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방인 카프카

불안한 존재를 대변하는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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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는 아침에 눈을 떴더니 한 마리 거대한 갑충으로 변해있었다는 강렬한 이야기의 작가로 유명합니다. 『변신』의 작가라는 것 이상으로 카프카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카프카는 그가 창조해 낸 이야기만큼이나 불안했던 인생을 살았습니다. 카프카 인생에서 중요한 키워드인 ‘소외’는 그가 프라하 태생의 유대인이자 독일어를 쓰는 작가라는 점에서 비롯됩니다.

그 키워드를 이해하려면 당대 사회 분위기와 그의 개인적 환경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프카는 유대인 집단에도, 프라하라는 지역에도, 가족 공동체에서도 온전히 안식을 얻지 못한 비주류였습니다.

그 어느 집단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소외감’과 ‘정체성’이 바로 카프카의 작품과 그의 인생을 대표하는 단어입니다. 카프카의 배경을 알아보는 것은 거대한 한 시대를 이해면서도 소외당하는 인간의 자아를 조심스럽게 헤아려보는 작업입니다. 오늘은 소외와 배척, 억압의 환경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카프카의 독특한 배경을 들여다봅니다.


유대인 카프카

1920년대 미국 캔자스주에서 우생학적으로 완벽한 가족을 찾는 행사의 한 장면. 우생학하면 나치를 떠올리지만 여러 국가에서 널리 실행되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 캔자스주에서 우생학적으로 완벽한 가족을 찾는 행사의 한 장면. 우생학하면 나치를 떠올리지만 여러 국가에서 널리 실행되고 있었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 American Eugenics Society

19세기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후 20세기까지 인간과 인간의 위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각 국가의 민족주의, 인종주의와 교묘하게 결합하면서 인간과 동물,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우위를 따지는 담론이 퍼져나갔죠.

당시 유럽 사회는 유대인에 대해 관용 혹은 배제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주로 경제적 상황이 어떤 수준의 정책을 택할지 판단하는 잣대가 되었죠. 유대인들은 정책에 맞춰,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자본주의와 산업화에 편승해 빠르게 중산층으로 성장했고, 유대인에게도 너그러웠던 전문직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이들이 경계를 허무는 이웃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치 영화의 반 유태주의 장면. “중세 시대에는 이방인인 유태인에게는 시민권이 없었다. 그들은 게토라고 하는 제한된 구역에 거주해야 했다.”고 쓰여있다.
나치 영화의 반 유태주의 장면. “중세 시대에는 이방인인 유태인에게는 시민권이 없었다. 그들은 게토라고 하는 제한된 구역에 거주해야 했다.”고 쓰여있다. 이미지 출처: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하지만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유럽 사회에 동화되려고 할수록 그들을 향한 유럽 주류 집단의 증오와 불안은 커집니다. 거부감은 유대인의 신앙, 민족성, 외모, 언어 모든 것을 폄하시키는 담론으로 확장되었고, 마침내 사회에서 제거해 버려야 하는 독소 같은 존재로 여기며 인간의 범주에서 유대인을 퇴출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5살의 프란츠 카프카
5살의 프란츠 카프카. 이미지 출처: Klaus Wagenbach Archiv, Berlin

이런 환경에서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프라하는 다민족 사회에 가까웠습니다. 체코인, 독일인, 유대인들이 섞여 지냈죠. 카프카는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프라하의 주된 무리였던 체코인도 아니었고, 카프카의 아버지는 그가 당시 지배층이었던 독일인 집단에 녹아들도록 독일어만 사용하는 학교에 진학시켰습니다. 하지만 독일어를 쓴다고 해서 독일인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었죠. 게다가 카프카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미 집안은 서유럽 세계에 동화된 중산층이었기에 유대인 종교, 문화, 민족성이 카프카에게 주된 기둥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곳에 속하지 못한 특수 소수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철저히 세속화된 가정에서 유대인 문화와 단절되어 성장한 카프카는 성인이 되어 유대 풍습과 사상을 접합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문명의 진보에서 낙후된 시골뜨기 집단, 차별받아 마땅한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의식이 강하고 화목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성공적으로 간직해내는 문화 집단이 바로 유대인 공동체였죠.

