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K-Pop은 ‘보는 음악’을 넘어 ‘보이는 음악’의 단계에 들어선 듯합니다. 음악은 여전히 K-Pop을 지탱하는 뿌리이자 핵심이지만, 그만큼이나 음악과 공명하는 비주얼의 힘이 강해지고 있죠. 콘셉트에 맞춰 제작한 무대의상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꾸며낸 의상과 스타일링, 국내외 유수의 인물과 협업으로 제작한 콘셉트 포토와 뮤직비디오 등, K-Pop을 보이게 만드는 요소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K-Pop의 제작 과정 전반에서 함께하는 디자인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티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네이밍과 브랜딩부터, 웹 콘텐츠와 팝업 스토어 등 작금의 마케팅 흐름을 따를 때에도 디자인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죠. 특히 최근 K-Pop 산업은 그래픽, 브랜드, 웹, 공간, 3D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팀과 협력하며 독창적인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아티스트의 개성을 강화하기도, 작품이 뻗어나갈 저변을 넓히기도 하는, K-Pop과 협력하며 수준 높은 디자인을 뽐내는 국내 디자인 스튜디오 네 곳을 소개합니다.
HuskyFox
: 브랜딩의 문법으로 아티스트를 정의하다
뮤직비디오, 콘셉트 포토, 하이라이트 메들리, 티저 영상 등 K-Pop 그룹이 자신을 대중 앞에 내보일 수 있는 방도는 다양합니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우리에게 당도하는 건 아티스트의 이름과 로고이죠. 기획사는 그룹의 콘셉트와 방향성, 트렌드, 차별성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며 그룹명과 그에 어울리는 로고를 제작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그 과정이 매력적인 상품을 만드는 방식과 가까웠다면, 2020년대 들어 새로운 방식이 자주 등장하고 있죠. 2022년 데뷔한 르세라핌LE SSERAFIM은 쏘스 뮤직이 브랜드 디자인 회사 허스키폭스Huskyfox와 힘을 합쳐 브랜딩한 그룹입니다. 방대한 세계관을 적용하기 보다 자기 확신과 의지를 담은 “I’m Fearless”를 브랜드 미션 삼아, 문장을 애너그램해 만든 그룹명을 채택한 점이 흥미롭죠. 또한 애너그램의 과정을 시각화한 로고는 아주 정교하게 짜인 브랜드의 시각 정체성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선사했습니다.
허스키폭스는 네이버 페이NAVER Pay, 웨이브waave, KT 기가지니GIGA Genie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과 협력하는 디자인 회사입니다. 금융, IT, 유통, 통신 등 기업과 상품을 브랜딩하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그들이 K-Pop의 요소를 브랜드 디자인의 관점으로 풀어내는 작업 역시 아주 매력적이죠. 방탄소년단BTS의 ‘LOVE YOURSELF’ 시리즈,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의 ‘THE DREAM CHAPTER’ 시리즈 역시 기존 K-Pop의 콘셉트와 기획 방식에 미려한 BI, 그래픽 디자인의 요소를 더해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최근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데뷔한 HYBE의 미국 현지화 그룹 캣츠아이KATSEYE 역시 허스키폭스와 협업으로 그룹의 정체성을 만들어낸 사례죠. 이처럼 보다 정교하고 다채로운 브랜드 디자인의 문법을 K-Pop으로 이식하며 다양한 매력을 만들어내는 사례를 앞으로는 더 자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E SSERAFIM” 프로젝트 페이지
“방탄소년단 ‘Love Yourself’ 시리즈” 프로젝트 페이지
PRESS ROOM
: 콘셉트를 증폭하는 피지컬 앨범과 굿즈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바이닐(LP) 인기는 꾸준히 늘고, K-Pop 앨범은 그저 팬사인회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그럼에도 K-Pop에서 피지컬 앨범은 그룹과 작품의 방향성을 함축하는 총체라고 할 수 있죠. 과거부터 K-Pop 앨범은 단지 쥬얼 케이스 패키지를 넘어, 다양한 콘셉트를 집약한 모습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나아가 요즘은 형태와 구성, 크기 등 아티스트와 앨범을 부각할 수 있는 디자인을 채택하고, 또 앨범을 넘어 시즌그리팅, 달력, 팬클럽 키트 등 여러 MD를 선보이고 있죠. 프레스룸PRESSROOM은 지금까지 수십 건의 K-Pop 앨범과 MD를 제작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각각의 아티스트에 맞는 콘셉트를 발굴하고, 또 작품의 특성에 맞는 패키지와 디자인을 선보이는 작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최근 K-Pop에서 피지컬 앨범과 MD는 그 목적을 채우는 걸 넘어, 팬들에게 다양한 볼거리, 즐길 거리를 제공하는 걸 요점으로 삼습니다. 콘셉트 포토와 함께 멤버들의 인터뷰를 수록한 책자를 만들고, 속칭 ‘일코’할 수 있도록 아이돌의 콘셉트는 녹이되 멋진 디자인으로 꾸민 굿즈를 만드는 게 대표적이죠. 프레스룸 역시 다양한 K-Pop 그룹의 앨범, 시즌 그리팅, 굿즈 등을 제작하며 흔히 볼 수 없는 디자인과 구성으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방출합니다. 시리얼 박스 모양과 그룹명을 재치 있게 활용한 보이넥스트도어BOYNEXTDOOR의 앨범 패키지, 앨범명에 맞춰 로맨스, SF, 제로즈(팬덤명) 버전으로 구성한 제로베이스원ZB1의 ‘Cinema Paradise’ 앨범 패키지를 본다면 잘 만들어진 피지컬 굿즈의 힘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뉴진스 2023 시즌그리팅” 프로젝트 페이지
“보이넥스트도어 WHO! 앨범” 프로젝트 페이지
Studio OddHypen
: 타이포그래피로 꾸며내는
K-Pop의 멋
아주 작고 정교하지만, 사소한 차이로 디테일과 완성도를 만드는 게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의 특징이죠. 다양한 정보와 텍스트를 제공하는 K-Pop 역시 각각의 콘셉트와 개성을 구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합니다. 공연 포스터에서 뮤직비디오와 피지컬 앨범에 수록하는 트랙리스트에 이르기까지, K-Pop에서 적용하는 타이포그래피는 작품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할 뿐 아니라 아티스트와 음악의 콘셉트를 함축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죠.
