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있다.”
흔히 말하는 벽돌책, 독파해보신 적 있나요?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약한 일의 대명사로 벽돌책이 종종 거론되곤 합니다. 야심차게 집어들지만 압도적인 책 두께,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없는 무게에서 기가 죽습니다. 독서를 이어가기 힘들다는 판단이 서면 벽돌책은 베개, 받침대, 장식으로 소임을 다하게 되죠. 여기,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벽돌책이 있습니다. 존재하는 수많은 벽돌책 중 가장 다채로운 매력을 품은 작품이라 자부할 수 있는, 19세기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입니다.
이 한 권만 읽는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 군상을 모두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인생 기둥이 되는 굵직한 철학 논쟁에 푹 빠져 삶의 목표를 회고해볼 수도 있고요. 부연 정보를 걷어내면 결국 ‘돈, 여자, 치정싸움’처럼 자극적인 소재들이 핵심이라 주말 드라마를 보는 듯 금방 몰입할 수 있기도 합니다. 이 모든 주제가 범죄 추리소설 장르답게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는 점도 독보적인 매력이죠.
저 또한 이 작품에 매료된 후 고전 문학만이 지닌 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벽돌책, 고전 문학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깨뜨려준 책이었기 때문이죠. 기라성같은 작가들이 ‘인생 책’으로 주저 없이 꼽았을 뿐더러 출간 직후부터 1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뜨거운 생명력을, 진창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계속해서 지혜의 정수가 담긴 책을 찾아 읽는 재미를 불어넣어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매력을 파헤쳐보겠습니다.
러시아산 정통 범죄 심리소설
제목 그대로 이 소설은 카라마조프 집안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에게는 드미트리(애칭 미챠), 이반, 알렉세이(애칭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로 추정되나 집안의 하인으로 있는 스메르쟈코프라는 네 아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살해됩니다. 무려 아버지를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범인을 밝히며 사건을 둘러싼 진실과 더불어 각 인물의 극심한 갈등과 내면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소설이죠. 사건 전개가 흥미진진한 범죄 소설 장르이기에 작가의 다른 작품인 『죄와 벌』과 더불어 잘 읽히는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일까요?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매우 공을 들여 자신의 사상을 주요 인물들로 육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건 해결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각 인물의 언행에 내포된 의미를 따라가면 사건의 내막도, 작가의 거대한 사상도 물 흐르듯 드러나죠. 그러니 주요 인물들의 내면을 해석하면서 인물에 담긴 작가의 메시지도 함께 풀어 가보겠습니다. 짚어드리는 포인트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으면 작가 특유의 광기 어린 묘사나 긴 분량, 복잡한 러시아식 이름 정도의 장애물은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작품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있다’라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모아놓더라도 세상 모든 인간 군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정도로 복합적인 심리 묘사가 탁월한 작품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인물인 세 아들,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세 아들을 중심으로 작가가 바라본 인간 세상을 압축적으로 들여다보도록 하지요.
1) 악의 집대성,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걸레 같이 방탕할 뿐만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멍청한 인간 유형 – 하지만 멍청하긴 해도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일만은 능수능란하게 처리할 줄 아는, 다만 오직 이런 일 하나만을 할 줄 아는 그런 족속. 이런 미치광이들은 대부분이 상당히 영리하고 교활할뿐더러 그러면서도 말도 통하지 않을 만큼 멍청한데 그건 어쩐지 러시아 민족 특유의 멍청함이었다.
_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어느 집안의 역사> 중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그야말로 악의 집대성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시선을 끌기 위해 허풍을 서슴지 않는 광기, 돈에 대한 엄청난 집착, 지독하게 여자를 밝히는 성격 등 욕망 덩어리 그 자체죠. 세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버려두다시피 했으며, 장성한 아들에게 죽은 어미의 유산을 상속하기 싫어 악착같이 꾀를 쓰는 모습이 계속 드러납니다. 심지어 첫째 아들 드미트리와는 한 여자를 두고 경쟁 관계를 맺기도 하는데요. 한 마디로 아버지다운 면모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작품 초반, 그의 괴팍스러운 면모를 보여주는 장면의 소제목이 ‘저런 인간은 도대체 왜 살까!’인 것만 봐도 그의 성격을 한 줄로 파악할 수 있죠.
