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기쁨, 설렘, 열정만으로 삶이 가득 차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감정들은 무결하지도, 명확하게 규정되지도 않을 때가 많습니다. 불편한 감정은 외면해버리면 그만일 때도 있지만,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은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불안과 혼란, 슬픔을 묵묵히 승화해 음악으로 선보이는 싱어송라이터 전진희를 소개합니다.
피아노와의 오랜 우정 위에
뿌리내린 음악
전진희의 음악에는 피아노라는 악기와 살을 맞대고 지낸 시간이 그대로 새겨져 있어요. 원래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그룹 ‘하비누아주’의 멤버로, 다양한 뮤지션들의 세션으로 활동해 왔거든요. 피아노가 전진희 음악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이유입니다.
건반 위에서 단련된 내공이 특히 돋보이는 [Breathing](2021)은 매달 한 곡씩 원테이크로 연주한 즉흥곡을 엮은 앨범이에요. 그가 표현하려는 고요한 정서와, 계절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감정의 흐름이 드러나죠.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전진희의 손을 잡고 깊은 산책로를 따라 걷는 기분이 들어요. 철저하게 설계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내뱉은 선율이 청자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목소리가 더해진 노래에서도 연주자의 면모가 빛을 발하는데요. 정교한 오케스트레이션, 온전히 피아노 선율만으로 구성된 솔로, 적절한 여백은 그의 목소리가 편히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줍니다. 또한 어떤 합주에도 능하기에, 다양한 개성의 뮤지션들(지언, 곽진언, 이영훈, 강아솔, 코듀로이, 박지윤 등)과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죠.
삶과 사랑,
꿈을 찾아가는 고독한 여정
안전한 기지가 되어주는 피아노에 더해진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전진희는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한 명의 구도자와 같이 마음 구석구석을 탐색해 온 과정을 풀어냅니다.
그의 노래에 등장하는 화자는 외롭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잣말을 읊조리는 듯 해요. 삶에 대한 의문은 마치 호흡과 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한숨’, ‘불안’). 취기를 빌려 푸념을 하고(‘취했네’), 자기혐오(‘내가 싫어’)와 관계에 대한 회의감에 지쳐 체념한 화자는 사랑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벽’, ‘놓아주자’,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보낼 수 없는 편지’, ‘어디에 있나요’, ‘안부’). 그리고 점차 누군가와 다시 연결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한없이 그리운 대상과 닿을 수 없는 현실을 힘겨워하는 데서 나아가, 비슷한 슬픔을 공유하는 이들과 다시 교감을 꿈꿉니다(‘우리의 슬픔이 마주칠 때’, ‘왜 울어’). 여러 노래에 등장하는 ‘너’와 ‘우리’는 위태로워 보이는 화자가 의지하는 오래된, 혹은 새로운 사랑의 관계들이 있음을 넌지시 보여주죠. 최근 발매된 3집 [아무도 모르게]의 수록곡 ‘선물’에서는, 예정된 끝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가 사랑에 있다는 걸 담담히 고백하는 전진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끝나게 될 우리들의 이야기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얘기하네
_전진희, ‘선물’
확장되는 전진희의 음악 세계
혼자를 넘어서려는 전진희의 시도는 종종 작업 방식과 솔로 외의 활동에서도 나타납니다. 싱글 ‘낮달’(2021)에서는 피아노 반주에 일렉트로닉한 분위기를 덧입힌 것을 시작으로, 얼터너티브 록밴드 wave to earth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여름밤에 우리’(2022)는 청춘을 반짝이는 여름에 빗대어, 아련한 신시사이저 사운드로 담아냈죠. 또한 그는 MBC 창사 60주년 VR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영상이 전하는 감동을 구현해 내기도 했어요.
한편, 전진희는 느슨하게 연결된 포크 뮤지션들의 음악동아리 ‘작은평화’의 구성원인데요. 동료 싱어송라이터 강아솔과 함께 구상한 이 동아리는 자생이 어려운 인디 씬에서 후배 뮤지션들과 연대하고자 만들어졌다고 해요. 강아솔, 박현서, 전진희에서 시작된 작은 커뮤니티는 이제 8명으로 늘어나 세 개의 싱글을 발매하고 단독 공연도 열었습니다. 끊임없는 음악적 성장을 도모하고, 가까운 이들과 사랑을 나누고자 힘쓰는 전진희의 행보는 나, 너, 우리로 확장되었던 노래 가사의 연장선으로 느껴집니다.
예술의 가치는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관점이나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보기도, 보이기도 힘든 감정을 파헤친 예술 덕에 누군가는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니까요. 직시하기 어려운 감정들 앞에서 도망가지 않은 전진희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 한켠에 잔뜩 쌓인 먼지를 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