스튜디오 오드하이픈STUDIO ODD HYPEN은 아트 디렉터 김보휘의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공연과 전시 포스터, K-Pop 앨범과 굿즈, 기업 및 광고 타이포 등 다양한 산업과 분야를 아우르는 디자인을 선보이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K-Pop 아티스트의 트랙, 앨범, 아트워크, 포스터에 삽입되는 타이포그래피를 다수 제작하고 있죠. 콘셉트를 매끄럽게 녹여야 하는 앨범 패키지에서도, 명확한 정보 전달이 중요한 홍보 포스터에서도, 혹은 트랙리스트나 뮤직비디오에 삽입하는 경우에도 오드하이픈의 타이포그래피는 각각의 목적에 맞는 효과를 냅니다. 여러 방면에서 활용되는 타이포그래피야말로 K-Pop의 다채롭고 정교한 매력을 강조하는 디자인의 핵심으로 작동합니다.
“뉴진스 Supernatural 뮤직비디오” 프로젝트 페이지
“영파씨 XXL 앨범” 프로젝트 페이지
OAAH Agency
: 공간에 K-Pop을 투영하는 법
몇 년 전 뉴스로 ‘팝업스토어 붐’이 정점에 이르렀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섭게 지금까지도 팝업스토어는 국내 마케팅 트렌드의 최전선에 서있죠. 다양한 기업과 브랜드부터 아티스트, 독립 상점 등 분야와 규모를 가리지 않고 팝업스토어는 수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최선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K-Pop 산업에서도 어느 순간 홍보를 위한 팝업스토어 마케팅이 낯설지 않게 되었는데요. 앨범 발매와 함께 진행하는 가장 익숙한 팝업스토어부터, 음악과 별개로 진행되는 사진전, 팬 이벤트 팝업스토어 등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K-Pop에 흡수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간은 말 그대로 소비자가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콘텐츠고, 팬 마케팅에 집중하는 K-Pop 산업이 이를 무시할리 없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예술, 예술 경험 등을 제공하는 오아에이전시Oaah Agency는 K-Pop 팝업스토어와도 연이 깊습니다. 앞서 소개한 앨범 홍보, 팬덤 참여형 공간, MD 판매 등 여러 방식으로 구성된 팝업스토어 공간의 기획부터 운영까지 전범위를 담당합니다. 다양한 이들과 협력해서 만든 팝업스토어 공간은 K-Pop 아티스트의 팬덤이 직접 찾아 애정을 표현하고, 콘텐츠를 경험하며, 소비와 홍보의 효과까지 거두는 체험의 장소로 변합니다.
“Artist-Made Collection by 세븐틴 팝업스토어” 프로젝트 페이지
“LE SSERAFIM 2023 S/S 팝업스토어” 프로젝트 페이지
K-Pop은 대중음악 산업의 일원이고,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오롯이 ‘음악’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K-Pop은 음악뿐 아니라 수많은 분야와 인물이 얽힌 종합예술에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죠. 이제 우리는 뮤직비디오가 없는 아이돌을 상상할 수 없고, 매체 홍보만으로 마케팅하는 기획사를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듣는 음악, 보고 듣는 음악을 넘어 ‘보이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K-Pop에서 디자인의 중요성 또한 나날이 높아지고 있죠. 단순히 예쁜 디자인이 아닌, 아티스트와 작품, 활동을 빛내고 자연스레 녹아드는 다방면의 디자인은 기획사와 여러 전문가의 협업으로 완성됩니다. 앞으로의 K-Pop 산업을 팔로우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단지 음악을 듣고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걸 넘어, 팝업 스토어에 방문하고 실물 앨범의 면면을 살펴보길 추천합니다. 다양한 디자인에 녹아든 시간과 노력, 자본의 흔적을 감상하다 보면, K-Pop이 자랑하는 정교하고 독창적인 기획력을 체감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