카프카는 여자 친구에게 스스로를 “가장 서부 유대인스럽다”고 표현합니다. 서구화 문명을 따라가던 서부 유대인으로써의 긍정적 자긍심이 아닌, 진정한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상실과 소외감을 절망스럽게 토로한 것이죠. 동부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를 부러워하면서 카프카는 서부에도, 동부에도 주류로써 온전히 안착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카프카의 유대인으로서의 인생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주류에 동화되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그 맹신이 곧 또 다른 디아스포라를 낳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듯합니다.


아들로서의 카프카

카프카
이미지 출처: Klaus Wagenbach Archiv, Berlin

카프카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유대인 집단에서 벗어나 유럽 주류사회에 편승하기 위해 자수성가한 인물입니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죠. 유일한 외동아들이었던 카프카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고, 아들이 자신보다 더 성공적으로 독일 지배 집단에 포함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아버지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아들 카프카에게 모질었습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녀들에게 독설을 퍼붓고, 기분에 따라 말을 바꾸며, 자녀들이 조금이라도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할 때면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마치 집안의 독재자처럼 모든 것을 자기 마음에 맞게 쥐락펴락하는 불같은 기질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카프카는 아버지를 떠올리기만 해도 말을 더듬고 사고 회로가 정지하며 자기 의지대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수동적인 아들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세상의 중심이 아버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죠. 약혼자를 결정하는 것도, 직업을 고르는 것도 모두 아버지의 판단 가치에 맞춰 움직였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일을 하기 시작하면 아버지께서는 제 일이 실패할 것이라고 겁을 주시곤 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아버지의 의견 자체가 지극히 경외스러운 것이었기에, 당장은 실패가 눈앞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필연적으로 닥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던 것입니다. 저는 안정을 찾지 못했고 저 자신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제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아버지께서 저의 쓸모없음을 입증하는 데 활용하실 만한 근거도 늘어났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아버지는 점차 실제로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_프란츠 카프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카프카는 자신의 결정 자체를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족, 민족, 국가 그 어디에서도 받지 못했다는 소외감은 그를 글쓰기로 이끌어 줍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자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행동은 글쓰기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문학에 재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나 자체가 곧 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정도로 글쓰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미지 출처: unsplash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치밀하게 진술합니다. 카프카의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교육, 사업, 유대 민족성, 직업, 결혼 등의 문제들에 아버지의 영향이 어떻게 얽혀 들어갔는지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짚어 고백하죠.

평생 억눌렀던 분노를 글로 표출하니 감정적일까요? 의외로 카프카의 어조는 차분합니다. 단순히 증오, 불만, 체념과 같은 부정적 감정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학적인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감정은 깊은 미움과 동시에 깊은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잘못된 방식이었지만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는 마음의 원천에 어쨌든 아버지의 염려와 애증이 담겨있다는 것을 섬세한 아들 카프카는 알고 있었던 것이죠.

카프카는 여느 부모 자녀와 다를 것 없이 부모님과 꽤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일상을 공유하고 서로 사랑을 확인하며 걱정과 염려를 전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 당연한 사랑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카프카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통해 특정 사건에서의 자신의 결정에 대해 아버지의 이성적인 동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마냥 분노에 찬 서한집으로만 해독하면 곤란합니다. 카프카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소외를 이겨내고 존재의 확신을 획득하기 위해 글을 쓰게 된 서사를 이해하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들이 문학 작품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됩니다. 그리고 카프카가 가족 집단에서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거꾸로 아버지의 언행 뒤에 깃든 본심을 헤아리는 쪽을 택하는 순수한 사람이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하면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는 한 삶을 포기해 버리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자신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거나, 관심의 사각지대로 밀려나 칩거하거나, 억눌린 분노를 잘못된 방법으로 표출하기도 합니다. 최근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분노를 표출하며 타인을 해치는 사건 사고들이 단적인 예시입니다.

카프카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소외의 현실로부터 셀 수 없는 단념과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존재 이유와 의미를 고민하는 것은 숙명이었죠. 그는 절망의 돌파구로 글쓰기를 택했고 사회 정체성과 실존의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자기 존재 확신을 향한 그의 발버둥은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쓰임을 찾으려 애쓰는 절박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작품을 계속해서 찾아 읽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다음 아티클에서는 오늘 살펴본 카프카의 삶이 투영된 작품들을 소개하려 합니다. 소외가 만들어낸 카프카의 불안한 정체성을 계속 기억해주세요.

  • 프란츠 카프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은행나무, 2015.
  • 최윤영, 『카프카, 유대인, 몸』, 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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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빈

고전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방황하고 반항하며 만드는 담론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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