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관계를 지키려는 의지는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더 치열하게 발휘되곤 하죠. 사랑 이야기에 두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는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것도 현실의 여러 사랑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단어는 투쟁이 아닐까요? 다양한 위기 앞에서 고민하는 연인들을 위해, 조금 특별한 사랑에 관한 3편의 다큐멘터리를 소개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덮어쓰는 춤
<워크, 런, 차-차>
“움직임이 감정을 만들어낼 거예요. (Motion will create emotion.)”
_<워크, 런, 차-차>
<워크, 런, 차-차>(2019)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연인의 이야기로,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다큐멘터리 후보에 오른 작품입니다. 중년의 부부가 후덥지근한 공기로 가득 찬 댄스홀에서 차차차를 추며 영화가 시작되는데요. 폴과 밀리 부부가 매일 같이 춤을 추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로라 닉스 감독은 그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느끼는 40년 전의 상실에 주목합니다.
1970년대 베트남의 젊은 연인이었던 폴과 밀리는 베트남 전쟁이 터지면서 헤어질 위기를 맞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났지만, 재회 순간의 어색한 침묵을 떠올리는 밀리의 표정에서 긴 공백이 남긴 감정을 짐작할 수 있어요. 수시로 등장하는 연습 장면이 암시하듯, 몇 년 전부터 차차차를 배워온 부부는 춤에 각별한 애정을 쏟습니다. 허리와 목에 손을 두르고,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 상대를 밀어냈다가 끌어옵니다. 가쁜 호흡을 주고받는 두 명의 댄서는 온전히 서로에게 몰입하죠. 역사의 소용돌이로 인해 꺼져버린 어린 시절의 불꽃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며, 차차차는 열기를 더해갑니다.
폴과 밀리에게 차차차는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도둑맞은 청춘을 보상하려는 절박한 노력처럼 보이는데요. 예상외로 둘의 움직임은 회한보다 현재에 대한 축하로 채워져있습니다. 잡을 수 없는 시간에 집착하는 대신 몸을 맞댐으로써 실재하는 사랑을 확인하죠. 상처 입은 과거를 다시 살아내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든 사랑의 이야기가 다시 쓰일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할 때 꺼내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견고한 성벽 밖을 상상하기
<그들만의 사랑: 테리와 팻의 65년>
“후회는 없어요.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예요. 사랑은 사랑이고, 그게 가장 중요해요. (No regrets. I’d do it all over again. I think love is love, and that’s the most important thing.)”
_<그들만의 사랑: 테리와 팻의 65년>
반세기 넘게 사랑을 지켜온 레즈비언 커플, 테리와 팻을 주인공으로 삼은 <그들만의 사랑: 테리와 팻의 65년>(2020)은 비밀이어야 했던 사랑이 두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를 다채롭게 엮어갑니다. 개인적 서사, 가족 관계, 미국 사회를 넘나들면서 말이죠.
국가 차원에서 성소수자를 처벌했던 20세기 중반의 미국은 얼마나 숨 막히는 시대였을까요. 특히나 캐나다 이민자로서 테리와 팻은 추방당할 위험으로 인해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했습니다. 보수적이었던 몇몇 가족 구성원들은 관계를 봉인시킨 또 다른 배경이었고요. 그렇다고 둘의 삶이 시련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섣부른 추측입니다. 테리와 팻이 회고하는 찬란한 기억들은 그들을 평면적으로 정의하려는 관념적 시선에 이의를 제기하죠. 촉망받았던 청년기를 거쳐 근면한 직장인으로서 꾸린 안온한 동거생활, 정성스레 일군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은 여느 부부와 마찬가지로 삶의 기쁨과 슬픔을 같이 통과하고 노년에 접어들었습니다.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집’이라는 공간은 이 사랑 이야기를 꿰뚫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테리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둘은 요양 시설로의 이주를 고민하게 되는데요. 팻은 몇번이고 테리의 조카 다이앤과 부딪히면서도 시카고의 집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테리와의 사랑이 안전하게 보호되는 곳’으로서 집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보면, 팻의 마음이 점차 헤아려집니다. 그녀는 65년간 쌓아온 둘만의 세상에서 벗어났을 때도 이 사랑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을 테죠. 그럼에도 테리와 팻이 조금씩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이 궁금하다면, 애정어린 눈으로 영화를 끝까지 따라가 보세요.
거짓에 맞서 사랑하는 법
<해리와 메건>
“앞으로도 늘 우리를 지켜볼 것이라면,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무엇인지 보기를 바라요. (If we’re going to have this glaring microscope on us at all times, if people are looking at us, then look at what we’re looking at.)”
_<해리와 메건>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만남은 그 자체로 세계 곳곳의 유례없는 관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해리와 메건>(2022)은 이 화제의 부부가 악명높은 영국 언론과 분투해온 과정을 보여줍니다. 6편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통해 해리와 메건, 그들의 최측근은 직접 둘의 첫 만남부터 현재까지의 일들을 증언하죠.
영국 왕자와 미국 배우의 동화 같은 만남과 결혼이 가져온 파급력은 엄청났습니다. 긍적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요. 화려하고 상업적인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데다 흑인 어머니를 둔 메건의 정체성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색인으로서 소신 있는 행보를 이어가는 왕자비에게서 희망을 본 국민들이 있었던 반면, 최소한의 정통성을 수호해야만 하는 왕실과 보수 언론은 이를 반가워할 수만은 없었죠. 몇 년에 걸쳐 해리와 메건은 왕실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인기가 높아질수록 왕실의 방임 아래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습니다.
경멸과 혐오는 대체로 체념이나 분노를 낳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매번 궁극적으로 다르게 반응하기를 선택합니다. 어머니인 다이애나비가 언론에 시달렸던 모습을 목격하며 자란 해리 왕자는 견디지 않고 메건과 함께 왕실에서 나오기로 하죠. 그리고 두 사람은 새로운 터전인 미국에 정착한 후 사랑과 평등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자 더욱 정진하는데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공유하며 가까워진 연인들답게, 그들의 사랑은 둘의 관계에서 나아가 인류를 향해 흘러가는 듯합니다. 고난을 동력으로 진화하는 사랑의 모형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랑일 것입니다.
전쟁, 성소수자 혐오, 인종주의와 언론에 의해 단절과 고립을 겪은 연인들을 보며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세상과 맞서 싸웠나 생각해봅니다. 몸과 말로 애정을 표현하는 열심,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인내, 그리고 고통을 승화시키는 화해의 마음. 사랑의 여정 속에서 마주할 수많은 싸움에 필요한 무기란 결국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세 다큐멘터리를 통해 발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