이 곧 ‘개방성’으로 긍정되어 왔던 것이다. 보통 백인 여성의 노출은 자연스럽게 수용하지만 아시안 여성의 노출은 특히 더 성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즉, 서구의 성적 표현은 긍정적으로 맥락화되어 왔다.

더불어 인종차별의 관점에서는 유색인종을 가리켜 문란하다고 손가락질한 역사가 있다. 인종마다 결부된 섹슈얼리티에 관한 인식이 있는데,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인은 성적으로 과도하게 문란하다고 여겨졌고, 아시아 여성은 성적으로 수동적, 복종적이라고 여겨져 왔다(Choi & DeLong, 2019). 이렇게 인종화된 섹슈얼리티는 백인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결과물로, 비서구 여성에 대한 환상, 비서구 문화에 대한 타자화가 뒤섞여 있다. 여기서 무엇이 섹시하고 무엇이 외설적인지 판단하는 시각은 중립적이지 않다. 분명한 건 서구, 백인, 남성으로 시각의 권력이 수렴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비서구의 성적 표현은 미개한 문란함으로, 서구의 성적 표현은 진보된 성적 취향으로 포장되어 왔다. 선교사가 구한말 시기 여성의 옷차림을 ‘교정’한 것 역시 ‘지배’ 문화의 확산을 통해 미개한 전근대적 문화를 개화하는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서구 문화를 개방적이라고 여기는 시선에 이미 서구 중심의 위계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우리가 여성의 신체 노출을 인식하는 맥락에는 서구적인 문화, 즉 ‘선진화된 문화’라는 사대주의적 인식을 배제할 수 없다. 섹시와 외설은 서구에 의해 구분되어 왔고, 섹시에 달라붙어 있는 개방성, 진보성은 서구이기에 강조된 특징들이었다. 이제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됐다. (서구의) 성적 개방성은 정말로 ‘진보적인가’’?

이미지 출처: Unsplash

서구 백인 여성의 섹슈얼리티 역시 백인 남성의 응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오히려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하는 경향에 빠진다는 지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슈얼리티의 과잉을 긍정할 수 있을까? 위에서 살펴보았던 진보의 개념을 생각해본다면, 서구의 개방성은 과연 사회의 ‘긍정적’ 발전에 기여하는 진보적 특징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는 오히려 성적 억압을 반복하고 답습하는 방식이 아닐까? 이 질문을 서구 문화의 전체로 확대해보겠다. 서구의 문화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선진화된 것인가? 정말로 서구는 선진화되어 있는가?


Picture of 김희량

김희량

패션을 애증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세상이 보였습니다.
사람과 세상을 포용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에디터의 아티클 더 보기


문화예술 전문 플랫폼과 협업하고 싶다면

지금 ANTIEGG 제휴소개서를 확인해 보세요!

– 위 콘텐츠는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로 ANTIEGG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 위 콘텐츠의 사전 동의 없는 2차 가공 및 영리적인 이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