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물리적 사물인 옷과의 동의어가 아니다. 고정적인 양식을 의미하는 스타일과의 동의어도 아니며, 몸을 장식하는 복식과도 다르다. 패션은 유행이다. 끊임없이 새롭게 생겨나고, 확산하고, 쇠약하는 흐름. 패션은 곧 트렌드다. 트렌드는 곧 시대의 변화를 설명한다. 무엇이 트렌드가 되는지, 트렌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현상은 시간이 흐르며 변화를 겪었다. 최근에는 어떤 시크와 어떤 코어, 어떤 룩의 이름으로 온갖 트렌드가 쏟아지는데, 트렌드는 왜 이렇게 무수해졌을까?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뜻할까?
누가 트렌드를 정의하는가
트렌드를 보통 럭셔리 패션 브랜드가 선도한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이다. 트렌드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자료에는 늘 유명한 패션 브랜드의 런웨이가 참고 사진으로 소개된다. 보호 시크의 귀환은 끌로에로 설명되고, 드뮤어의 등장은 르메르나 더 로우로 설명되듯이 누군가 트렌드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런웨이를 보아야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다. 트렌드의 등장이란 패션의 분야에서 권위를 가진 주체가 어떤 스타일을 유행으로서 ‘규정’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권위자가 늘 럭셔리 패션 브랜드인 것은 아니다.
그 권위자의 또 다른 이름은 게이트키퍼다. 무엇이 패션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 문지기(gatekeeper)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게이트키퍼의 영향력을 설명하는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있다. 영국 패션 브랜드 소피 휼미(Sophie Hulme)가 유럽에서 유행하게 된 배경이다. 2011년 어느 날, 영국의 셀프리지(Selfridges) 백화점의 액세서리 바이어 리디아 킹(Lydia King)은 밀라노에서 어떤 패셔너블한 가방을 매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리디아 킹은 그 가방이 너무나 매력적인 나머지 그 사람을 쫓아갔다. 그 가방은 소피 휼미의 가방이었고, 이후 셀프리지 백화점은 리디아 킹의 적극적인 소개로 소피 휼미 브랜드를 입점시킨다. 심지어 소피 휼미가 배치된 곳은 가장 눈에 잘 띄는 1층 셀린느(Celine)의 옆자리였다.
소피 휼미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기를 얻었고, 영국 총리의 배우자가 착용하며 중국 영부인에게도 선물하는 등 2010년대 초의 유행하는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보그는 이 우연한 만남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소개했지만, 소피 휼미의 가방이 단순한 가방이 아닌 유행하는 특별한 가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백화점 바이어라는 패션 게이트키퍼의 채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럭셔리 패션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패션 산업의 권위자에 의해 트렌드는 ‘선택’된다. 트렌드는 일종의 선택과 정의의 산물이다.
취향의 레퍼런스일 뿐인
트렌드
좀 더 최근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최근에는 ‘마이크로 트렌드’라는 용어까지 등장하면서 트렌드의 흐름이 무수하고 복잡해졌다. 발레코어나 바비코어, 블록코어, 웨스턴코어 등 여러 코어가 순식간에 지나갔고, 긱시크, 보호 시크 등의 여러 시크도 새롭게 나타났다. 이제 트렌드는 하나의 굵직한 흐름이 아니다. 작고 구체적인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무수히 나타나고, 심지어는 상반된 트렌드가 공존하기도 한다. <패션이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법>, <패션이 권력에 저항하는 방법>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또는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패션의 전파를 살펴보았었는데, 지금은 광범위하게 횡적으로 확산되는 ‘수평 전파’의 시대다.
그 이유는 ‘패션 게이트키퍼’의 영향력이 발휘되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SNS의 시대가 도래하며 정보가 쏟아지고 누구나 시선을 얻을 수 있게 되면서 권위가 분산되었다. 수많은 인플루언서가 등장했고, 인플루언서가 아닌 SNS 사용자들도 타인과 쉽게 연결되었다. 이렇게 분산된 권위 속에서 여러 트렌드 흐름이 만들어진다. 특정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웹상에서 연결되며 집단을 형성하기도 하고, 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스타일이 공유되기도 한다. 어쩌면 특정한 코어, 시크, 룩의 등장은 그 시기에 어떤 취향의 집단이 가시성을 얻은 것이다. 영화 <바비>가 개봉한 당시를 기점으로 바비코어를 비롯한 발레, 걸(girl), 코케트(coquette) 등의 키워드가 부상한 것처럼. 트렌드로 등장하는 스타일은 일종의 레퍼런스와도 같아졌다. 특정한 취향 집단을 참고한 결과물이다.