작가는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통해 ‘미래 세대에 대해 무책임하고 방탕한 부모 세대이자 현재의 러시아’를 빗대고자 했습니다. 작가 의도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바라보는 경멸과 지탄의 시선은 곧 당대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임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2) 자유롭고 방탕한 호연지기, 첫째 드미트리 카라마조프
아버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아들
“아버지의 피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죄가 없습니다! 내가 형벌을 받으려는 것은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며, 어쩌면 정말로 죽이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_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예심> 중
드미트리는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며 요란하게 등장합니다. 어릴 적 여읜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으러 아버지를 찾아 돌아왔더니 아버지는 ‘한 푼도 안 남았다’며 발뺌을 하죠. 게다가 사랑에 빠지게 된 여자를 아버지가 눈독 들입니다. 돈, 그리고 여자를 두고 아버지와 격렬한 대립 관계를 벌이게 된 셈이죠. 막장 드라마입니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죽이고야 말겠다’며 동네방네 분노를 터뜨리고 다닙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살해됐을 때 모두가 드미트리를 용의자로 지목합니다. 절묘하게도 범인을 가리키는 모든 증거가 드미트리의 행적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죠. 결국 아버지를 죽인 살인범으로 법정에 섭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신과 악마가 싸운다
그는 자신의 해방에 기뻐함과 동시에 자신을 해방시켜준 여인을 애도하며 울었던 것이니 –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란 심지어 악인들조차도 우리가 대략적으로 단정 짓는 것보다는 훨씬 더 순진하고 순박한 법이다.
_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어느 집안의 역사> 중
많은 작가는 한 인물을 특정 성격에 가둡니다. 편리하거든요. 영웅인 주인공은 숱한 어려움에도 고비를 딛고 목표를 성취하는 영웅으로 끝나고, 누가 봐도 악의 표상 같은 사람은 그저 시궁창에서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평면적인 인물’로 남죠. 도스토옙스키는 다릅니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결코 단편적이지 않습니다. 작가 본인이 만든 캐릭터에 본인이 매혹될 정도로 일반적 잣대로 잴 수 없는 모순점을 보유한 인물들이 한가득 등장하는데요. 드미트리가 특히 그렇습니다.
드미트리는 시종일관 매우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지만,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면을 스스로 가장 잘 인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곤경에 처한 아름다운 귀족 여성 카체리나를 유혹한 뒤 망신 주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찾아온 그녀가 곤경을 해결할 수 있도록 대가 없이 거금을 내어주기도 하는 드미트리의 모순적인 면모는 현실 어딘가에서 만나볼 수 있을 법한 복합적인 인물 같습니다. 방탕한 아비와 다를 바 없는 망나니 같은데 칭찬받을 만한 고결한 행동을 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게 정반대의 비열함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괴로워하는 아주 섬세한 사람이기도 한 것이죠.
드미트리 같은 망나니라면 분명 여자를 모욕 주거나 비열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독자들은 예측하지만, 현실에서 사람은 모두의 예상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습니다. 드미트리 또한 작품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처럼 작가의 통제 영역을 넘어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드미트리는 어떤 성격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아름다움이란 바로 소돔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 이 비밀을 너는 알고 있었니? 정말 무서운 건 말이지, 아름다움이란 비단 섬뜩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악마와 신이 싸우는데 그 전쟁터가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인 거지.
_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호색한들> 중
이렇게 도스토옙스키는 드미트리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심연과 복잡성을 아주 폭넓게 그려냅니다. 마음과 사상이 너무나 넓어 어딘가 병든 인간이죠. 그래서 드미트리는 마음속에서 투쟁을 벌이느라 늘 고통스러워합니다.
