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콘텐츠가 피드를 장악하고, 그마저도 배속으로 향유되는 지금.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의 ‘인내’는 현대인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것만 같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를 완전히 역행하는 신문화가 등장했다. 이른바 핫플레이스를 방문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줄 서 있기를 자처하는 웨이팅 문화가 그것이다. 이전과 비교하면 셀 수 없이 많은 콘텐츠가 거리에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소에 길게 늘어선 줄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짧은 시간에 다양한 것을 즐기고자 하는 트렌드를 뒤로 한 채 어떠한 어려움도 불사하겠다는 웨이팅 문화는 왜 생겼으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다수가 공유하는
성공 경험
얼마 전 잠실 롯데월드몰에 오픈한 ‘런던 베이글 뮤지엄’ 앞에는 눈을 의심케 하는 안내판이 세워졌다. 5시간 대기가 예상된다는 문구와 함께 손을 흔들며 웃고 있는 강아지 그림이었다. 베이글 하나를 구입하기 위해 다섯시간의 기다림을 불사한다는 것이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웨이팅은 이 시대의 괄목할만한 트렌드이자 마케팅 수단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지역에서 조금만 이름난 맛집이라면 웨이팅 번호가 몇 백번을 넘어가는 건 예삿일이다.
길게 늘어선 줄의 일원이 된다는 건 불편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다. 일행과 대화하는 시간도 잠깐일 뿐, 1시간 남짓의 시간이 흘러가면 뻐근해진 다리와 함께 줄이 줄어드는 속도에만 온 신경이 곤두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다림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유는, 다수가 경험한 성공을 나도 누려보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TV 광고, 전단 등에 의존했던 과거와 달리 소셜미디어에 실시간 평가 글이 업로드되고, 각종 별점과 리뷰가 혼재하는 지금은 누군가의 경험에 대한 성패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판단의 기준이 명확해진 만큼 웨이팅은 일종의 성공 보증수표로서 기능한다. ‘웨이팅 n시간’에는 다수가 어려움을 감수하고 찾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러한 환상은 소비를 마치고 난 후의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각고의 기다림 끝에 경험한 콘텐츠가 다소 만족스럽지 않음에도, 자신의 노력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 조금 더 높은 점수를 매기게 되는 것이다. 실제보다 후한 평가는 다시 누군가의 웨이팅을 유도하고,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면 비로소 괴이하리만큼 긴 줄이 탄생한다. 문을 열기도 전에 줄을 서는 오픈런도 불사하기 시작했다.
무한히 확장되는
웨이팅 유니버스
웨이팅 행위가 외식생활에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되면서 다양한 서비스로의 확장이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나우웨이팅’, 캐치테이블’, ‘테이블링’과 같은 솔루션이다. 초기에는 현장 방문 대기 인원을 관리하는 번호표 발급 서비스에 가까웠다면, 조금 더 소비자 친화적으로 편리한 줄서기를 돕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줄을 설 수 있는 ‘원격 줄서기’, ‘온라인 웨이팅’ 기능은 소비자들이 당연히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선택지가 되었다. 캐치테이블의 실시간 대기 서비스 ‘캐치테이블 웨이팅’은 올 7월 대기건수가 3월 론칭 대비 1510%나 증가했다고 하니 그 성장세가 무섭다.
디지털 대기가 가능해지면서, 1차 공간의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0차 공간’의 개념도 등장했다. 1차 공간이 음식점이라면, 0차 공간은 카페나 코인노래방 등 가볍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채택된다. “기다리면서 뭐할까?”가 소비자들의 새로운 고민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0차 공간에 대한 수요는 자연스럽게 주변 상권을 함께 활성화하는 효과를 만들고 있지만, 소비자 관점에서는 불필요하게 이중 지출을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러 콘텐츠를 찾아나설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도록 신중한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같은 소비자의 심리와 동선을 고려하여, 브랜드 경험을 극대화하는 ‘웨이팅 마케팅’도 주목받는다. 기다리는 시간 마저 즐겁게 승화시켜 브랜드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포토 부스 및 포토존을 마련해 인증샷을 찍게 하거나 한정판 굿즈를 제공하는 등 방문 혜택 다양화는 기본이요, 기다리는 동안 플레이할 수 있는 미니 게임을 준비하기도 한다. 지난해 열린 켈로그 팝업스토어는 근처 로컬상점들과 콜라보해 대기 시간 동안 스탬프 투어를 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지역 활성화는 물론이거니와 소비자들에게 하나의 브랜드 타운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사례였다.
웨이팅은 건강한 문화인가
기술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만큼, 정보 취약 계층과의 디지털 정보 격차 역시 날로 커지고 있다. 키오스크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큰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처럼, 줄서기 유니버스가 확장될수록 그 형평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웨이팅은 순서대로 원하는 것을 획득한다는 규칙이 있는, 일종의 형평성이 보장된 행위라면서 ‘노력하지 않고 얻었다’는 편법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오래 기다려서 원하는 걸 얻었다’는 게 자랑이 된 셈이라고 덧붙였다.a)
그러나 누구나 발로 찾아가기만 하면 공평하게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전과 달리, 디지털 서비스를 활용하면 이를 사용할 수 있는 집단과 존재 여부도 모르는 집단 간의 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앱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에 따르면 주요웨이팅 앱의 사용자 비중은 20~40대가 80%를 넘고, 50대 이상 비율은 10% 남짓에 그쳤다. 테이블링의의 60대 이상 이용자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물론 앱에 등록된 공간들이 대체로 젊은 세대가 주로 찾는 곳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지만, 디지털 정보 격차는 점차 생각이나 문화 등의 사회적 격차로 확대되어 누군가를 소외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과도한 웨이팅 열기에 휩쓸려, 주관이 담긴 합리적 소비를 뒷전으로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할 필요도 있다. 웨이팅 문화는 다수의 소비자나 유행을 따라 상품을 구입하는 현상을 뜻하는 편승효과의 전형이다. 길을 걷다가도 어딘가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괜히 기웃거려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표본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들의 선호가 나의 취향과 일치할지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 경험이 긴 시간이라는 기회비용을 필요로 한다면, 다른 선택지를 고민해 보는 것도 조금 더 여유로운 일상을 만드는 방법이지 않을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뜻밖의 취향을 발견하는 기쁨은 또 남다르다.
웨이팅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공급은 제한되어 있지만 수요가 넘쳐날 때, 희소한 재화와 가치를 얻기 위해 당연하게 기다림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때로는 아주 간절했으며, 때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의 웨이팅 문화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어떠한 욕망을 해소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대상이 필수 불가결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때문에 타인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맞는지 부단히 의심해야 한다. 결론이 ‘맞다’로 도출되었을 때, 비로소 기다림은 미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a) 한국일보, [라이프] “웨이팅? 오히려 좋아” 우리가 기다림 즐기는 법, 2023.04.21
- 아주경제, 달라진 외식문화에 날개단 캐치테이블, 웨이팅 대기건수 1500%↑, 2023-08-29
- 한국경제, 유명 맛집 줄서기도 이젠 스마트하게…웨이팅 앱 ‘전성시대’ [긱스], 2023-08-17