이것이 ‘포스트 하위문화’의 시대다. 이제는 하위문화도 과거와 같이 비주류로 정의할 수만은 없다. 주류에 대한 저항정신이나 특정한 신념과 가치를 표방하지 않고 취향의 집단, 정체성 표현을 공유하는 집단으로서 등장한다. 이 시대 청년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짧은 시간에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며 유동적이고 파편화된 흐름이 나타나는데, 포스트 하위문화는 이러한 청년 문화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즉 포스트 하위문화의 관점은 마이크로 트렌드의 시대를 짚어낸다.
트렌드의 파편화는
물질화된 시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수평 전파의 시대, 평등한 개성의 시대가 도래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트렌드의 형성 과정은 결국 패션 바깥의 문화적 움직임을 포착해 패션 시스템으로 가져오는 과정이다. 패션계 권위자들이 특정한 움직임에 시선을 모으는 역할을 하고, 이후 럭셔리 패션 브랜드가 채택함으로써 패션 트렌드로 완전히 규정된다. 수직적 위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위문화도 결국 럭셔리 패션의 채택으로 주류화되었고, 마이크로 트렌드도 결국 럭셔리 패션의 런웨이로 설명된다. 트렌드의 방향을 불문하고 럭셔리 패션의 권위는 건재하다. 변한 게 있다면 럭셔리 패션 브랜드조차 수많은 흐름을 곳곳에서 읽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패션계의 권위가 유지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패션계에 자본이 모이는 위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수한 트렌드는 끝없이 새로운 소비를 의미한다. 매번 새로운 단어의 조합으로 비슷한 것을 새롭게 지칭함으로써 새로운 소비를 유도하는 것이다. 올드머니룩과 드뮤어룩의 차이를 누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등장의 배경이나 태도 등으로 차이를 설명한다 해도 유사한 스타일이 소비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트렌드는 반복되고, 소비를 장려하는 힘의 방향은 유지된다. 패션 기업 니먼 마커스(Neiman Marcus)의 부사장 조디 칸 역시 코어, 마이크로 트렌드를 두고 참여와 공유, 나아가 궁극적으로 쇼핑을 장려하는 방식임을 언급했다(Krentcil, 2023). 트렌드는 이렇게 하나의 꾸준하고 끈질긴 방향을 갖는다. 소비의 증대, 즉 기업 자본의 증대다.
더불어 특정한 취향 집단이 얻은 가시성이 트렌드로 점화될 수 있는 이유는 패션업계가 정보의 등장과 변화 속도에 맞출 수 있는 놀라운 생산 유통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이기도 하다. 취향으로 설명될 만한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그 즉시 산업화될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문화적 움직임, 태도, 라이프스타일이 새롭게 나타나는 즉시 물질화되는 시대다.
마이크로 트렌드를 다시 읽는다면, 세분화되고 가속화된 소비다. 소비의 가속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트렌드를 칭하는 이름이 계속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그저 흥미로울 뿐, 어떤 위기도 가리키지 않는다. 트렌드는 우연하지 않다. 작은 우연조차 낭만화하여 소비로 잇고, 의도된 것을 우연처럼 포장하여 구조를 가린다. 트렌드가 더 무수해질수록, 세상의 흐름이 자본주의적으로 해석된다. 시대 변화가 자본주의와 점점 더 결탁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 국면 속에서 어떻게 소비해야 할까.
- Beswick, C. (2024, April 17). Examinig the era of micro trends. Global Fashion Agenda.
- Krentcil, F. (2023, June 9). Barbiecore? Mermaidcore? A grow-up’s guide to summer’s viral trend. The Wall Street Journal.
- Melkumova-Reynolds, J. (2022). From bag to “It Bag”: A case study of consecuration in the field of fashion. In E. Paulicelli, V. Manlow, & E. Wissinger (Eds.), The Routledge Companion to Fashion Studies. Routledge.
- 김솔휘, 임은혁. (2022). 포스트 하위문화 관점에서 살펴본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커뮤니케이션 경향 – 스트리트웨어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을 중심으로 -. 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 22(2), 125-142.
- 유니야 가와무라. (2022). 패셔놀로지(임은혁, 권지안, 김솔휘, 김현정, 박소형, 범서희, 이명선, 정수진 역). 사회평론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