선(善)은 좁은 문 같은 이상 세계라 모든 것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드미트리가 말하는 ‘아름다움’, 즉 미(美)의 세계는 광대합니다. 아름다움에는 소돔과 마돈나의 세계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이죠. 우리는 드미트리의 행보와 내적 갈등을 통해 마음이 너무나도 넓어 어딘가 병든 보편적 인간의 복잡다단한 심연을 마주합니다. 그것은 곧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나의 심연이 될 수도 있겠죠. 드미트리는 어쩐지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우리들의 그림자, 거울 속 분신 같습니다.
3) 합리주의 이성의 결정체, 둘째 이반 카라마조프
신이 만든 세계를 인정하지 않겠다
이반 표도르비치는 그때 왜 우리 도시에 왔을까 – 나는 당시에도 거의 어떤 불안마저 느끼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던 기억이 난다. 그토록 많은 사태들의 시발점이 된 이 운명적인 귀향은 나에게 이후에도 오랫동안, 거의 언제나 불분명한 일로 남아 있었다. 대체적으로 판단해 보건대, 척 보기에도 저토록 박식하고 오만하고 신중한 젊은이가 그토록 추잡스러운 집에, 평생 동안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기억조차 못하는 아버지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_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어느 집안의 역사> 중
이반은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적인 젊은이입니다. 이 작품에서 지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죠. 이반은 합리주의적 무신론 그 자체를 대변합니다. 당대 유럽을 중심으로 퍼졌던 이성의 합리주의, 휴머니즘을 표방하죠. 작품 속에서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대심문관」 편에는 이반의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데, 그 무신론 주장이 몹시 매력적이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출간 이후 독자들은 이반에 열광합니다.
“나는 신의 이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 비록 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점을 잘 알아둬, 그가 창조한 세계를, 신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거야.”
_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Pro와 Contra> 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축이 되는 두 사상을 꼽으라면 이반의 합리주의와 무신론, 그리고 조시마 장로로 대변되는 러시아 정신, 즉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이 「대심문관」편에 이어 이반의 사상에 반박할 수 있는 종교적 입장을 셋째 알료샤의 정신적 지주인 조시마 장로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작품의 절정에는 이반이 자기 사상을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을 설계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대중들은 조시마 장로가 대변하는 종교 입장이 이반의 무신론에 대한 안티테제로는 유약하고 진부하다고 느꼈죠. 모두가 이반을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여길 만큼, 이반의 주장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시험을 모티브로 삼은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는 곧 작품의 백미이기에 간략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악에서 인간을 구원함으로써 ‘자유의지를 통한 믿음’을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6세기, 대심문관은 이 자유가 도리어 인간 세계를 혼돈으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심히 나약한 존재이기에 선택과 양심의 자유를 도리어 짐으로 여긴다는 것이죠. 물 위를 걷고 돌이 빵으로 변하는 기적을 끊임없이 기대하며, 자신을 지켜줄 위대한 자를 숭상하면서요. 그래서 대심문관은 자유를 담보로 인간들의 심리적, 경제적 안정감을 제공해 주는 제국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서구의 공리주의, 합리주의, 당대는 사회주의까지 접목된 논리였습니다. 사랑과 믿음, 구원이 결여된 이 유토피아는 오히려 디스토피아 같습니다.
