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버겁게 느껴질 때는 한적한 바다로의 여행을 꿈꾸게 됩니다. 열기를 머금은 모래알과 부서지는 파도, 일렁이는 수면, 어김없이 고요한 수평선. 해안선을 따라 넓게 펼쳐진 파랑을 바라보고 있으면 꾹꾹 눌러 담은 근심도 파도에 삼켜질 것만 같지요. 바다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오래전 여행지에서의 사진만 뒤적이고 있을 이들을 위해, 바다 배경 영화 5편을 준비했습니다. 바다가 선사하는 편안함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영상을 만나 보세요.
<녹색 광선>
에릭 로메르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녹색 광선>은 주인공 델핀의 건조한 여름 휴가를 담고 있습니다. 연인과 헤어지고, 친구와의 휴가는 물 건너간 상황에 혼자 남겨진 델핀은 사랑스러운 낯선 이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를 부여잡고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실망스러운 순간의 연속, 어디에서도 뒤섞이지 못해 우울감이 늘어가던 때에 비아리츠 해변가의 노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는데요.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기 전 빛의 굴절에 의해 태양의 윗부분이 몇 초간 녹색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때 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였죠.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녹색 광선’ 장면에서는 잔잔한 바다와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 사이, 녹색빛이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해냅니다. 어떤 기교 없이 담백하게 바다를 그리고 있어, 차분하게 가라앉는 마음으로 작은 경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해변의 폴린느>
에릭 로메르 감독의 또 다른 명작 <해변의 폴리느>는 ‘말이 많으면 화를 자초한다’는 격언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주인공 폴린느와 그녀의 사촌 마리온을 둘러싼 소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제멋대로 삐뚤어진 사랑의 모양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에 대한 고찰을 이어가는데요.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한 마리옹은 밀려오는 사랑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15살 폴린느는 사랑 타령에 난색을 표하지만 해변에서 만난 소년으로 인해 사랑을 경험하지요. 사랑에 대한 담론으로 가득한 영화는 프랑스 노르망디 망슈(Manche) 지역을 배경으로 제작돼 아름다운 해변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폴린느와 실방이 시선을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운율적인 파도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들이 딛고 선 모래사장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죠.
<일 포스티노>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자전적 이야기를 일부 포함하며, 작가 안토니오 스타르메타가 쓴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영화는 이탈리아의 작은 허구의 섬 ‘칼라 디소토’의 우편배달부인 마리오와 네루다의 특별한 우정을 그립니다. 평범한 어부의 아들이기도 한 마리오는 작은 섬에서의 일상이 지루하고 단조로운 반면, 시인인 네루다에게는 영감을 선사하는 풍요의 땅이었는데요. 시에 문외한이던 마리오는 네루다를 통해 시의 화법을 터득해 나가고, 메타포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 후로 지루했던 일상을 달리 보게 됩니다. 비로소 섬의 아름다움을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영화의 배경이 된 섬의 실제 지명은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에 위치한 프로치다입니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아래의 푸른 바다, 화면을 채우는 섬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해 보세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작은 섬의 저택에 사는 귀족 여성 엘로이즈와 초상화가 마리안느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결혼을 회피하는 엘로이즈는 초상화 모델이 되기를 거부하지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해 그림을 그려나가고, 이러한 바라봄의 과정을 통해 이들 사이에 사랑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영화의 중심을 이루는 장소는 다름 아닌 바다. 이들은 해안가를 산책하고, 나란히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고, 그림 도구를 줍기 위해 바다에 뛰어듭니다. 여기에 인공적인 음을 최소화함으로써 자연적인 요소를 극대화시킨 점 또한 눈에 띄지요. 영화는 시종일관 느린 호흡으로 고요히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를 조명합니다. 이들의 시선이 깊어질수록, 장면의 아름다움은 농후해져 깊은 여운을 선사할 거예요.
<그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는 무미건조했던 일상에 들이닥친 특별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인공지능 사만다와 만나 깊이 교감하면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데요. 비록 OS와의 사랑이라는 낯선 소재지만, 이들의 사랑은 생경하면서도 충분히 낭만적입니다. 앞서 소개한 영화들과 달리 <그녀>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사만다와의 해변 데이트뿐이죠. LA 해변에서 테오도르는 셔츠 포켓에 사만다를 끼워 두고, 사만다가 선물한 노래를 들으며 잔잔한 행복을 만끽합니다. 쏟아지는 햇빛과 포근한 모래사장, 환상적인 배경 음악까지. 스크린 너머의 나른함을 감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앞서 소개한 5편의 영화는 영상미가 뛰어남은 물론, 작품성 또한 인정받은 작품입니다. 미장센에 이끌려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끝에는 묵직한 메시지를 안게 되죠.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에 지쳤다면, 최대 2시간짜리 짧은 여행을 계획해 보세요. 바다의 낭만을 여러 각도에서 포착한 영상들이 어떤 그리움을 충족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