이반은 알료샤에게도 말하죠.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형상을 닮아야 하는 인간들의 세상에 이토록 많은 죄악과 부조리가 판치는 것이냐고요. 그러면서 자신은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완벽한 유클리드 이성에 충실한 세계. 이반은 그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합리주의만이 옳을까요? 도스토옙스키는 이 공리를 수호하는 이반의 한계를 짚으며 사건 국면과 이반을 둘러싼 인물들과의 갈등을 촉발시킵니다. 무적같은 이반의 합리주의가 어떤 사건, 어떤 인물들과 부딪히며 이리저리 변모하는지 지켜보는 재미도 이 소설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누가 살인자인가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이겠다’며 벼르는 드미트리 형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감시하던 이반은 집안의 하인이자 아버지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의 은근한 암시를 듣습니다. ‘이반, 네가 모르는 척 자리를 비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겠어?’라는 암시였습니다. 이반은 그 얘기를 가볍게 무시하고 멀리 모스크바로 떠납니다. 그렇게 이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실제로 아버지는 살해되고 드미트리가 범인으로 붙잡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실이 드러납니다. 스메르쟈코프가 이반 당신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했고, 자기는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당신이 자리를 비우면 내가 대신 죽이겠다는 암시를 했고 당신은 실제로 떠나지 않았느냐며 조소하죠. 실제로 이반이 자리를 비우는 것이 묵시적 동의라 생각해 살인을 실행으로 옮겼다는 고백을 남기고 스메르쟈코프는 자살해 버립니다. ‘당신처럼 똑똑한 사람이 이런 암시를 몰랐을 리 없다’고 비웃으면서요.
“정말로 어떤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을 보면서 누구누구는 살 가치가 있고 누구누구는 그럴 가치가 더 없다고 결정할 권리가 있는 걸까?”
“대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훨씬 더 자연스러운 다른 이유에 따라 결정되는 법이야. 하지만 권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든 기대의 권리는 가지고 있는 거 아닐까?
_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호색한들> 중
이반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봅니다. ‘과연 손을 들어 살해한 사람만이 살인자인가? 죽이겠다고 공공연히 입으로 떠들어 죄를 범한 사람에게만 잘못이 있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살해 의지를 품은 것도, 실제로 저 사람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기대한 것도 살인이지 않은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자체가 미필적 고의가 되니 나도 살인자인 것이다.’ 그야말로 결벽한 도덕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반은 이 죄책감을 떨치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여기서 우리도 생각해 보게 되죠. 형사 처벌의 영역을 넘어 생각해 봅시다. 죄란 무엇이며 벌은 무엇일까요? 누가 누구를 심판하거나 구원해줄 권리가 있는 것일까요? 전작 『죄와 벌』에 이어 도스토옙스키는 단죄의 영역과 죄의식에 대한 고찰을 매우 깊이 있게 그려냅니다.
4) 미래를 밝히는 예언자, 셋째 알료샤 카라마조프
작가의 염원이 빚어낸 구원자
알료샤의 마음은 이런 식의 애매모호함을 참을 수 없었으니, 왜냐면 그의 사랑은 언제나 활동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수동적인 사랑이라면 그는 아예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즉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워야 하고 그들 각각에게 무엇이 좋고 필요한지를 확실히 알아야 하며 이 목표가 옳은 것이라는 확신이 선 다음에는, 응당, 그들 각각을 도와야 했다.
_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파열들> 중
이반이 보여주는 죄의식에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 이를 방종한 사회 전체가 잘못이 있습니다.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라는 의식이 아버지 살해를 둘러싼 드미트리의 통찰, 이반의 정신 분열을 통해 전달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죄의식과 책임을 함께 질 수 있는 공동체를 이상적인 사회로 제시합니다.
막내인 알료샤는 형들을 늘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모두의 메신저 역할로 부지런히 인물 사이를 오가며 모두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중재하죠. 형들과 달리 알료샤는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흠결 없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무척 착하고 사랑스러워 이유 없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선한 면을 불러일으키는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알료샤는 작가가 의도한 실질적인 주인공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부이고, 작가가 죽어버린 탓에 세상에 나오지 못한 2부는 알료샤가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을 딛고 사회를 혁명시키는 줄거리의 책이었다고 하니까요.
작가가 계획한 알료샤에 대한 설정을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믿음이 보입니다. 아버지가 벌여온 악행, 형들이 손에 묻힌 피와 무관한 ‘자격 있는’ 자만이 세상을 구원시킬 수 있다는 작가의 소망이자 확신이요. 극도로 섬세한 도덕의식을 가진 이반을 통해서 알 수 있듯,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서 책 속 어떤 인물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알료샤는 무고합니다. 알료샤가 이 충격적인 집안 갈등에서도 정신을 다잡고 아버지의 죽음과 형들의 고난을 딛고 자신의 미래, 러시아의 다음 세대를 생각하며 마을의 아이들을 돌보는 장면으로 전체 작품이 마무리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정세에 대단히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이토록 병들고 나약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정신병원 같은 나라, 모래성처럼 금방 쓰러질 듯한 합리주의의 유행, 일어날 수 없는 기적에만 기대어 빛을 잃고 부패해 가는 종교로 만연한 러시아 사회 전체를 두루 비판한 것이죠. 하지만 동시에 알료샤를 통해 미래를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위기를 타파한 후 맞이하게 될 미래의 러시아를 꿈꾸며, 작가는 깨끗한 메신저 알료샤의 주도로 만들어질 청사진을 암시하며 작품을 끝맺습니다.
구원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랜 세월을 걸쳐 우회하는 수밖에요. 그래서 작가 입장에서는 알료샤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강하게 단련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정신적 지주였던 조시마 장로의 죽음으로부터 ‘기적을 보지 않더라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을 겪고, 그루셴카나 형들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 본성을 지켜주는 인간의 선한 의지의 위력을 깨닫는 등 여러 가지 성장통을 겪죠.
세상을 단편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면 알료샤의 입장에 대입해 보는 것도 이 작품을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모든 인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런 온갖 아픈 인간들이 모인 정신병동 같은 이 세상의 군상을 마치 신이 된 듯 내려다볼 수 있거든요. 그 시선에서는 지옥 같은 세상 모습을 보다가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알료샤처럼 현실 극복과 미래를 향한 희망을 발견해 내는 힘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암흑에서 한 줄기 사랑을 기어코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이 바로 알료샤입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세 아들이 상징하는 사상에 기대어 우리는 작가가 평생에 걸쳐 들여다보고자 했던 인간 면모, 사회 단면, 미래 모습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 뱃속까지 병적으로 묘사해 내는 통찰을 따라가면 세상 모든 인간을 경험해 본 듯한 기분이 듭니다. 예민한 주제이기에 바쁜 일상에서 차마 소화하지 못하고 묻어둔 종교와 사회, 시대 변화에 대한 고민도 한 번에 맛볼 수 있었죠. 소설을 통해 철학 하게 되는 책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밥벌이로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막장 중의 막장인 소재들을 차용해 사회에서 주목하는 주제들을 다뤄야 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사상 소설같지만, 다 걷어내고 보면 ‘돈, 치정, 사회 비판, 친부 살해’ 등 대중의 관심사를 충족시킬 소재가 핵심이죠. 즉, 모두의 일상사 그 자체가 주제이자 배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 그의 소설이 그렇게 두꺼우면서도 오랫동안 흥미진진한 고전으로 사랑받아온 이유가 납득이 됩니다.
한 작품에서 재미, 통찰, 위안, 자극까지 모두 얻을 수 있다니요. 선입견으로 멀리하기 전 한 번 용기를 내어보세요. 벽돌책이 지닌 선입견을 깨뜨려줄 수 있는 만능 작품이니까요. 낯선 러시아식 이름과 지명에 어지럽다가, 어떤 인물에 감정 이입하는 순간 다시 빠져나오기 어렵더라는 후기들이 가득합니다. 어느새 빠져들어 이만한 벽돌책도 넉넉히 완독하는 자신의 모습, 나도 모르게 책 속에서 자아를 찾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 경험을 이어가고 싶지 않으신가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그 시작이자 원동력이 되어줄 것입니다.
-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민음사, 2015 (1판 42쇄)
- 이현우, 『로쟈의 러시아 문학강의 19세기』, 현암사, 2014
- 조지 스타이너,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 서커스, 2019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나보포크의 러시아 문학 강의』, 을유문화사, 2022
- 스미다 43회 김연경 박사 강연, 「집에서 즐기는 도스토옙스키」, MBC 강원영동, 2020.12.11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